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징비록 - 7회 - 민중의 봉기,의병

백삼/이한백 2014. 1. 7. 09:54

훈련원 부봉사 권응수* · 정대임* 등이 그 향토의 군사를 거느리고 영천의 적군을 쳐서 부수고 마침내 영천을 수복했다.

 

☞ 권응수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17년(1584)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로서 북변 수비에 종사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해 영천성을 수복하고 병마우후가 되었으며, 선조27년(1594)에 충청도 방어사를 겸직했다. 선무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화산군에 봉해졌다.

 

☞ 정대임 : 조선시대의 무장.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에서 복병을 배치해 적군을 치고, 이어 영천에서 전공을 세웠다. 선조27년 무과에 급제한 후, 적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권응수는 영천 사람인데 담력과 용맹이 있었다. 정대임과 함께 향토의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적군을 영천에서 포위하려 했는데, 군사들이 적군을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권응수가 몇 사람을 베어 죽이자, 군사들이 다투어 분발하여 성을 넘어 들어가 적군을 좁은 거리에서 쳤다. 적군은 당적하지 못하여 창고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거나 명원루에 올라갔는데, 우리 군사들이 불을 질러 공격하자 모두 불에 타죽어 그 냄새가 수 리에 이르도록 풍겼다. 남은 적병 수십 명은 도주하여 경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신녕 · 의흥 · 의성 · 안동 등 고을의 적군은 모두 한쪽 길로 모이게 되어 좌도의 여러 고을이 보전되었다. 이것은 영천에서 한 번 싸워 이긴 공이라 할 수 있다.

 

좌병사 박진이 경주를 수복했다. 박진은 처음에 밀양에서 달아나 산 속으로 들어갔는데, 조정에서 전 병사 이각이 성을 버리고 도망친 죄로 숨어 있는 곳에 가서 베어 죽이고 박진을 병사(兵使)로 삼았다. 이때 적병이 각지에 가득하여 행재소의 소식을 남방에 전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인심이 동요하여 어찌할 줄 몰랐는데, 박진이 병사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에 흩어졌던 백성들이 점점 모여들었으며 수령들도 이따금 산골짜기에서 나와 일을 보게 되니 그제야 조정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

 

후에 권응수가 영천을 수복하자 박진은 좌도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성 아래까지 밀어닥쳤으나, 적군이 몰래 북문으로 나와 우리 군사의 후면을 엄습하자 박진은 달아나 안강으로 돌아왔다. 밤중에 또 군사를 성 밑에 잠복시켰다가 비격진천뢰를 쏘게 하여 성안 객사 뜰 가운데 떨어지자, 적병은 그 제작법을 알지 못해 다투어 모여들어 구경하며 서로 굴려보기도 하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조금 있다가 포가 그 속에서 폭발하여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쇳조각이 별처럼 무수히 부서져 흩어졌다. 맞아서 곧바로 죽은 적병이 30여 명이나 되고 맞지 않은 적병 또한 쓰러졌다가 한참 만에 일어나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은 적병이 없었으나 그 제작법을 알지 못하여 모두 신(神)이 하는 일이라 여겼다. 이튿날 적군이 마침내 전군대가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쳐 돌아가자, 박진은 경주로 들어가서 적이 남긴 곡식 1만여 석을 얻게 되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박진은 가선대부로 승진되었으며, 권응수는 통정대부로 승진되고, 정대임은 예천 군수로 승진되었다.

 

비격진천뢰는 옛날에는 그 제작법을 알지 못했는데, 군기시의 화포장인 이장손*이란 사람이 창안해낸 것이다. 진천뢰를 대완구(조선시대 화포의 종류)에 넣어 쏘면 능히 5백~6백 보 밖까지 날아가서 땅에 떨어진 지 한참 만에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는데, 적군이 이 물건을 가장 두려워했다.

 

☞ 이장손 : 조선시대 군기시의 화포장으로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비격진천뢰란 폭발탄을 발명, 제조했으며, 경상좌병사 박진이 경주 수복전에 이것을 사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각 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토벌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전라도에서 활약한 사람으로 전 판결사(장례원의 으뜸벼슬) 김천일*, 첨지 고경명*, 전 영해 부사 최경회*가 있다.

 

김천일의 자는 사중이다.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경기도에 이르니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그 군대에 창의군(倡義軍)이란 칭호를 내렸으나, 얼마 후에 군대의 형세를 갖추지 못하자 강화로 들어갔다.

 

☞ 김천일 : 조선시대 의병장. 유일로 천거되어 선조11년(1578)에 임실 현감을 지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 · 최경회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수원성을 거쳐 강화성으로 들어갔다. 조정에서 판결사의 관직과 창의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편으로 서울 성안에 밀사를 보내 민심을 수습하고 때로는 한강 가의 적진을 습격했다. 선조26년 6월에 적군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할 때 김천일은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경상 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등과 끝까지 싸우다 황진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적병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자 그는 아들 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 고경명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3년(1558)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 · 정언을 거쳐 울산 군수, 동래 부사를 역임한 후 사직하고 고향인 광주로 돌아갔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광주에서 모집한 의병 6천 명을 거느리고 금산에 침입한 적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 최경회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 원년(1568)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영해 부사 등을 지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규합해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금산 · 무주 · 성주 등지의 적병과 싸워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선조26년에 경상우병사로 승진되었다. 이해 6월에 서울에서 남하한 적군이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자 창의사 김천일 등과 같이 끝까지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고경명의 자는 이순이고 고맹영의 아들이다. 문재가 있었는데, 또한 그 향토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적군을 토벌했으나, 적군과 싸워 패하여 전사하니 그 아들 고종후*가 그를 대신하여 군사를 거느렸으며 군대 이름을 복수군이라 했다.

 

☞ 고종후 : 조선시대의 의병장. 선조10년(1577)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현령을 지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 고경명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는데, 금산 싸움에서 아버지와 아우 인후가 전사하자 그 시신을 받들고 돌아와서 장사지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이라 일컫고는, 여러 곳에서 싸우다가 위급해진 진주성에 들어가서 성을 지켰다.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 최경회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최경회는 후에 경상우병사가 되어 진주에서 전사했다. 또 경상도에 살던 사람으로는 현풍 사람 곽재우*, 고령 사람 전좌랑 김면*, 합천 사람 전 장령 정인홍*, 예안 사람 전 한림 김해*, 교서관 정자 유종개*, 초계 사람 이대기*, 군위 교생 장사진 등이 있다.

 

☞ 곽재우 : 조선시대의 의병장. 선조18년(1585) 정시문과에 합격했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문구 때문에 파방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 의령에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각지에서 적군과 싸워 연전연승했는데, 붉은 옷을 입고 싸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홍의장군’ 이라고 불렀다. 선조30년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승진,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켰다. 이때 열읍의 성이 모두 무너지자, 체찰사 이원익이 성을 혼자 지키는 그의 어려움을 걱정했더니 그가 보고하기를 ‘제나라 성 일흔 개가 다 무너져도 즉묵성이 홀로 보전되었으며, 당군 백만 명을 안시성에서 능히 대적했는데, 지금 비록 열읍의 성이 다 무너졌다 해서 이 화왕산성을 지킬 수 없다 하겠습니까’ 하고 끝까지 지켜냈다. 전쟁이 끝난 후 여러 번 벼슬이 내려졌으나 일체 사절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 김면 : 조선시대의 의병장. 유일로 천거되어 공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조종도 · 곽준 등과 함께 거창 ·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거창 우척령에서 적병과 맞아 싸워 그 예봉을 꺾었다. 그 공으로 합천 군수에 임명되고 의병대장이란 칭호를 받았다. 선조26년에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죽었다.

 

☞ 정인홍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6년(1573) 학행으로 천거되어 육품직을 받고 선조8년(1575)에 황간 현감에 임명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김면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성주에 침입한 적군을 물리쳤고, 영남의병장이란 칭호를 받았다. 북인이 대북 · 소북으로 분파되자 이산해 · 이이첨과 대북을 영도했는데, 광해군 때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인목대비를 폐출하자는 의론과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옥사에 관련된 죄로 인조반정 후에 참형을 당했다.

 

☞ 김해 : 조선시대의 의병장. 선조22년(1589) 증광문시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으나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영남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안동 · 의성 · 군위 등지에서 분전했다. 이듬해 평양 수복전에서 적군을 많이 죽이고 계속 뒤쫓아 남하하다 밀양에서 군사를 정비해 경주로 이동한 후 진중에서 병사했다.

 

☞ 유종개 : 조선시대의 의병장. 선조18년(1585)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 전적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혼자 의병 수백 명을 모집, 의병장이 되어 태백산을 근거지로 적병을 무찌르다가 소천에서 전사했다.

 

☞ 이대기 : 조선시대의 의병장.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초계에서 의병을 모집해 창의장 정인홍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장원서 별제가 되었고, 선조32년(1599)에 형조정랑에 이르렀다.

 

곽재우는 곽월의 아들이다. 자못 재략(才略)이 있었는데, 여러 번 적군과 싸워 이겨서 적군이 두려워했다. 사람들은 정암 나루를 굳게 지켜 적군을 의령 지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은 곽재우의 공이라 했다.

 

김면은 이미 세상을 떠난 무장 김세문의 아들이다. 적군을 거창 우척현에서 막아 여러 번 적군을 물리쳤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우병사로 승진되었으나 병으로 군중에서 죽었다.

 

유종개는 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되어 적군을 만나 전사했는데, 조정에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예조참의를 증직했다.

 

장사진은 전후(前後)에 적병을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적군은 그를 장 장군이라 부르면서 감히 군위 지경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느 날 적군이 복병을 배치하고 유인했는데, 장사진은 끝까지 추격하다가 복병 속에 빠졌으나 오히려 크게 외치며 힘껏 싸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적병이 장사진의 한쪽 팔을 쳐서 잘라버렸는데도, 장사진은 남은 한쪽 팔로 분전하여 멈추지 않았으나 마침내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군 절도사를 증직했다. 또 충청도에 살던 사람으로는 중 영규*, 전 제독관 조헌*, 전 청주 목사 김홍민*, 서얼 이산겸, 사인 박춘무*, 충주 사람 조덕공, 내금위 조웅, 청주 사람 이봉* 등이 있다.

 

☞ 영규 : 조선시대의 승병장. 휴정대사의 고제, 선장으로 무예를 익혔는데, 그 재능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5백 명을 규합해 의병장 조헌과 함께 이해 8월에 청주를 수복하고 이어 금산에 이르러 적군과 격전하다가 조헌 등 칠백의사와 함께 전사했다.

 

☞ : 조헌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22년(1567)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좌랑, 통진 현감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에 대한 강경정책을 세우도록 주장해왔는데,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장 영규와 합세하여 금산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칠백의사와 함께 순국했다. 이른바 금산칠백의사총이란 바로 그들의 무덤이다.

 

☞ 김홍민 : 조선시대의 의병장. 선조2년(1569)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낭관 · 사인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충보군이라 일컫고, 상주와의 경계를 막아 끊어서 충청도에 적군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 박춘무 : 조선시대의 의병장.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창의사가 되어 조헌과 함께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후에 인천 부사를 지냈다.

 

☞ 이봉 : 조선시대의 의병장.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조헌 · 정경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험준한 요지에 진을 치고 적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서 각 요지에 배치하여 적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 공으로 당상관에 승진되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규는 용력이 있고 전투에 능하여 조헌과 함께 청주를 수복했으나, 후에 적군에게 패전하여 모두 죽었다.

 

조웅은 가장 용감하여 능히 말 위에서 서서 달리기도 했으며, 적군을 자못 많이 죽였으나 전사했다.

 

또 경기도에 살던 사람으로는 전 사간 우성전*, 전 정랑 정숙하, 수원 사람 최흘, 고양 사람 진사 이로와 이산휘, 전 목사 남언경*, 유학 김탁, 전 정랑 유대진*, 충의위 이일, 서얼 홍계남*, 사인 왕옥 등이 있다. 홍계남이 가장 사납고 용맹스러웠다. 이 밖의 사람들은 각자 자기 향리에서 백여 명이나 수십여 명씩 사람들을 모아서, 의병이라 이름을 붙인 사람이 수효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으며, 모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시일만 보냈을 뿐이다. 또 중 유정*은 금강산 표훈사에 있었는데, 적군이 금강산으로 들어오자 절에 있던 중들이 모두 달아났으나 유정은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적병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으며 혹은 두 손바닥을 마주 합치며 경의를 표하고 돌아갔다.

 

☞ 우성전 :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의병장. 선조 원년(1568)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응교 · 사인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추의군이라 일컫고, 도처에서 적군과 싸워 공을 세우고서 대사성에 특진되었다. 그 후 계속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부평에서 병사했다.

 

☞ 남언경 : 조선시대의 학자로서 명종21년(1566)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기평 현감으로 기용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여주 목사로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듬해 공조참의를 역임했다.

 

☞ 유대진 : 조선시대의 문신. 좌의정 유홍의 아들이다. 선조16년(1583)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 이조참의를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웠다.

 

☞ 홍계남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켰고, 용력이 뛰어나서 이르는 곳마다 적병이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전사한 후 적병들이 그 시신을 가져가자, 홍계남이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가서 적병을 쳐 죽이고 시신을 빼앗아 돌아왔다. 전공(戰功)으로 경기 조방장이 되었다.

 

☞ 유정 : 조선시대의 승병장으로 호는 사명당, 유정은 법명이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13세에 《맹자(孟子)》를 읽다가 책을 덮고 탄식하기를 “속학은 천루하고 세연은 번요하니 어찌 무루의 학문을 배우는 것만 같으리오” 하고는 곧바로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신묵화상에게 귀의하였다. 명종16년(1561) 승과에 급제했고, 선조8년(1575)에 선종인 봉은사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서 휴정(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 팔공산 · 태백산 등의 명승지에서 수도하다가 선조23년(1590)에 다시 금강산에 들어갔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해 휴정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계사년(1593) 휴정의 뒤를 이어 승군도총섭이 되어 명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평양을 수복했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의령에서 적군을 쳐부수었다. 이 전공으로 당상관 위계를 받았으며, 선조27년 명나라 총병 유정과 의논하고 적장 가등청정의 진중을 세 번이나 찾아가서 화의담판을 하는 동안 적군의 정세를 탐지했다. 선조31년(1598) 명장 유정과 함께 순천에서 적병과 싸워 공을 세웠으며, 선조35년 동지중추부사에 승진되었다. 선조37년(1604)에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건너가서 막부의 장군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을 만나 강화를 맺고, 우리나라의 포로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가의대부의 위계에 승진되었다. 후에 해인사에 있다가 그 곳에서 입적했다.

 

내가 안주에 있을 때 사방에 공문을 보내 각기 군사를 일으켜 국난을 구원하러 나오라 했는데, 이 공문이 금강산에 이르자 유정이 이것을 불탁(佛卓) 위에 펴놓고 여러 중들을 불러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승군(僧軍)을 일으켜 서쪽으로 달려와서, 국사에 충성을 바치고자 평양에 이르니, 군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평양성 동쪽에 주둔하여 순안 군사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또 종실 오성감(이주)이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임금 계신 곳으로 달려가자, 조정에서 그의 관질을 승진시켜 호성도정으로 삼았으며, 순안에 주둔하여 대군(大軍)과 세력을 합치도록 했다.

 

또 북도에 있는 사람으로는 평사 정문부*와 훈융첨사 고경민이 공로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 정문부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1년(1588)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북평사가 되었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회령의 아전 국경인이 배반하여 적군에게 항복하자, 그는 산중에 숨어 있다가 관민이 함께 추대하는 의병대장이 되어 경성을 수복하고, 회령에 진격하여 국경인의 숙부 세필을 죽이고 반란을 평정했다. 전란이 끝난 후 그의 공을 진달하는 사람이 없어서 논공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며, 인조2년(1624)에 정문부가 지은 시구를 적출하여 죄안을 만든 사람이 있어 옥중에서 죽었다.

 

이일을 순변사로 삼고, 이빈을 불러 행재소로 돌아오게 했다. 이일이 처음에 대동강 여울을 지키다가 평양이 이미 함락되자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서 황해도로 들어가, 안악을 거쳐 해주로 갔다가 또 해주에서 강원도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따라 군사 수백 명을 모집했다. 이때 적군이 평양에 들어가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으며, 명나라 군사가 곧 이른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 동북 10여 리에 있는 임원평에 진을 치고서, 의병장 고충경 등과 함께 세력을 연합하여 자못 많은 적병을 베어 죽였다.

 

그런데 이빈이 순안에 있으면서 진격할 때마다 번번이 패전하자, 무군사의 종관들이 모두 이일로 이빈을 대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수 김명원만은 홀로 이빈을 그대로 두자고 주장하여 무군사와 의론이 맞지 않아 서로 다툴 기색이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나에게 순안 군중으로 가서 그것을 진정, 화해시키도록 했다. 조금 후에 조정 의론이 모두 이일이 이빈보다 낫다고 하고, 또 명나라 군사가 장차 나온다는 말을 듣고서는 이빈이 그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마침내 이일이 이빈을 대신하게 하고 박명현*이 이일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했으며, 이빈은 행재소로 돌아왔다.

 

☞ 박명현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29년(1596)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홍주를 위협할 때, 목사 홍가신의 휘하에서 무장 임득의와 함께 홍주성을 지켰으며, 반적을 청양까지 추격하여 섬멸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는 충청도 방어사가 되어 적군을 맞아 분전했다. 청난공신 이등에 책정되었고, 연창군에 봉해졌다.

 

적군의 간첩 김순량을 사로잡았다. 내가 안주에서 군관 성남을 시켜 전령을 가지고 수군장 김억추에게 가서 적군을 공격할 일을 비밀리에 약속하도록 했는데 그때가 12월 초이틀이었다. 내가 경계하기를 “6일 안으로 전령을 돌려보내도록 하여라” 라고 했는데 기일이 지나도 돌려보내지 않아서, 이에 성남에게 힐문하니 그는 “벌써 강서 군인 김순량을 시켜 돌려드리도록 했습니다” 하였다. 나는 김순량을 잡아와서 전령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일부러 전혀 모른다는 시늉을 하면서 이리저리 말을 꾸며댔다. 성남이 말하기를 “김순량이 전령을 가지고 나간 지 며칠 뒤에 군중으로 돌아왔는데, 소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제 무리들과 함께 잡아먹기에 사람들이 이 소를 어디서 끌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김순량은 ‘내 소인데 친족 집에 맡겨둔 것을 도로 찾아온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종적이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제야 김순량을 매질하여 엄중하게 국문하도록 했더니 이에 사실대로 고백하기를 “소인은 적군의 간첩 노릇을 했습니다. 그날 성남에게 전령과 비밀 공문을 받아서, 바로 평양으로 들어가 적에게 보였더니, 적의 장수가 전령은 책상 위에 두고, 비밀 공문은 보고 나자 곧바로 찢어 없애고서, 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으며, 같이 간첩이 된 서한룡에게는 명주 다섯 필을 상으로 주었는데, 다시 다른 비밀을 탐지하여 15일 안으로 보고하기를 약속하고 나왔습니다” 하였다.

 

내가 “간첩 노릇 한 사람이 너 한 사람뿐인가, 또는 몇 명이나 더 있는가” 하고 물었더니, 김순량은 “대개 40여 명이나 되는데, 매양 순안, 강서 등 여러 진(陣)에 흩어져 있으며, 숙천, 안주, 의주에 이르기까지 뚫고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고, 일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크게 놀라서 곧 임금께 장계를 올렸다. 그리고 이름을 조사해서 급히 여러 진에 통지하여 잡도록 했는데 혹은 잡기도 하고 혹은 놓쳐버리기도 했다. 김순량은 성 밖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명나라 군사가 나왔을 때 적군은 알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 간첩의 무리가 놀라서 흩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우연한 기회로 이루어진 일이나 또한 하늘의 도움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