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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히데마사(일본어: 中川秀政, なかがわ ひでまさ 1568년 ~ 1592년 11월 27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이다. 아버지는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清秀). 분고 국(豊後国) 오카 번(岡藩) 초대 번주인 나카가와 히데시게(中川秀成)의 형이다. 처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딸 쓰루히메(鶴姫)가 있다. 관위는 우에몬후(右衛門尉)이다. 아버지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노부나가 사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를 섬겼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가 사쿠마 노리마사(佐久間盛政)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자, 셋쓰 국 이바라키(茨木) 5만 석의 영주로 대를 이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고, 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도 공을 세웠기 때문에 하리마 국 미키(三木) 6만 5천여 석에 가증이봉된다. 1587년 규슈 정벌, 1590년 오다와라 정벌, 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여 조선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수원 부근에서의 매사냥 중 조선 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향년 25세였다. 매사냥 중 조선 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탓에 히데요시의 질책과 영지가 몰수될 것을 우려해 은폐했지만, 도리어 발각되어 히데요시의 화를 돋구었다. 하지만,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의 공적을 고려해 동생 히데시게로의 영지 상속을 윤허했다. 단,《조선왕조실록》에서는 평수정(平秀政/平秀正)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응인(韓應寅)의 서장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 명에 호송된 후,[1] 사형에 처해졌다.[2]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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