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중종 33년(1538)에 건립된 뒤 480년간 한자리를 지킨 조선 명종(1534∼1567)의 태실이 보물이 됐다.
태실(胎室)은 조선왕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에 봉안한 뒤 조성한 시설을 뜻한다. 조선 태실 유적 중에는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이 사적 제444호로 지정됐지만, 보물은 없었다.
문화재청은 충남유형문화재인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76호로 지정했다고 26일 밝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종대왕 태실이 충남 서산 동면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건립 당시 태를 넣은 태실과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大君椿齡阿只氏胎室碑) 1기가 세워졌다.
이어 명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546년 '주상전하태실비'(主上殿下胎室碑) 1기가 만들어졌고, 1711년 같은 이름의 비석 1기가 추가로 제작되면서 태실 1기와 비석 3기가 완성됐다.
태실은 팔각형 난간석에 둘러싸여 있다. 머릿돌은 팔각형이고, 받침돌은 사각형이며, 그사이에 둥그런 돌이 있다.
태항아리와 망자의 인적 사항을 적은 지석(誌石)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께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졌으나,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됐고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태실 표석의 전형적인 특징을 따라 제작됐다. 비석 받침인 '비좌'와 비문을 새긴 '비신', 비신 위에 올리는 옥개석인 '이수'로 구성됐다.
1546년 세워진 주상전하태실비는 비신이 대리석이고, 비좌는 거북과 용을 새긴 돌이어서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비신에 있는 글씨가 훼손돼 1711년 주상전하태실비를 재건했다. 당시에 본래 비신과 이수는 옆으로 옮겨 설치하고, 새로운 비신과 이수를 옛 비좌 위에 올렸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명종대왕 태실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고, 주변 환경도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며 "조선왕실이 태를 태실에 봉안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역사적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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