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일본의 조선 침략준비 엿보이는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의 기록 (2004년 기사)|

백삼/이한백 2014. 5. 19. 13:33

 

하멜표류기 /헨드릭 하멜

 

수염을 깎고, 산발했던 머리카락을 칼로 벤 후, 배낭을 등에 지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찢어내고, 그것을 새것으로 바꾼다 한들 길 위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새로워지는 것은 아닐 터이나.

제주공항에 도착해 차편으로 서귀포의 중문 쪽으로 한 시간 여를 달려가면, 거기에 기묘한 형세의 산방산이 있다. 나는 이 산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이 산의 지척에 있는 산해바다와 용머리바위 인근을 서성거렸다. 그곳은 1653년 8월 16일, '동인도회사'(네덜란드어: 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 영어: Dutch East India Company)의 상선 '스페르베르'(네덜란드어: 'De Sperwer', 영어: 'The Sparrowhawk')호를 타고 타이완을 떠나 나가사키로 향하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일행이 자연의 재난을 만나 상륙했던 바로 그 장소다.

유럽인들이 ‘켈파르트 섬’(Quelpart)이라고 불렀던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 하멜을 포함한 선원 36명은 무려 13년 20일 동안을 ‘반억류상태’로 조선에 머무르게 된다. “너희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 관습이 아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효종은 ‘나가사키’로 보내달라는 하멜 일행의 청을 그렇게 거절했다. 치욕스런 청나라에서의 볼모생활을 몸소 겪어야 했던 효종은 이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유럽의 발전된 군사기술 및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자신이 추구했던 조선의 자주적 국방정책을 보완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멜 일당이란 기껏해야 동인도 회사에 소속된 장사꾼들이 아니었던가.

하멜의 표류기가 출간되기 전까지 조선이란 ‘은둔의 나라’에 불과했으며, 더구나 파란 눈의 서양인들에게는 단지 ‘청’의 속국으로 비쳤을 뿐이다. 간명한 보고서 형식으로 쓰여진 하멜의 조선에서의 생활기록을 보면, 이들이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조선관원의 눈을 피해 당시 조선에 도착한 청나라 사신을 향해 귀향을 호소하고, 또 조선 당국에서는 그런 그들을 청의 사신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일종의 연금상태에 처하게 만들었던 민감한 상황이 잘 드러난다.

‘조선’과 ‘청’ 사이의 이러한 미묘한 관계말고도 <하멜표류기(Hamel's Journal and a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1653-1666)>(김태진 옮김·서해문집 펴냄)에는, 조선의 정세에 예민하게 대응했던 ‘왜’의 치밀한 정보수집 능력도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 나가사키에 도착해 심문 받았던 조서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이 시기에 ‘왜’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이미 축적해 놓고 있는 상태였으며, 이러한 정보의 토대 위에서 조선을 대륙진출을 위한 전진기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도 생각된다.

요컨대 무려 60여 개에 달하는 심문 사항 가운데 나가사키의 조사관이 심혈을 기울여 하멜을 취조하고 있는 부분은 조선의 군사력과 무기체계, 성채의 구조, 교통과 통신 및 지리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왜’의 태도는 조선에 난파된 하멜 일행에 대한 조선관원들의 인간적인 환대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일찍이 네덜란드의 발전된 문명을 ‘난학’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일본적 근대를 돌격대 식으로 추진해갔던, 당대 일본의 시대적 기후를 하멜의 일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교훈 가운데 하나다.

산해바다에는 당시 하멜이 타고 왔던 스페르베르호가 재현되어 있고, 해안 쪽으로는 ‘하멜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멜이 바라보았을 그 제주 바다를 관광객들이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