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징비록 - 8회 - 평양 탈환.|

백삼/이한백 2014. 1. 7. 09:55

2월, 명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병부우시랑 송응창*을 경략으로 임명하고, 병부원외랑 유황상과 병부주사 원황*에게 군무(軍務)를 맡게 하여 요동에 머무르게 하고, 제독 이여송을 대장으로 삼아 삼영장인 이여백*, 장세작, 양원과 남방 장수 낙상지*, 오유충, 왕필적 등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는데, 군사의 수효가 4만이 넘었다.

 

☞ 송응창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산동 순무로 있을 때 왜적을 방비할 국방정책을 조정에 진언했는데, 얼마 안 가서 그 말이 적중하자 조정에서 그의 선견(先見)에 탄복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병부우시랑으로서 경략이 되어 조선에 와서 제독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개성까지 수복했다. 이때 병부상서 석성이 세객 심유경의 봉공의 설을 혹신하고 철병하기를 의론할 적에, 송응창은 군사를 남겨서 지키자고 요청했으나 석성이 듣지 않아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병을 핑계로 사직하기를 청했다. 후에 평양을 수복한 공으로 우도어사로 가직되었다.

 

☞ 원황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병부주사로서 임진왜란 때 명군의 군무를 찬획했다.

 

☞ 이여백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이여송의 아우이다. 아버지 이성량을 따라 북방에 나가서 전공을 세워 귀주총병관과 우도독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형 이여송과 함께 우리나라에 구원 나온 삼영장의 한 사람이다.

 

☞ 낙상지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구원 나온 중국 남방의 장수. 용감하게 잘 싸웠으며, 우리나라에 대한 원조에 가장 적극적인 장수였다.

 

이보다 앞서 심유경이 이미 가버린 후에 왜적은 군사를 거두고 움직이지 않았는데, 50일이 지나도 심유경이 오지 않자 왜적도 이를 의심하여 “정월에는 압록강에서 말을 물 먹일 것이다” 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적의 군중에서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도 모두 적병이 성을 공격할 기구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있다고 하여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했다.

 

12월 초에 심유경이 또 와서 다시 평양성 안으로 들어가 며칠 동안 머무르면서 재차 서로 약속을 하고 갔으나 그 내용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이때에 명나라 군대가 안주에 이르러 성 남쪽에 진영을 치니, 깃발과 병기가 정돈되고 엄숙함이 마치 신병(神兵)과도 같았다.

 

내가 제독(이여송)과 만나 일을 의논하자고 청했더니 제독이 동헌에 앉아서 들어오도록 하여 만나보니 풍채가 뛰어난 장부였다. 의자에 마주 앉자 나는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놓고 그 지방의 지세와 군사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켜 보였는데, 제독은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왜병들이 믿는 것은 다만 조총뿐인데, 우리는 대포를 쓰고 있으니 대포는 모두 5,6리를 날아갑니다. 왜적들이 어찌 당해내겠습니까?” 라고 했다. 내가 물러나오자 제독은 부채 앞면에 시를 써서 나에게 보내왔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 도와 강을 건너니, 삼한(三韓=조선) 나라가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이네.
명주(明主=명나라 황제)께서 날마다 첩보 오기를 기다리시니 미신(이여송의 자칭)은 밤에도 술잔 즐기기를 중지하였네.
봄철의 북두성 기운에 마음은 더욱 장한데, 이로부터 왜적들은 뼈가 벌써 저리겠구나.
담소하는 것이 어찌 승산 아니라 말하겠는가?
꿈속에서도 항시 말 타고 싸움터 달리고 있음을 생각한다네.

 

이때 안주성 안에는 명나라 군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백상루에 있었는데, 밤중에 명나라 사람이 갑자기 군중의 비밀 약속 세 조목을 가지고 와서 보이기에, 그 성명을 물었으나 대답 없이 그대로 가버렸다.

 

제독이 부총병 사대수*에게 먼저 순안으로 가서 왜적을 속여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했다.

 

“명나라 조정에서 이미 화친하기를 허락했으며, 유격장군 심유경 또한 올 것이다.”

 

그러자 왜적은 기뻐했으며, 현소가 시를 지어 올렸다.

 

부상(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으로 일본을 지칭)에서 전쟁을 그치고 중화(중국)를 복종시켰으니,
사해와 구주가 한 집안이 되었네.
좋은 기운이 환우(세계)의 눈을 녹였으니, 건곤에 봄이 일찍 와서 태평을 노래하네.

 

이때가 계사년(선조26년, 1593) 봄 정월 초하루였다. 왜적은 그들의 소장 평호관*에게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순안으로 나와서 심유경을 맞이하게 했다. 사 총병(사대수)은 이들을 유인하여 같이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복병이 나와서 닥치는 대로 쳐서 평호관을 사로잡고 따라온 왜병을 거의 다 베어 죽였는데, 세 사람이 빠져 달아났으므로 적의 군중에서는 그제야 명나라 군대가 온 걸 알고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 평호관 : 소서행장의 부하로 죽내길병위(다케우치 기치베)라고 한다.

 

이때 명나라 대군이 벌써 숙천에 이르렀는데, 날이 저물어 진영을 치고 밥을 짓던 중에 보고가 도착했다. 제독이 활줄을 당겨 화살을 쏘아 시위 소리를 내면서 진격 신호를 하고, 곧 기병 몇 명을 거느리고 순안을 향해 달려 나가자 여러 진영의 군사들이 뒤따라 출발했다.

 

이튿날 아침에 나아가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과 칠성문을 치자, 적병은 성 위에 올라 붉은 깃발과 흰 깃발을 세우고 막아 싸웠다. 명나라 군사는 대포와 화전(火箭)으로 이를 공격했는데, 대포 소리는 땅을 진동시켜 수십 리 사이의 크고 작은 산들이 모두 요동했고, 화전은 공중에서 베 짜는 올처럼 펼쳐져서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화살이 성안으로 떨어져 곳곳에서 불이 일어나 수목이 모두 타버렸다.

 

낙상지 · 오유충 등은 자기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개미처럼 성에 붙어 올랐는데, 앞선 군사가 떨어지면 뒤따르는 군사가 또 올라 물러나는 군사가 없었다. 적병의 칼과 창이 고슴도치 털처럼 성가퀴에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는 더욱 힘차게 싸웠기 때문에 적병은 능히 지탱하지 못하고 내성(內城)으로 물러났는데, 칼날에 베이고 불에 타서 죽은 군사가 매우 많았다.

 

명나라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가 내성을 공격했다. 적병은 성 위에 토벽을 쌓고 구멍을 많이 뚫었는데, 바라보니 마치 벌집 같았으며 구멍 틈으로 총탄을 함부로 쏘아서 명나라 군사가 많이 상했다. 제독은 궁지에 빠진 적병이 죽을힘을 다 내지 않을까 염려하여, 군사를 거두어 성 밖으로 나가서 적군이 달아날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적군은 그날 밤에 얼음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서 도주했다.

 

이보다 앞서 내가 연주에 있을 때, 명나라 대군이 장차 나온다는 말을 듣고는 황해도 방어사인 이시언*, 김경로*에게 비밀리에 통지하여 적군이 돌아가는 길을 요격하도록 하고 이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그대들 양군이 길가에 복병하고 있다가 적군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 그 뒤를 추격하면, 적군은 굶주리고 피곤한 채로 도망쳐 가니 싸울 생각도 못할 것이므로 빠짐없이 잡힐 것이다” 했더니, 이시언은 곧 중화군으로 갔으나 김경로는 딴 일을 핑계 삼아 사피했다.

 

☞ 이시언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22년(1589) 이산해의 천거로 무관직에 등용되었고, 선조25년에 상호군이 되었다. 같은 해 임진왜란 중에 황해도 우방어사에 이어 충청 병사로서 경주 수복전에 공을 세우고 가선대부에 승진되었다. 선조29년(1596) 이몽학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선조38년(1605)에 함경도 순변사가 되었다. 인조 원년(1623)에 순변부원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 반란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는 혐의로 인조가 공주로 피란하기 전 기자헌 등이 처형될 때 그 일파로 몰려 함께 처형되었다.

 

☞ 김경로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전주 방어를 맡았는데, 적군에게 포위된 남원의 우리 군사를 구원하려고 진군하던 중 전라 병사 이복남을 만나 결사대 1백 명을 이끌고 남원성에 들어가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이복남 등과 함께 전사했다.

 

내가 군관 강덕관을 보내서 다시 독촉했더니 김경로는 마지못해 중화군으로 왔으나, 적군이 물러가기 하루 전날에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의 관문에 의하여 그만 재령으로 달아났다. 이때 유영경은 해주에 있으면서 김경로가 자기를 호위해주기를 바랐고, 김경로는 적군과 싸우기를 꺼려서 피해간 것이다.

 

☞ 유영경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5년(1572) 춘당대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등 요직을 지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는 초유어사가 되어 많은 사병을 모집했고, 이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선조35년(1602)에 이조판서에서 우의정으로 승진되었고, 선조37년(1604)에는 호성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북인이 소북, 대북으로 분파되자 유영경은 소북의 영수로서 정승에 있는 7년동안 소북당을 많이 등용시켰다.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을 광해군 대신 세자로 책정하고자 했으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당의 탄핵을 받아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이어 사사되었다.

 

적의 장수 평행장 · 평의지 · 현소 · 평조신 등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 새워 달아나는데, 기운은 빠지고 발은 부르터 절룩거리고 가면서 밭고랑 사이에 배를 대고 기어가기도 하고 입을 가리키면서 밥을 빌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도 나와서 이들을 치는 이가 없었고 명나라 군사도 추격하지 않았는데, 홀로 이시언만이 그 뒤를 쫓았으나 감히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다만 굶주리고 병들어 뒤떨어진 적병 60여 명만 베어 죽였을 뿐이다.

 

이때 왜적의 장수로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은 평수가*뿐인데, 평수가는 관백(평수길)의 조카라고도 하고 혹은 사위라고도 했다. 나이가 어려서 군무를 주관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무의 주관은 평행장에게 있었고 가등청정은 함경도에 있어 돌아오지 않았다. 만약 평행장 · 평의지 · 현소 등이 사로잡혔더라면 서울에 있는 적군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며, 서울의 적군이 무너졌더라면 가등청정은 돌아갈 길이 끊어지고 군사들은 마음이 어수선하고 두려워져서 반드시 바닷길을 따라 도주해 갔을 터이나 그리 쉽게 빠져 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 평수가 : 우회다수가를 말한다. 우가다직가의 아들로 평수길의 양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적군의 원수로서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훗날 정유재란 때는 적군의 감군으로서 남원성 공격전에 참가했다.

 

이렇게 한강 이남에 있는 적진은 차례로 와해될테니, 명나라 군사는 북을 울리고 천천히 행진하여 바로 부산에 이르러서 술을 흠씬 마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잠시 동안에 우리의 모든 강산이 숙청(肅淸)되었을 것이니, 어찌 그 후로 몇 해 동안의 시끄러움이 남아 있었겠는가. 한 사람(김경로)의 잘못으로 일이 천하의 평화에 관계되었으니 진실로 통분하고 애석한 일이다.

 

나는 임금께 장계를 올려 김경로를 사형에 처하도록 요청했는데, 이때 나는 평안도 체찰사로 있어서 김경로는 내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임금께 이 일을 주청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선전관 이순일을 보내 표신(궁중에 급변을 전할 때 궁궐 문을 드나드는 증표)을 가지고 개성부에 이르러 김경로를 목베려고 했는데, 먼저 제독(이여송)에게 알리니 제독은 말하기를 “그죄는 마땅히 죽일 것이지만, 아직까지 적군이 섬멸되지 않았으므로 한 무사라도 죽이기는 아까우니, 잠정적으로 군직이 없이 종군하도록 하여 그가 공을 세워 죄를 속하게 함이 옳을 것이오” 하면서 자문을 만들어 이순일에게 주어 보냈다.

 

이일의 순변사 직책을 갈고 다시 이빈이 이를 대신하도록 했다. 평양 싸움에 명나라 군사는 보통문으로 들어가고, 이일과 김응서 등은 함구문으로 들어갔다. 군사를 거두어 모두 물러 나와서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차에, 밤중에 적군은 도망쳐 가버렸으나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제독은 우리 군사가 경비하여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적군이 도망쳐 가도 몰랐다고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이에 명나라 장수 중에서 전에 순안을 왕래하면서 이빈과 서로 친한 사람이 이일을 논란하여 말하기를 “이일은 장수가 될 만한 재간이 없으니 이빈이 좋습니다” 라고 하여, 제독이 자문을 보내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왔다. 조정에서는 좌상 윤두수를 보내 평양에서 이일의 죄를 심문하고 군법을 시행하려 했으나 조금 후에 이일을 석방하고, 다시 이빈으로 이일을 대체하여 기병 3천 명을 뽑아 제독을 따라 남쪽으로 가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