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김옥균

백삼/이한백 2013. 12. 3. 09:36

    

▲대전시 동구 이사동에 위치한 김옥균 선생의 생가지(왼쪽)와 이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무려 200m 가까이 떨어져 있어 혼동을 주고 있다.대전 동구 이사동에 있는 김옥균 선생의 생가지와 이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무려 200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어 무용지물이라는 주장이 일고 있다.

25일 대전시에 따르면 지난 2007년 비지정문화재의 위치표시와 관련한 민원 등으로 인해 김옥균과 송병선 선생 생가지에 대한 표지석을 각각 설치했다.

당시 송시열 선생의 9대손인 연재 송병선의 생가지는 동구 성남동의 신협빌딩 근처로 협의를 통해 제자리에 설치됐지만, 현재 개인 소유의 집이 위치한 김옥균 생가지는 집주인의 반대로 인해 이사동 버스정류장 옆에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표지석이 생가지와 200미터 가까이 떨어진, 이사동 버스승강장 옆에 설치되면서 혼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 표지석에는 ‘고균 김옥균 생가지’라는 한글과 함께 한자로 ‘信爲道根原’(신위도근원·믿음이 도의 근원이다)’고 적혀있을 뿐, 실제 생가지에 대한 아무런 표식이 없어 위치 확인이 불가능하다.

심지어 동네 주민도 알지 못하는 생가지 표지석에, 일각에서는 ‘행정력 낭비’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한 주민은 “몇 년 전부터 버스정류장 옆에 김옥균 선생 생가지라고 적혀있는 표지석이 서있더라”며 “주변에 생가지라고 생각되는 곳이 없는데 표지석만 덜렁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 외지사람이 와서 ‘생가지가 정확히 어디냐’고 물어봐도 시원스레 답변해주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대전시 관광문화재과 관계자는 “표지석을 이미 제작한 상황에서 집주인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생가지와 떨어진 곳에 설치하게 됐다”며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으로, 억지로 개인 소유 토지에 (표지석을)세울 수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조선말 정치가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1851-1894) 선생은 외갓집이 있던 대전 동구 이사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옥균.

조국을 향한 마음만은 어느 충신 못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신위도근원(믿음은 도의 근원이다)

信爲道元 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  斷除疑網出愛流  開示涅槃無上道

신위도원 공덕모 장양일체제선법 단제의망출애류 개시열반무상도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며 일체의 좋은 일들을 길러낸다. 의혹의 그물을 끊어 버리고 애착의 물결에서 벗어나게 하며 열반이라는 최상의 길을 열어 보인다.......

 화엄경 十信 법문에 해당되는 게송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얼바나 중요한 것인가르르 잘 표현하였다. 불교에서 믿음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인용된다. 사람들이 음식을 섭취할 때도 그 음식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먹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도 서로 간에 믿음이 있어야 됨은 두말 할필요가 없다.

김옥균 오언율시 

 

   野人重農事 시골사람 농사를 중하게 여겨

晨起開柴扉 새벽에 일어나 사립문 연다.

     宿霧半峰出 밤안개는 산허리에 피어오르고

        殘星雙鵲飛 지는 별빛에 까치들이 날아가네.

      禾麻方郁郁 벼와 삼대 바야흐로 무성해지고

    婦子遠依依 아내 아들 멀리서 희미하더라.

    鉏動田間草 밭에서 풀 뽑으며 김을 매는데

   阜螽跳滿衣 메뚜기들이 옷에 가득 뛰누나.

1884년, 청은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됐다.

이에 조선에 주둔해 있던 병력 3천 명 가운데 절반을 베트남으로 이동시키게 됐는데, 청군이 연전연패하는 것을 본 김옥균은 이것이 정변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개화독립당에게 군사지원을 약속한 것도, 김옥균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12월, 조선은 최초의 우편행정관서인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열었다.

하지만 이 날은, 우정국 준공 축하연이 있었던 날보다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일로 기억되고 있다.

 

개화독립당은 자신들의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해 윤태준, 한규직, 민태호, 민영목 등 민씨 가문의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우정총국 건물.

이 곳에서, 갑신정변이 시작됐다.

갑신정변 이후 우정총국은 폐지됐고, 1895년에 우체사가 설치될 때까지의 10년 동안은

다시 역참에 의한 통신방법이 계속됐다.

 

 

 

이튿날, 김옥균은 새 내각의 호조참판을 맡아 국가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개혁 정강을 발표했다.

 

모두 14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개혁안은 청과의 전통적 관계 단절, 국왕의 권한 축소와 내각의 권한 강화, 조세제도 개혁, 문벌제도와 신분제도 폐지 등을 담고 있었다.

 

고종은 이 개혁안을 인정하고, 개혁을 추진한다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14개조 개혁 정강.

청에 조공하는 것을 그만둘 것, 문벌제도를 폐지할 것, 조세제도를 개혁할 것, 내시부를 없앨 것,

탐관오리의 처벌, 환곡 폐지, 규장각 폐지, 경찰제도 실시, 보부상 조직인 혜상공국 폐지,

유배되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재검토, 근위대 설치, 재정 개혁, 입헌군주제 추구, 내각제도 수립 등

14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갑신정변으로 세워진 내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14개조 개혁 정강이 발표된 그 날, 청군이 궁궐로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조선군이 청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는 것을 본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일본군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고, 이것으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갑신정변은 이렇듯 일본에 의존한 탓에 실패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가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김옥균은 동료인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일본 공사 다케조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 이후 다시 정권을 잡은 민씨 가문은 개화독립당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에게 이들을 체포해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망명한 정치범을 송환하는 법은 없다며 조선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그렇다고 김옥균을 호의적으로 대한 것도 아니다.

 

1886년에 오가사와라 섬으로 강제 추방하고 2년 뒤에는 홋카이도의 삿포로에 연금, 1890년에야 도쿄에 귀환하는 것을 허가한 것이다.

 

일본에 의해 10년 동안 연금생활과 방랑생활을 하게 된 김옥균은, 일본에게 크게 실망하게 된다.

 

 

1894년, 김옥균은 청의 유력한 정치인인 이홍장과 만나기 위해 상하이로 향했다.

하지만 김옥균이 이홍장을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는, 김옥균 본인에게 물어봐도 답을 구할 수 없다.

 

이홍장의 아들을 안다며 김옥균에게 접근한, 민씨 가문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1894년 3월 28일, 향년 44세였다.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목이 잘리고, 머리는 저잣거리에 내걸린 뒤 실종됐다.

 

김옥균이 만나고자 했던 이홍장.

이홍장은 당시 청의 실질적인 황제인 서태후의 신임을 받는 신하로, 양무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일본에게 크게 실망한 김옥균은 청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던 듯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두번째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은 김옥균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김옥균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태도를 바꾸게 된다.

 

언론매체 등을 통해 김옥균의 암살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한편 대대적으로 장례식을 거행, 조선과 청을 응징하자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로, 일본 정부는 전 일본인들의 지지 속에 청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김옥균이 암살된 이듬해인 1895년,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게 된다.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은 고종에게 김옥균을 용서하자는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 김옥균은 반역 죄인이라는 이름을 벗게 된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김옥균을 역사상으로 크게 조명받지 못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김옥균을 한국 근대화의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갑신정변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 폐지, 인민평등 등의 근대 사상이 나타나 있으며, 이것은 낡은 조선의 왕정에 새로운 해답을 주려는 의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글의 서문에서도 언급했지만,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동시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동시대인의 일부는 그들을 조선의 최고 수재들이라고 평가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역적이라고 비난했다.

오늘날에는 갑신정변을 일본에 의지하고 민중을 외면한 탓에 실패했다고도 하고, 조선을 근대화하려는 운동으로 의의가 높다고도 한다.

 

이렇게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앞으로도 많은 의견이 오고갈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지 않을까.

김옥균 등은, 조선을 근대화하려는. 조선을 발전시키려는 마음으로

군주를 생포한다는 '큰 일' 을 단행했다는 것.

 

비록 실패한 운동이었지만, 비록 역적으로 몰렸지만

그들이 조선을 일본이나 서양 국가들과 같은 근대 국가로 만들어보려 했다는 것만은

인정해도 좋지 않을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다.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고 해도, 그 일을 시작한 애초의 동기는 선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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