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임방울 쑥대머리

백삼/이한백 2014. 6. 9. 09:56

쑥대머리

      국창 임방울    http://www.kbs.co.kr/radio/scr/amuse/replay/2078883_51133.html    (6/6일 3번째 쑥대머리)

 http://www.kbs.co.kr/radio/scr/amuse/notice/index.html

쑥대머리 귀신형용(鬼神形容), 

적막옥방(寂寞獄房)의 찬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漢陽郎君) 보고지고

오리정(五里亭) 정별후(情別後)로 일장서(一張書)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父母奉養) 글 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난가

여인신혼(宴爾新婚) 금슬우지(琴瑟友之) 나를 잊고 이러난가

계궁항아(桂宮恒娥) 추월(秋月)같이 번뜻 솟아서 비치고저

막왕막래(莫往莫來) 막혔으니, 앵무서(앵무새)를 내가 어이 보며

전전반측(輾轉反側)의 잠못 이루니 호접몽(胡蝶夢)을 어이 꿀수 있나

손가락의 피를 내여 사정(思情)으로 편지헐까

간장(肝腸)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畵像)을 그려볼까

이화일지춘대우(李花一枝春待雨)의 내 눈물을 뿌렸으니

야우문령단장성(夜雨門令斷腸聲)의 비만 와도 임의 생각

추우오동엽락시(秋雨梧桐葉落時)의 잎만 떨어져도 임의 생각

녹수부용(綠水芙蓉)의 연(蓮)캐는 채련녀(採蓮女)와

제룡망채엽(提籠忘採葉)의 뽕따는 여인네도 낭군 생각은 일반이라

옥문밖을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겄나 

내가 만일에 임을 못보고 옥중원귀(寃鬼)가 되거드면

무덤 근처 있난 독은 망부석(望夫石)이 될 것이요

무덤 앞에 섰난 남근(*나무는) 상사목(相思木)이 될 것이오

생전사후(生前死後)의 이 원통을 알어 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아무도 모르게 울음운다.

쑥대머리

몇 달 동안 옥에 갇혀 씻지도 못하고 머리도 감지 못한 춘향이

그 날도 변사또 앞에 불려나가 곤장을 맞고 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으로 감옥에 돌아와 있는 춘향이 하도 불쌍하여

‘해설자’의 입장에서 애처로이 부르는 대목

 

국창 임방울 (林芳蔚 1904∼1961.03.10)

본명 임승근. 판소리명창. 광주(光州) 광산(光山) 출생.

14세 때 박재현(朴載賢)으로부터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고,

에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 《수궁가》 《적벽가》를 배웠다.

1928년 국창 송만갑(宋萬甲)의 권유로 상경하여 동양극장에서

첫무대를 가졌는데, 이때 《춘향가》 가운데 옥중가인 <쑥대머리>를

자신이 붙인 가사로 불러 인기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많은 음반을 냈다.

1960년 원각사(圓覺社)에서 《수궁가》 발표회를 가졌는데,

이때 녹음한 테이프를 복사하여 취입한 음반으로

수궁가》 《적벽가》 등이 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화중선(李花中仙)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명창.

창극이 성행하던 시절에도 판소리를 꿋꿋이 지킨 소리꾼으로서

창극을 외면하고 판소리를 꿋꿋이 지킨 소리꾼으로서

히‘쑥대머리’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소리꾼.

일제 시대 녹음한 소리가 아직도 전해짐.

대동가극단에서 판소리 위주로 활동하여 판소리 전통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글: 국근섭 (담양주간신문 명예기자, 담양예술인협회)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조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 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

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노래입니다.

 

추억


  (진양조)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魂)은 어디로 행(向)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던가.

  그리 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님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난 동무들은 백 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各道) 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槨)속에 들어도 나는 못 잊겠네.

  원명이 그뿐이었던가.

  이리 급작시리 황천객(黃天客)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 오는가.
  (중모리)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소리듣기는 검색창에 임방울의 추억 이라 쓰고 엔터하면 많은 사이트가 나옵니다. 듣고 싶은 사이트에서 감상하면 됩니다.

 이 노래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울광장 '노제' 때 안숙선 명창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후 박초월 명창 등과 <동일 창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며 최고의 명창으로 대중들을 울리고 웃기던

임방울 명창은 1961년 공연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상 처음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임방울 명창의 장례식에는

200여 명의 여류 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길을 가며 상여소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행렬 끝에 100여 명의 거지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공연 때마다 거지들은 무료로 관람시켰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추모의 표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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