▲ 이른바 ‘에조 공화국’의 최후 거점이었던 하코다테의 고료카쿠(五稜郭)성. 대포가 일반화한 상황에 맞춰 나온 축성기법으로 설계되었다. ‘國土交通省 國土畵像情報(カラ-空中寫眞)’ 1976년 |
지난 회에는 1860년대 일어난 중국 청나라의 태평천국의 난과 근세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살펴보았다. 서구 열강이 중국 쪽에 관심을 기울이느라 일본 열도에 전력을 투입할 여유가 없는 틈을 타서, 근세 일본의 여러 세력은 수백 년에 걸친 유럽과의 접촉을 통해 얻은 경험에 바탕하여 주체적으로 정치 혁명을 이루어냈다. 확실히 그 과정은 일본인들이 주체적으로 추진한 것이었지만, 어떤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혈혁명(無血革命)은 아니었다. 유신 이전의 몇 년 동안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수도인 에도와, 덴노(天皇)의 거주지인 교토를 중심으로 신센구미(新選組)가 요인들을 암살하고 조슈번(長州藩) 무사들이 교토를 방화하는 등 테러 행위가 빈발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의 협상으로 1868년 4월 11일에 신정부군이 에도성에 무혈입성한 이후에는, 도쿠가와 막부에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무사들이 에도성 안팎에서 저항을 시작했다. 뒤이어 도호쿠 지역의 여러 번(藩)들이 연합군을 결성하면서 도호쿠 각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저항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자신들이 홋카이도에 가지고 있던 땅을 넘겨줄 테니 군사 원조를 해달라고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 요청하기도 했다.(아사히신문 2011년 2월 7일 ‘維新期の會津·庄內藩, 外交に活路 ドイツの文書館で確認’) 프로이센이 이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외부의 도움을 얻지 못하였고, 이 저항 전쟁 지향점에 대한 공통된 합의가 도출되지 못하였기에 도호쿠 지역의 저항은 채 1년도 지나지 못해 소멸되었다.
도호쿠 지역의 저항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에노모토 다케아키(本武揚) 등의 구막부 해군은 바다 건너 홋카이도 남쪽 끝을 점령하여 저항의 거점으로 삼았다. 홋카이도는 사할린섬, 쿠릴열도 등과 함께 대대로 아이누인 등 선주민의 거주지였다. 오호츠크해를 둘러싼 이들 지역을 일본인들은 아이누, 즉 에조(蝦夷)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에조치(蝦夷地)라 불렀다. 오호츠크해 남쪽의 일본과 서쪽의 중국 명·청조, 북쪽의 러시아는 중세 이래로 이들 지역에 대한 직간접적 지배를 시도하였다. 그 가운데 일본 세력의 거점은 홋카이도 남쪽 끝의 마쓰마에(松前)·하코다테(箱館) 등이었다. 일본인들은 마쓰마에를 중심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아이누인들을 노예처럼 착취하였다. 아이누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 저항 전쟁을 벌였지만, 그때마다 무참히 진압되었다. 1868년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마쓰마에번(松前藩)은 애초에 도쿠가와 막부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지만, 구()막부 해군이 바다 건너 오기 직전에 신정부에 동조하는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상태였다. 그래서 구막부 세력이 마쓰마에에 진입하자, 쿠데타 핵심세력들은 마쓰마에 시내를 방화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성을 빠져나가 혼슈로 탈출, 신정부군과 접촉하였다.
마쓰마에번의 거점을 점령한 구막부 세력은 고위급 간부를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하여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총재(總裁)로 선출하였으니, 이 정권을 속칭 ‘에조 공화국’이라고 한다. 일부 서양 세력은 이를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정권이 다스리는 범위는 홋카이도 내의 구일본인 거주지에 해당하였으며 에조, 즉 아이누인들은 제외되었다.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도 상층부에서만 이루어진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정권은 ‘에조 공화국’이라 불리되 그 실체는 ‘에조’도 아니었고 ‘공화국’도 아니었다. 실제로 이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국가를 수립할 생각은 없었던 듯, 구막부의 무사들이 이주할 수 있는 땅을 자신들이 개척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신정부 측에 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다.(‘幕末·維新’ 岩波新書, 162쪽)
그리고 1869년 3월, 신정부군은 ‘에조 공화국’에 대한 총공세에 돌입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막부 측의 암살단이었던 신센구미의 미남 부장(副將) 히지카타 도시조(土方三)가 전사하며 옛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한편 신정부군에 항복한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네덜란드 유학 당시 입수했던 오르톨랑(Joseph Louis Elzear Ortolan)의 국제법 서적 ‘만국해율전서(萬國海律全書)’를 신정부군 측의 구로다 기요타카(田淸隆)에게 건네면서, 자신이 죽어도 이 책을 연구해서 새로운 일본을 건설할 것을 부탁했다. 이에 감동받은 구로다는 신정부 측에 에노모토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신정부 측은 그를 홋카이도 ‘개척’ 담당으로 임명하였다.(‘지금도 일본은 있다’ 120~126쪽) 이처럼 ‘에조 공화국’의 핵심 세력들은 대부분 신정부에 합류하였지만, 그들의 지휘를 받던 많은 사무라이들은 신정부군을 피해 홋카이도 곳곳에 숨어 살아야 했다. 또한 마쓰마에번을 버리고 도망쳤다가 신정부군과 함께 돌아온 옛 지배층은 자신들로부터 버림받아서 어쩔 수 없이 ‘에조 공화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을 본보기로 숙청했다.(‘北海道の硏究 4 近世編 II’ 281~310쪽) 한국전쟁 당시 남한 정부로부터 버림받고 서울에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북한군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그것이 죄가 되어 ‘부역자’라는 이름으로 숙청당한 서울 시민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기존의 분권적인 번(藩) 체제를 폐지하고 이를 현(縣)으로 바꾸어 중앙집권적 정치구조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이 오늘날의 오키나와현에 존재했던 유구(琉球)왕국이었다. 유구왕국은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 나라를 만들었다는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반도의 삼국시대와 비슷하게 남산·중산·북산의 삼산시대(三山時代)를 거쳐 상씨(尙氏) 성을 가진 통일 왕조가 수립되었다. 1차 상씨 왕조라 불리는 이 시기의 유구왕국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잇는 무역국가로서 번성하였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만국진량(萬國津梁)의 종’이다. 이 종에는 ‘유구는 남해의 승지에 자리하고 있으니, 삼한의 빼어남을 모으고 대명국·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琉球國者南海勝地而, 鍾三韓之秀以大明爲, 輔車以日域爲脣齒在)’라는 명문이 새겨 있어서, 유구왕국이 이른바 동아시아 삼국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고려시대의 삼별초나 조선시대의 홍길동 세력이 오키나와 열도로 들어가서 왕국을 건설했다는 식의 제국주의적 주장은 학문적으로 입증되기 어려울 터이나, 이 종의 명문에서 보듯이 한반도와 오키나와 열도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참고로 근세 일본의 군담소설 ‘진서 유구기(鎭西琉球記)’에는 ‘유구는 원래 조선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대송(大宋)의 연호를 써왔는데, 최근에는 자립하여 스스로 연호를 세우고 송나라의 제도를 많이 배웠다’(권4)라는 대목이 보인다. 이것이 ‘울릉도는 신라 땅이다’라는 주장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임은 필자가 다른 글에서 논증한 적이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진실되지 않은 주장이다. 그러나 근세 일본인들이 조선과 유구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이처럼 번성하던 유구왕국은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규슈 서남쪽의 사쓰마(薩摩)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난 뒤 10여년이 지난 1609년에 사쓰마번은 군대를 보내 한 달 만에 유구왕국의 수도 나하(那覇)를 함락시키고 국왕 등을 에도로 연행하였다. 당시 제2차 상씨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유구왕국은, 이때 사실상 멸망하고 사쓰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 명·청의 책봉을 받는 유구왕국이 조공관계를 통해 얻는 무역 이익을 노린 사쓰마번은, 유구왕국을 형식적으로 독립국으로 놓아두면서 뒤에서 조종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양속(兩屬)’ 체제는 메이지유신 직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신정부가 폐번치현 방침을 오키나와 열도에서도 강행하려 하자, 유구왕국의 엘리트층은 저항하였다.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독립국이었던 유구왕국이, 이제는 정말 일본국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데에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유구왕국 내에 남아 있던 관료들은 업무를 보이콧하는 전략을 취했고, 일본과 중국 본토에 체류하던 관료들은 청나라 정부에 대해 중국과 ‘책봉관계’인 유구왕국의 독립을 지켜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처럼 1870년대 초에 시작된 유구 독립운동은 청나라와 메이지 일본의 대립 속에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때 일본 측은 오키나와 열도를 분할하여 서쪽 일부 지역에 유구왕국을 잔존시키자는 제안을 하는 등 유구왕국은 분단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유구 독립운동 세력은 드디어 청나라가 자국의 책봉국인 조선과 유구의 독립을 위해 무력을 동원했다며 이 전쟁의 귀추에 주목했다. 청일전쟁은 단순히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중국의 책봉체제에 놓여 있던 조선·유구·베트남·미얀마 등 중국 주변 지역 전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청일전쟁 중에는 청나라의 남양함대가 오키나와 열도로 진격하여 유구왕국의 독립을 되찾아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베트남과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불전쟁(1884~1885)과 청일전쟁(1894~1895)을 일으킨 청나라가, 비록 형식적인 독립국이긴 해도 중요한 조공국이었던 유구를 세력하에 남겨두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이 망상만은 아니었을 터이다.(‘日本の時代史 18 琉球·沖繩史の世界’ 232~266쪽)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함으로써 유구왕국이 독립국으로서 생존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청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모장정(毛長精)·모봉래(毛鳳來)·향덕굉(向德宏) 등의 유구 관리는 타국에서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이로써 유구왕국은 두 번째로 멸망하였다.
메이지 신정부가 유구왕국을 유구번(琉球藩)으로 격하시키고 일본의 일개 지방으로 편입시킨 1872년으로부터 1년 전, 유구왕국의 한 지방이었던 미야코지마(宮古島)섬의 주민들이 타이완 동남부에 표류한 일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54명은 선주민 부족인 모란사(牡丹社)에 살해되었고, 12명은 청나라를 통해 귀국할 수 있었다. 그전에도 이러한 사건은 종종 있었으나, 일본 정부는 이 기회에 오키나와 열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확보할 심산으로 ‘일본인’이 피해를 입었다며 청나라에 배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청나라 측은 타이완 주민 가운데 강남 지역에서 이주한 한족과 한족화된 선주민(평포족·平族)에 대해서는 자국이 책임지지만, 모란사와 같이 한족화를 거부하는 선주민은 자국의 관할권 밖에 놓여있다는 명분으로 배상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청나라가 타이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며 오키나와와 더불어 타이완까지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여기에 르 장드르(C. W. Le Gendre)라는 미국인이 등장한다. 아모이(廈門) 주재 영사였던 르 장드르는 일찍이 표류민 문제로 타이완의 선주민과 조약을 맺은 경험이 있어서, 일본 정부는 그를 외무성 고문으로 초빙하여 타이완 문제에 대해 조언을 듣고자 하였다. 그는 타이완이 ‘무주지(無主地)’이므로 일본이 차지해도 국제법상 문제가 없다고 한 뒤, 장차 일본이 다음과 같은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본토와 조선, 유구, 타이완 등 여러 섬을 둥글게 이음으로써 동방문명의 전진부대로 삼아 중국 제국을 발해만부터 타이완 해협까지 포위한다면, 훗날 중국 인민들이 일본으로 건너올 때마다 새롭고 기이한 사상을 배워 돌아가 옛 땅을 개화시킬 터입니다. 그리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게 된다면 마침내 전토가 문명의 영역이 될 것입니다. 여러 나라가 한 나라를 개국시킬 때에는 때로 무력을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臺灣征討事件’ 8 국립공문서관) 말은 온화하지만, 요컨대 일본이 조선·유구·타이완을 병합하고 어떤 수를 써서든 개국시킴으로써 아시아의 맹주가 되라는 제안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근대는 대체로 르 장드르의 이 건의대로 실현되었다.(伊藤潔 ‘臺灣’ 65쪽) 이처럼 일본으로서는 은인이라 할 르 장드르였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더 이상 활동할 여지를 찾지 못하고, 그 대신 조선으로 건너오게 된다. 아마도 르 장드르가 제안한 바를 실천하고자 한 일본 정부가, 그 밑작업을 위해 조선 측에 그를 추천하였을 터이다. 일본과 조선에서 이선득(李仙得·李善得)이라 불린 그는, 조선에서도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청나라·일본·조선을 모두 아우르는 ‘제너럴리스트’로서 명성을 날리고자 하였던 듯하지만,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조선에서 죽었다.
일본 정부는 르 장드르의 제언에 따라 타이완을 병합하고자 1874년 5월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구 열강의 압박으로 침략을 중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중앙 정부에서 있었으나, 선봉장 사이고 슈도(西鄕從道)가 독단적으로 출발해버리자 사후 추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군대가 독단적으로 강경책을 취하면 정부가 끌려다니며 뒤처리를 하는 근대 일본 국가 시스템의 맹점은 이때부터 이미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무튼 일본군은 선주민의 게릴라 전략과 풍토병에 시달리면서도 목표로 삼던 지역의 점령에 성공하였고, 청나라는 일본군의 행동을 ‘의거(義擧)’라고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원함으로써 서둘러 일본군을 철병시켰다. 17세기에 정씨 왕조를 멸망시키고 타이완을 병합할 당시부터 청나라 조정에서는, 타이완섬이 척박하고 다스리기 어렵다는 이유로 병합에 반대하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 일단 병합한 뒤에도 이상과 같이 청나라는 타이완의 지배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으나, 이처럼 일본의 야심이 드러나자 청나라는 서둘러 타이완 지배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1894년에 조선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1895년 3월에 일본군은 타이완섬 서쪽의 팽호군도를 점령하였다. 그 후 4월에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어 타이완섬과 팽호군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이 결정되었으나, 청나라 조정은 이 사실을 극력 타이완 주민들에게 감추었다. 주민들은 프랑스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으나, 원래 청나라가 일본에 요동반도를 넘겨주기로 했던 것을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저지한 ‘삼국간섭’ 이후, 서구 열강은 타이완의 운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잃었다. 구막부 세력도 타이완 주민도 헛되이 서구 세력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멸망 직전의 조선에서 그러하였듯이 서구 세력이 군사 원조를 하는 일은 없었다.
청나라가 타이완을 포기한 뒤, 타이완에 주재하던 청나라 관료를 중심으로 독립국을 수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경송(唐景崧)을 총재로 삼아 1895년 5월 23일이 ‘타이완 민주국’ 독립 선언이 이루어졌다. 명분은 독립국이되 실제로는 청나라에 버림받았으면서도 청나라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국가였기에, 지배층의 국가 수호 의지는 전무하였다. 청나라도 타이완에 있던 관료들에게 귀국할 것을 명하고 있었다. 당시 타이완 제일의 부호였던 임유원(林維源)은 국회의장에 취임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100만냥을 기부한 다음 날에 아모이로 탈출했다. 억지로 총재에 취임했던 당경송도, 1895년 5월 29일에 일본군이 상륙한 뒤 국가의 공금을 횡령하여 아모이로 탈출했다. 광동성에서 건너온 용병들은 일본군과 싸우는 대신 타이완 주민들을 약탈하였고, 고현영(辜顯榮)과 같은 사람들은 타이베이 성문을 열고 일본군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초대 타이완 총독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가 6월 17일에 시정식(始政式)을 거행하면서 100여일 만에 타이완 민주국은 멸망하였다.(주완요 ‘대만’ 114~125쪽, 伊藤潔 ‘臺灣’ 65~79쪽)
그러나 역사는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 청나라 관료들이 타이완을 버리고 일본군이 타이베이를 점령한 후부터, 타이완 주민들의 본격적인 저항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타이완 전역을 점령하기까지는 4개월이 더 걸렸고, 타이베이와 타이난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군은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타이완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타이완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국민당의 타이완 점령과 2·26 사건을 거치며 더욱 확고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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