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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송재문가옥(永同宋在文家屋)

백삼/이한백 2014. 6. 16. 11:25

영동송재문가옥(永同宋在文家屋)

■ 종 목 : 중요민속자료 132호
■ 명 칭 : 영동송재문가옥(永同宋在文家屋)
■ 분 류 : 가옥
■ 수 량 : 일곽
■ 지정일 : 1984.01.10
■ 소재지 :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420-2
■ 시 대 : 조선 고종
■ 소유자 : 송재문



고종 22년(1885)에 지은 집이다. 넓은 들 위에 자리잡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행랑채·광채 등이 있었으나, 행랑채와 광채는 1920년대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이 멀찌감치 떨어져 남아있고 넓은 들 위에 자리잡아 편안하고 안정된 모습을 지닌다.

집의 앞쪽 약간 경사진 터전에 ㄷ자형의 사랑채가 위치하는데 뒤편이 높고 앞쪽이 낮은 상태다. 사랑채는 중앙의 사랑방과 사랑대청을 중심으로 왼쪽 꺾여진 부분은 뒷방·사랑부엌·앞방이 위치하고, 오른쪽으로는 골방·건넌방·누마루가 위치한다. 누마루는 사방을 개방했는데 서쪽으로만 간단하게 난간을 시설하였다. 안채는 一자형 평면으로 왼쪽부터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배열되었다. 안방의 앞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여 대청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부엌의 앞마당에는 장독대가 있다.

조사 당시에 이미 몹시 낡고 퇴락해 있었으나 남아있는 것만이라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학술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지정·보존되고 있다.

※ 보충설명

이 집은 명기(銘記)가 있는 망와의 기록에 따라 1885년에 지어진 건물로 생각된다. 재미있는 것은 충청도와 일부 경기도에서만이 이와 같은 기명와(記銘瓦)를 가끔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건물은 남향( 자오좌향(子午坐向))한 안채에 수직축을 맞춰 전면에 H자 모양의 사랑채를 놓고 안마당 동쪽에는 곳간채를 배치하였는데 안채와 사랑채와의 사이에 있었던 행랑채, 광채 등은 20세기 초(1920년대)에 멸실되고 대신 지금은 농가에 필요한 임시 경영시설물들이 들어서 있다.

안채는 남도형식의 평면구성을 이루어서 부엌, 안방(아랫방), 웃방, 2간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열되었다. 말하자면 6간 전후퇴집인 셈인데 아랫퇴는 처마 밑을 이용해서 헛기둥만 세워서 만들었다. 머릿퇴는 만들지 않았는데 사랑채가 따로 있는 까닭이다.

부엌은 앞퇴에 봉당을 만들고 안으로 들어와서 벽을 만들며 부뚜막 위에는 벽장을, 아랫퇴 상부에는 살강이 시설되었다. 아랫방에서 대청(大廳)까지는 앞퇴에 툇마루를 깔았으며 대청 전면은 개방(開放)하였다. 대청과 웃방과의 사이도 불발기 분합문(分閤門)을 달아서 필요에 따라 여름에는 개방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그러나 뒷벽은 외진주 자리에 놓지 않고 내진주(고주(高柱)) 사이에 만들어서 따로 뒤툇마루와 구분짓고 있다. 특이한 공간이용인 셈이다. 건넌방 앞퇴에는 위로 다락을 매달고 아래는 굴묵으로 쓴다.

구조는 1 고주 5량으로서 장혀로 받친 납도리집이다. 지대돌은 약간 가공한 자연석을 외벌 혹은 두벌로 돌렸으며 초석(礎石)은 덤벙주초인데 지면에서 한 자 정도 띄운다. 기둥은 네모이고 굵직하게 쓴다. 납도리는 모서리를 접어 반깎기만 하고 굴리지는 않아서 정교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처마도리, 중도리, 종도리 모두 장혀로 받쳤으며 종보와 대들보 아래에도 단이로 보강했다. (단이 : 보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받침목) 단이는 남도의 민가에서 자주 사용되는 부재이다. 대공은 사다리꼴 판대공이며 장혀와의 사이에 긴소로를 끼워 넣었다. 이것은 연대가 떨어지는 집에서 자주 나타난다. 지붕은 합각기와지붕으로서 합각면에는 조금 치졸하지만 회색벽돌로 만든 희(囍)자 모양이 장식되었다.

사랑채는 앞쪽의 양날개는 많이 내밀고 뒤로는 반간만 내 달았다. 특히 서쪽 날개를 동쪽 날개보다 길게 한 것이 특이하다. 평면의 구성은 가운데 몸간에 위·아래사랑방과 2간 사랑대청을 나란히 두고 서쪽 날개는 뒤로부터 몸간보다 반간을 빼서 뒷방, 사랑부엌(상부에 다락), 상·하앞방, 작은부엌을 배치하며 동쪽 날개는 역시 반간을 뒤로 빼서 골방, 상·하건넌방, 누마루의 차례로 놓인다. 몸간은 앞뒤로 퇴가 있고 서쪽 날개는 단간이며 동쪽 날개는 머리로 앞퇴를 달았다. 몸간의 앞퇴와 동쪽 날개 머릿퇴에는 툇마루를 깔고 뒷방의 서쪽과 북쪽, 앞방의 동쪽에는 쪽마루가 시설되었다. 대청의 앞문은 분합문(分閤門)으로 된 바 내진주 사이에 만들어졌다. 누마루는 사방으로 개방되었는데 서쪽으로만 간단한 난간이 시설되었다.

구조는 1고주 5량을 기본으로 하는데 기법이 안채보다 훨씬 장식적이며 기본 법식에 따라 잘 만들어졌다. 지대석은 화강암으로 잘 다듬어 한벌을 돌리고 초석은 높은 주초로 하였다. 네모기둥 위에 납도리를 얹었으며 장혀로 받쳤다. 그러나 대들보 아래는 단이를 쓰지 않은 것이 눈에 띈다. 대공은 사다리꼴 판대공인데 어깨가 거의 수직에 가까우며 종도리 아래에는 장혀로 받치고 헛창방을 보내서 사이에 소로를 끼우고 있다. 지붕은 합각지붕인데 날개 부분은 서쪽을 앞 뒤 모두 우진각으로 처리했다. 반면 동쪽 날개는 합각으로 된 점이 특이하다.

이 집은 사랑채가 앞길에 드러나 있고 담장 조차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토담이 일부 있을 뿐 원형이 남아 있지 않아서 외부공간의 구성은 짜임새를 잃었다. 기타 건물로 특기할만한 것은 곳간채라 하겠다. 건축년대는 20세기 초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지만 전통적 방식에 따른 빈지널의 광채이다. 긴 뒤주를 2개 연달아서 세워논 것처럼 만들었는데 1간 간격으로 네모기둥을 세우고 사이에 샛기둥을 넣어서 빈지널을 수평으로 끼운 것이다. 바닥도 널마루가 깔렸고 천장에도 널반자를 했다. 지붕은 골함석으로 되었지만 아마 초가였을 것이다. 이것은 중남부 내륙지방에서 가끔 보는 경영시설 중 하나이다. (이것의 축소 형태인 뒤주는 중남부지방에서 자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