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초기 3대 임금인 태조*정종*태종은 자의던 타이던 간에 죽기 전에 왕위를 물리고 있다. 그래서 넷째
세종은 정종과 태종 두 분의 상왕을 모셔야만 했다. 임금이 거쳐하는 정궁의 상왕을 모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
또 멀리 떨어져 모실 수도 없다. 큰 정사를 의논해야 하고 또 자주 문안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종 초년에
정인 창덕궁과 바로 이웃하고 았는 수강궁을 늘려 지금 창덕궁에 기틀을 잡고 있다.
그후 성종도 위로 세 분의 과부를 모셔야만 했다. 할머니인 세로비와 생모인 덕종비, 양모인 예종계비인데 문안
드리기 편하게 하기 위해 이 창경궁을 지금의 구조와 형태로 증건시키고 그곳에 모셨던것이다. 그것이 연유가 되어
임금과 별한 왕비들의 거처로써 대부분의 왕비들이 창경궁에서 승하하고 있다. 이 중에서 태어난 임금만도 정조*장
조*순조*헌종 네 임금이나 되고, 또 중종도 이 궁에서 승하하고 있으니 정궁으로도 자주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
만 정궁에 벼락치거나 궁중에 저주 같은 요사가 생기거나, 마마 같은 병환이 생기거나 반정*전란이 일어났을 때 피궁
(避宮)으로 자주 썼던 예비궁궐이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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