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보도연맹 양민학살 사건.
(6월 항쟁 기념 만화 '100도' 중 보도연맹 학살 장면.)
먼저 보도연맹 사건이 뭔지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관련 위키백과 내용을 보시고....
보도연맹 사건(保導聯盟事件)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과 헌병, 반공 극우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를 포함해 적어도 20만 명 남짓을 살해했다고 여겨지는 최대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이사건에는 미군도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에 개입했음을 짐작하는 설이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에서 철저히 은폐하였고 금기시되어 보도연맹이라는 존재가 잊혀져 왔었지만, 1990년대 말에 전국 각지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피해자들의 시체가 발굴되면서 보도연맹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최근에도 계속적으로 사건 진상 조사와 논의가 이루어지고있다.
보도연맹의 조직과 특징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좌파 전향자로 구성되었던 반공단체 조직이며,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일제강점기때 친일 전향 단체였던 대화숙을 본떠서 만든조직체 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 절대 지지’, ‘북한 정권 절대 반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사상 배격 · 분쇄‘, ‘남로당, 조선 로동당 파괴정책 폭로 · 분쇄’, ‘민족진영 각 정당 · 사회단체와 협력해 총력을 결집한다’는 주요 강령 내용 등을 내세워 철저히 반공주의 강령으로 삼았었다. 국민보도연맹 외견상 민간단체 성격을 띄었으나, 조직체제를 보면 총재직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효석이 맡았고, 고문으로는 신성모 국방장관, 지도위원장에는 이태희 서울지검장등이 맡았다.
보도연맹원 가입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따라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서울만해도 거의 2만 명에 이르렀다. 보도연맹 대상자는 좌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공무원들의 건수올리기 실적주의때문에 거의 가입을 강제받았으며, 게다가 지역별 할당제때문에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국민보도연맹 조직은 내무부(당시 내무부장 장석윤)가 관련된 실질 관제 조직이었다.
선우종원 당시 치안검사는, “연맹원 모집은 주로 좌파 경험이 있는 자들이나, 사상범(양심수)을 대상으로 하였다.”고 주장했지만[출처 필요], 실제로는 애?은 사람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서 가족 중 월북자나 남로당원이 있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가입한 경우도 많았고, 평범한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나눠주거나 비료주는 조건으로 가입 도장을 받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한, 공무원들이 실적을 높이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쌀, 식량 등을 배급해준다"고 선전하였고, 실제로 배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상에 관계없이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등록한 양민들이 많이 있었다고 알려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10대 중ㆍ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것이 밝혀짐에 따라 보도연맹 가입은 '공무원들의 실적주의'와 '반(半) 강제 가입'으로 인해 많이 생겨났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면책 약속과 달리, 일단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 기합이나 체벌을 받아가며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에 불참하거나 달아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 즉, 각종 장관들이 국민보도연맹 요직을 맡았다는것을 감안한다면, 민간단체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정부조직 단체였다.
보도연맹원 학살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한국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대량학살)범죄를 일으켰다. 경기도 이천시에서는 군복을 입고 경찰 마크를 붙인 사람들이 국민 보도연맹원 100명을 총살했고, 대전 교도소에서는 3,000명을 처형하는 등, 대한민국 전역에서 각 마을별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학살 주체가 당시 육군특무대(CIC)와 헌병이었다. 특히 최후방이었던 경상도 일대의 보도연맹 학살은 그 피해정도가 심각했는데,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같은 반공주의 성격의 극단적인 우파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우발적인 학살이 아닌 철저히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이승만정권의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곧 조선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좌파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 와중에 대한민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이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자 그제서야 대통령 이승만이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수십만명이 학살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되어 국민보도연맹 조직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오늘날 현재에도 추측만 할뿐,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이라는 명분으로 군인(헌병)과 경찰이 이들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후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은폐하고 금기시했었기 때문이다. 보도연맹 학살이 진행된 와중에서 운좋게 목숨을 부지한 보도연맹원들도 있고, 유가족도 살아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진 못했다. 그들이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거나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철저히 은폐되었고 오랜 기간 동안 금기시되어왔다.
따라서 6.25전쟁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 많게는 50~100여만명이 학살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이하 생략)
(출처:위키피디아)
그리고 그 처참한 학살 장면들....
(참고로 이 자료는 얼마 전 미국이 기밀해제한 보도연맹 양민학살 사진자료들이다.)
(많은 수의 양민들이 끌려오고 있다. 과연 그들의 운명은....)
(사망 직후.)
(총살 직전의 사람들.)
(........ 어찌 차마 이승을 떠날 수 있으리....)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온 양민들...... 과연 그들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이미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을 향하여 확인사살을 하고 있다.)
(시체를 파묻고 있는 장면....)
(그러한 비극이 있은 뒤 반세기 후에, 그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거창 양민학살 사건
(지금은 이렇게나마 추모 묘역이 건립되어 있고, 근처에는 기념관으로 당시의 비극을 알리고 있다 한다. 이렇게나마 고창 양민학살의 원혼들이 편히 눈을 감았으면.... 하지만 아직도 특별법 제정부터 손해배상 소송까지,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참고:거창 양민학살은 사진자료가 매우 부족한 것을 양해해 주시길.....
먼저 거창 양민학살에 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자료.
거창 양민학살 사건
1951년 2월 10~11일 양일간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공비토벌중이던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양민 500여 명을 공비들과 내통했다 하여 집단학살한 사건.
한국전쟁 중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1951년 초반, 국군은 전방의 조선인민군과 중국군뿐만 아니라 후방의 빨치산으로부터도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에 국군은 전선을 단일화하기 위해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거창에 배치된 군부대는 11사단 9연대 3대대였다. 그러나 빨치산의 유격전술 때문에 만족할 만한 토벌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9연대장 오익균(吳益均)의 지시를 받은 3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은 1951년 2월 10, 11일 양일간에 신원면 소재 부락주민 570명을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대부분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총살했다. 학살당한 570명 중 젖먹이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 327명이었고, 나머지는 노약자거나 부녀자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학살당한 사람들은 빨치산이 아니었다. 이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후 한 사병이 엄상섭(嚴祥燮) 의원에게 사건의 내막과 학살당시의 사진, 그리고 학살당한 사람의 명단을 보내옴으로써 국회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국회조사단의 현지조사는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金宗元) 대령의 집요한 방해를 받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집요한 추적 끝에 사건의 진상이 국회에 공개되었다. 국회의 결의로 이들 범죄자들은 1951년 12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오익균·한동석은 무기징역을,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얼마되지 않아 김종원을 특사로 풀어주어 경찰간부로 채용했고, 오익균·한동석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출처: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리고 어렵게 찾아낸 사진자료와 그것을 재현한 디오라마.
3.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물론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들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알 듯 싶지만, 역시 사전 설명 들어간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老斤里良民虐殺事件)은 한국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군 1기병 사단 7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6일에서 1950년 7월 29일사이에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중들을 학살한 전쟁범죄이다. 노근리 학살사건을 실제 경험했던 유가족들로 구성된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에서는 사망자 135명, 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0여명이었다.
진상규명
군인신분이라 진급실패를 우려한 가해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덮여 있었지만, 1994년에 살아남은 주민이 저서를 출판하였고, 1999년 9월 9일 AP통신의 최상훈 기자등이 "노근리 학살사건은 진상규명이 되지 않으면 진실이 알려질 수 없는 사건이므로 반드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탐사보도를 시행하여 진상규명이 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10월 29일 주한미군이 현지조사를 실시하여, 2004년에는 사건의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이하 생략)
그리고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노근리 학살사건의 전개.(사실 노근리사건 역시 학살 장면을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그저 그 처참한 현장을 알리는 노근리 굴다리 현장만 있기에 영화 '작은연못'의 장면과 같이 올리기로 하겠다.)
1950. 7. 23 정오,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상황 속에서도 영동읍 주곡리마을은 평안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이 들어와서 "곧 이 마을에 전쟁이 터질 것이니 모두 임계리로 피난하라"는 명렬을 듣게 되었고, 이에 주민들은 짐을 싸 들고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25일, 미군은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들을 남쪽으로 피난하도록 유도하였고, 25일 밤, 피난민들은 잠시 하가리 하천변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26일) 아침, 4번국도를 통하여 피난을 온 피난민들은 미군의 유도에 따라 경부선 철로로 피난 경로를 바꾸었다. 그때 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갑자기 미군은 피난 행렬을 멈추게 하였고, 이에 피난민들은 아무 대책 없이 잠시 철로 위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들 위로 미군 전투기에서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군의 명령.....
"모조리 죽여라!(Kill them all!)"
이?의 무차별 폭격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노근리 학살사건의 실제 유적지 쌍굴다리. 총자국이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이에 목숨을 보전한 나머지 피난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쌍굴다리로 들어가서 피신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으로도 총성이 이어졌다.
이날 미군의 총살, 폭격으로 결국 피난민들 중 10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그 동안 남한 정부와 미국 정부가 묵인해 오다가 몇년 전 당시 작전에 투입되었던 장병들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당시 벌어졌던 숱한 양민학살들 중 대표적인 사건 3가지만 뽑아서 그 현장들을 돌아 보았다.
사실 양민학살은 이 말고도 개승만의 한강다리 폭파사건, 교도소 집단 학살사건, 지리산 주변에서 벌여진 남한군과 빨치산에 의한 양민학살 등, 더욱 많지만, 지면과 시간 관계상 다 올리지는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이렇듯, 전쟁이 나면 항상 피해를 입는 것은 무고한 민간인이라는 것을......... 모두들 기억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60년 전 무고하게 죽어간 모든 원혼들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마지막으로 짤림방지는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
참고로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이 중지된 것도 당시 이승만이 스스로 중단한게 아닙니다.
미국 종군기자들이 이승만 친위대들이(순혈 친일파) 최전선에는 배치가안되어있고 후방에 머물러 싸우지않차,
매일 후방지역만 주둔해있는걸 이상하게 여기고 몰래 뒤쫓아가 그들이 민간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를 알고 경악하여 즉시 전세계에 이 사실을 알렸고, 자기들이 지켜주러간
대한민국에서 오히려 민간인 대량학살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전세계는 크게 분노했으며,
미국은 이 미치광이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이승만에게 강한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합니다.
그러자 이승만이 부랴부랴 중지명령을 내려서 학살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완용보다 더 심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입니다. 역대 가장 많은 자국민을 살해한 희대의 쓰레기라고 불리기도 아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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