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역사, 소식

설화

백삼/이한백 2013. 11. 28. 10:26

❀배은망덕 한 쥐

초강리 사랑방 옛날이야기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느 집에나 쥐가 많았다.

초강리 어느 살만한 집에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있었다.

착한 며느리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면 으레 쥐 한마리가 나와서 찌꺼기를 주워 먹곤 했다.

마음씨 착한 며느리는 때때로 쥐가 먹으라고 일부러 밥찌꺼기를 놓아두곤 했다.

그 쥐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착한 며느리는 정이 들어 더 잘 돌봐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부엌에 나와 보니 얼굴도 음성도 몸매도 며느리를 꼭 같이 닮은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이 집에 며느리라고 했다. 깜짝 놀라서 “어머님”하고 불렀더니 그 여자도 동시에 “어머님” 하고 외쳤다.

시어머니가 나와서 보고, 시누이와 남편. 시아버지까지 나와서 두 며느리를 살펴보았으나, 너무나 똑 같아서 어느 며느리가 진짜이며, 어느 며느리가 가짜인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깜짝 놀라 야단들이었다.

며느리들은 서로 “제가 이 집의 진짜 며느리입니다”라고 하며 우겨대니 더욱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가족들은 두 며느리를 방에 불러들여 여러 가지로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시아버지 가슴에 사마귀가 있는 것이며, 신랑 허벅지에 흉터가 있는 것이며, 하나도 틀리지 않고 알아맞히고. 두 며느리들의 웃는 모습이며 말소리까지 똑 같아서.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해보았지만 누가 진짜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살강(찬장)에 있는 숟갈이 몇 개냐고 물었다. 그것도 둘이 다 맞히었다. 다시 접시가 몇 개냐고 물었다.

진짜 며느리는 마침 접시의 개수를 잊어서 틀렸다,

쥐가 둔갑을 한 며느리는 찬을 몰래 훔쳐 먹으면서 세어 두었기 때문에 척척 알아맞히었다. 그래서 쥐가 둔갑한 가짜 며느리를 진짜며느리로 판정하여 집에 두고,

진짜 며느리는 가짜로 판정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집을 쫓겨난 진짜 며느리는 울면서 정처 없이 길을 가고 있었다.

얼마쯤 가다가 대사님을 만났다.

대사님은 인근 절에 있는 도가 높은 스님이었다.

그래서 대사님에게 사실대로 모두 얘기를 했다.

대사님은 “아무 걱정 마십시요”하고 안심을 시킨 후에

“큰 고양이 한 마리를 잡아다 방안에 넣으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대사님이 시키는 대로 고양이를 구해서 안고 방에 들어갔다. 고양이를 놓아주니 고양이는 잽싸게 가짜며느리를 할퀴었다. 가짜며느리는 금방 쥐가 되어 숨다가 고양이 한 발길에 움켜잡히고 말았다. 쥐는 비명을 지르다가 숨을 거두고 한참 후에 조용해졌다.

 

가족들이 어쩐 영문인가 싶어 방문을 열었다,

가짜 며느리는 죽어서 쥐가 되어 고양이 발밑에 깔려 있었다.

가족들이 이 꼴을 보고 가짜 며느리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신랑은 크게 사과하고,

쫓겨났던 진짜 며느리를 맞이하여 화기애애하게 잘 잘 살았다.

 

 

❀ 품일장군과 화랑관창의 얼이 숨 쉬는 품관사(品官寺)

영동읍 부용리 전설

 

향교(鄕校) 뒷산은 금성산(錦城山) 부용산(芙蓉山) 품관산(品官山)이라는 세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산 아래에 금성사(錦城寺)라고 하는 절이 있다. 그 절의 옛 이름은 품관사(品官寺)라고 한다.

품관사가 된 전설이 전해온다.

서력660년은 신라 태종무열왕7년이다.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하여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와 합세하여 백제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신라는 대장군에 김유신, 부장군에 품일, 흠춘으로 하여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만들어 백제의 계백장군과 대결전(大決戰)을 벌리려고 황산벌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김유신장군은 보은으로, 흠훈장군은 금산으로, 품일장군은 영동을 지나 진군하였다.

그 때에 품일장군은 아들 화랑 관창을 데리고 진군하는 도중에 금성산 아래 낙화대(落花臺) 뒤 중강곡(中江谷)에 있는 암자(庵子)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품일장군은 아들 화랑관창에게 거듭 교훈하기를

 

“화랑의 정신은 충효인바 몸을 나라에 바치는 것이 곧 효도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황산벌에 도달하여 보니 황산벌의 싸움은 신라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패전의 연속이었고 신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 품일장군은 아들 관창을 불러놓고

“내 아들은 나이가 비록 16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다. 너는 오늘의 전투에서 능히 3군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관창은

“예”

하고 대답을 하고 갑옷을 떨쳐입고 창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쏜살 같이 백제군의 진지로 돌진했다. 그러나 백제군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백제 대장군의 계백장군은 끌려온 포로 관창의 갑옷을 벗겨보니 홍안의 미소년인지라 차마 죽일 수가 없어 살려서 돌려보내고는

“신라군에 저런 용감한 장수가 있으니 신라군의 사기를 알만하구나.....”하고 탄식을 했다

관창은 돌아와서 아버지께 말하기를

“소자! 적진으로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적장을 베지 못 하였습니다.”

하고는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달려 들어가서 용감히 싸우다가 다시 사로 잡혔다.

이에 계백장군은 관창의 목을 베어서 말에 매달아 신라군에 돌려보냈다.

품일장군은 아들의 머리를 안고 흐르는 피에 몸을 적시면서

“나의 아들아! 훌륭하다, 능히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구나”

라고 말하자

신라군은 감격하여 결사의 각오를 굳게 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여 백제군을 무찌르고 대승전(大勝戰)을 거두었다.

 

이렇게 대승은 거두었으나. 아들을 잃은 품일장군의 마음은 아팠다. 신라로 돌아 가는길에 영동 낙화대 뒤 중강곡 암자에 들렸다. 옆에는 아들이 있지 않았다.

품일장군은 슬픈마음에 아들 화랑 관창의 명복을 빌려고 불사를 베풀었다. 그래서 절을 짓고 품관사(品官寺)라고 이름 하였다. 또한 산 이름도 자연스럽게 품관산(品官山)이라고 했다, 곧 지금의 금성산(錦城山)이다.

 

금성사(錦城寺)

오랜 세월이 흐르고 임진왜란 때에 왜군의 방화로 절이 불에 타 없어졌다.

그 후에 광산김씨가 영동현감으로 부임해 온 첫날밤에 노승(老僧)이 현몽(現夢)하여

“이 몸이 낙화대 뒤 중강곡의 지하에 매몰되어 있어 답답하니 거처 할 곳을 마련해 주시면 보은(報恩)하겠습니다.”

하므로 이방을 불러 파게하니 4척 땅속에서 좌상(坐像) 석불(石佛)이 있어 발굴하였다,

현감은 단방 불당(佛堂)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정성을 다했더니 50세에 득남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신도가 늘어나고 번창했는데 그 후 불상은 없어지고 좌대만 남았었는데,

불상을 신봉하던 신자들이 그 자리를 그냥 둘 수 없다고 박남파 스님과 협력하여 절을 짓고 금성사라 하였다.

이후 보허스님, 침허스님, 화상스님이 주지를 하였고 옛 이름을 찾아 품관사라고 했었으나 지금은 금성사(錦城寺)이다.

경내에 약수가 있어 가뭄에도 수량이 줄지 않고 홍수에도 넘치지 않고 물맛이 좋아 영동읍민이 애용한다.

(영동향토지 지명편)

 

 

❀당곡리의 신당

영동읍 당곡리 12장신당 전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당곡리에 있는 12장신당(十二將神堂)은 영동읍 동남쪽으로 삼봉산을 향해 약6km 계곡 따라 올라가 당곡마을을 지나 삼봉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맞배지붕의 신당(神堂)과 별각(別閣)이 있는데, 신당에는 관운장(關雲長), 장익덕(張翼德), 제갈공명(諸葛孔明), 조자룡(趙子龍), 황충(黃忠), 강유(姜維), 마초(馬超), 마직(馬謖), 요화(廖化), 창위(菖偉), 미축(미竺), 위연(魏延) 등 12명의 장수들의 화상이 봉안되어 있고. 별각에는 적토마(赤兎馬)의 화상(畵像)이 안치되어 있다.

 

신당은 원래 상촌면 고자리 산중에 있었는데 약 500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 연유(緣由)는 어느 날 밤 영동군수의 꿈에 관운장(關雲長)이 나타나 “내가 지금 있는 자리가 편하지 못하니 저산너머 고곡리의 깨끗한 곳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하여서 신당을 이곳으로 옮기고 마을이름도 당곡리(堂谷里)로 바꿨다고 한다.

 

이 신당(神堂)은 “12장신당“외에 관우사당(關羽祠堂) 또는 관왕묘(關王廟)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제사는 이 신당과 샛터와 삼봉동 3곳의 제당(祭堂; 山祭堂,수구막이祭堂)에서 함께 매년 정월 열나흘 날 밤에 제사를 올렸다.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고 병(病)과 재해(災害)와 악귀(惡鬼)를 쫓는 의미를 담아 관성제군(關聖帝君)에게 올리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관왕묘 신앙과 한국의 마을공동체 신앙인 동제가 결합된 형태이다. 현재 12장 신제(十二將神祭)는 1964년에 마을회의를 거쳐 다른 동제(洞祭)와 함께 지내지 않는다.

 

이 신당(神堂)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傳說)이 전한다.

선조대왕(宣祖大王) 25년 봄, 왕이 잠이 들었는데 위풍당당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들고 삼각수(三角鬚)를 날리며 늠름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 전쟁이 날것을 예고하고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명나라에 파병을 청(請)하라고 알려주고 갔다고 한다. 이에 선조대왕은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에게 구원(救援)을 청했다. 황제는 는 이여송(李如松)을 총수(總帥)로 한 5만의 군사를 보냈으며,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義兵)과 명장 이순신(李舜臣)의 활약(活躍)으로 전쟁을 끝냈다. 전란(戰亂) 이후 관운장(關雲長)의 현몽(現夢)을 고맙게 생각(生覺)하여 관제묘(關帝廟(東廟)를 서울 숭인동에 세웠다. 그 후 우리나라 각 고을에 관왕묘가 건립되고 민간신앙(民間信仰)의 대상으로 신봉(信奉)하였다.

영동에서도 이때부터 관운장의 신당을 세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외 신당(神堂) 앞에 말이 지나지 못한다는 이야기와 가뭄이 들면 병속에 물을 넣고 솔가지로 막은 뒤 이 신당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전(傳)해진다.

 

당곡 마을 사람들의 전설이 또 있다.

선조대왕의 꿈에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나타난 관운장이 말하기를

“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요? 나는 중국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들의 의리와 우애를 잊지는 않았겠지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맹서요.

우리 3형제는 살아서는 생(生)과 사(死)를 함께하여 의리(義理)가 변치 않았고, 죽은 후에 영혼들도 도원결의 의리를 지켜 왔는데 지금에 와서는 유비형님은 명나라에 황제가 되었고 동생 장비는 조선의 왕이 되었소. 관우 나는 살생이 많아서 아직 환생하지 못한 것이랍니다.

머지않아 조선에 큰 병난이 일어날텐데 아무 방비도 없이 보내서야 되겠는가요. 이 난리는 바다건너 왜적이 쳐들어오는 난리인데 7.8년이 걸릴 것이요. 주저하지 말고 명나라 황제 형님에게 도원결의 고사를 들어서 구원병을 요청하시요. “

선조대왕이 잠을 깨어보니 정신이 아찔하였다.

관운장의 현몽(現夢)한대로, 선조 25년에 왜병이 쳐들어 왔고, 우리의 군사만으로 막을 수가 없어,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명나라는 이여송을 파병하였고, 우리의 의병과 이순신의 활약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그 때로 부터 관제묘(관운장을 숭상하는 사당)가 서울에 세워지고 각 고을에도 세워졌다.

영동의 12신장신당도 이때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한다.

(영동향토지 지명편)

 

“어머니”하고 부르면 젖을 주지요

학산면 서산리 옛날이야기

 

옛날 옛적에 학산면 서산리에 마음착한 며느리가 시부모를 모시고 성실한 남편과 아기를 낳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젖먹이 아들은 할머니가 보게 하고, 남편과 열심히 들일을 하다가 점심때가 되어 며느리는 식구들 점심과 아기에게 불은 젖을 먹이려고 집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얼마를 가다가 길가 나무 밑에 선비차림의 사람이 누워있었다, 그냥 무심히 지나가다가 어쩐지 이상해서 돌아보니 무언가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여 들으니 모기소리 만 하게

“배가 고파 죽겠으니 먹을 것을 좀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진 음식은 없고. 집에 갔다 오려면, 선비의 상태가 너무 급하고... 그때 부인에게 언뜻 생각나는 것이 아기에게 줄 한나절 불은 젖이었다.

“이 불은 젖을 주면 죽는 것은 면하겠지...”

젖을 줄려고 하였으나... 그러나 외간남자에게 살을 대이는 것이어서 남의 부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가버리자니 사람이 죽을 것 같고... 조금 망설이다가

“여보세요, 먹을 것은 없고. 아기에게 줄 불은 젖이 있는데, 남녀가 유별하니 그저 줄 수도 없고 큰일입니다, 그런데요, 나에게 “어머니!” 하고 불러주면 젖을 줄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리 남녀가 유별하다해도 어머니가 자식에게 젖을 주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자 그 선비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때서야 부인은 가슴을 풀고 퉁퉁 불은 젖을 물려주니 그 선비는 그 젖을 빨아먹고 나서, 겨우 기운을 차려가지고

“아이구, 죽을 목숨 구해주어서 감사합니다.”

하고는 그 집에 따라가 밥을 얻어먹고 기운이 회복되자, 서울로 가서 과거시험을 보아 장원급제를 하여 큰 벼슬을 했는데, 죽을 때까지 그 부인을 어머니로 부르고 양아들 노릇을 했다고 한다,

(영동향토지 지명편)

 

나는 죽어도 남들은 살아야

학산면 서산리 옛날이야기

 

옛날 옛적 학산면 서산리에 어느 어머니가 아들 하나를 두고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옛날이야기를 잘 해주었다,

그 중에 쌍두사 이야기도 있었다.

“뱀중에 대가리가 두개 달린 쌍두사(雙頭蛇)라는 뱀이 있는데. 이 쌍두사를 본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 너는 외아들이니 뱀이 있는 데는 가지도 말고 뱀이 있다면 피하며 살아라”라고 해주었다.

그래서 그 아들은 뱀이라면 극히 꺼려하고 피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머니 심부름을 갖다 오다가 길가에서 대가리 두개달린 뱀을 보았다.

잘못 보았나 하고 다시 보아도 분명 대가리가 두개 달렸다.

“아이구! 대가리 두개달린 뱀을 보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 쌍두사를 내가 보았으니 나는 이제 죽는구나.”

죽을 생각을 하니 겁이 나서 길바닥에 앉아 엉엉 울었다. 울다가 생각하니

“나는 이왕에 뱀을 봐서 죽지만 다른 애들이 본다면 다른 애들도 죽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죽더라도 다른 애들을 위해서 저 뱀을 죽여야겠다.”

마음을 굳게 먹고 큰 돌을 찾아들고, 그 뱀을 찾아서 죽였다, 그리고 땅을 깊이 판 다음 뱀을 묻어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였다.

그렇게 하고 엉엉 울면서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누구하고 싸웠니? 왜 울고 들어와..”

“어머니 이제 저는 죽어요.

“무슨 소리냐? 죽는다니?”

“저 오다가 쌍두사를 보았어요, 쌍두사를 보면 죽는다고 했으니까 저는 이제 죽어요”

그 말을 듣고

“아니 그래 정말이냐?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며 어머니도 울고 아들도 울고 야단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우리 아들이 쌍두사를 보았답니다. 이제 우리 아들이 죽는데, 어떡해야 하나요?”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바깥에 못나오게 해야겠다”하며

모두 돌아가려 할 때 그 아들이 말을 했다,

“제가요! 그 쌍두사를 보고 나는 죽지만, 다른 애들이 보면 또 죽을 테니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쌍두사를 죽여서 땅에 깊이 묻어서 다시는 보이지 않을 거예요”

라고 하니 참 훌륭한 일을 했다 하고 칭찬과 걱정을 같이 해주었다.

그날 저녁에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붇들고 울다가 잠이 들었는데 하얀 산신령이 나타나

“너의 애는 안 죽으니 안심해라. 자신은 죽어도 남을 위해 그 뱀을 죽여 묻었으니 그 공덕으로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사라졌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아들은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아들은 죽지 않고 일어났다,

“아가 산신령님이 네가 남을 위한 공덕으로 죽지 않는다고 했다”

“저도 같은 꿈을 꾸었어요”

아들과 어머니는 또 기뻐서 붙들고 울었다.

이 두 사람이 서산리에서 오래오래 살다가 엊그제 죽었다고 해서 조문하고 왔다고 하더라.

(영동향토지 지명편)

 

 

운이 따르는 소금장수

용산면 부상리 옛날이야기

 

옛날 옛적에 부상리에 큰 부자가 살았다.

부자에게는 귀하게 여기는 보물이 있었는데 그 보물이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서

“나의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돈 300냥을 주겠노라”하고 방을 써서 붙였다. 그 방을 보고 전국에서 점을 친다하는 점쟁이는 다 모여 들었다. 그러나 한 달이 넘어도 못 찾고. 점쟁이들도 거의 떠났을 때에, 소금장수 한사람이 그 집에 찾아들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하고 주인에게 물으니

“우리 집에 보물을 잃어버렸는데 찾지 못해서 그러오” 하였다.

소금장수는

“도둑 잡는데 점치는 것으로 됩니까?” 하니

부자는 “그럼 댁이 찾을 수 있단 말이요?” 하였다.

소금장수는 한참 생각을 했으나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지나가는 말로

“그거야 본 놈(見者)이 가져갔을 것이니, 본 놈을 족치면 나올 것이요.”라고

한마디 했다. 그랬더니 주인은 갑자기

“아- 그놈이야! 본이란 놈 잡아와라.”하고는 본이를 잡아다가 형틀에 매고 매를 치니 참다못한 본이가 실토를 하고 보물을 내 놓았다. 본이는 그 집 종이었던 것이다.

그 길로 본이는 실컷 두들겨 맞고 내 쫓기고

소금장수는 300냥을 받아 횡재를 하였다.

내어 쫓긴 본이는 올데 갈데 없는 딱한 몸으로 길가에 누워서 생각해보니 소금장수가 원수였다. 이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작정을 하고 길목을 지키고 소금장수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렇게 귀신같이 잘 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시험을 해봐야 했다.

마침 발 앞에서 개구리 한마리가 뛰었다,

옳지 하고 개구리를 잡아서 한손에 쥐고 한손에는 큰 몽둥이를 들고 서서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소금장사가 왔다. ‘본’이가 쑥 나서면서

“여보시요!”하고 불러 세우니 소금장수는 ‘본’이를 알아보고 놀라서 얼굴이 하얘졌다.

소금장수는 300냥뿐만이 아니고 목숨까지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본’이가 말했다.

“당신은 나한테 죽을 목숨이다, 이 주먹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맞혀 봐라?”

소금장사가 얼떨결에 말했다.

“개구리가 본이란 놈 손에 죽는구나.”

개구리는 소금장수의 아명으로 ‘본이 손에 내가 죽는 구나’하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본이가 귀신같이 잘 맞히는데 너무 놀라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당신은 귀신이요, 사람이요, 용서해 주십시요” 라고 한다.

소금장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본이의 손에 개구리가 쥐어 있는 것을 보고 호통을 친다.

“이 놈! 썩 물러가 착하게 살아라. 나는 계룡산에서 20년 도 닦은 금강도사니라”

하고 큰소리를 치니 ‘본’이는 그만 얼이 빠져서 도망을 가고. 소금장사는 고향에 돌아가 논, 밭 사서 잘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영동향토지 지명편)

 

범을 물리친 담뱃대

천마니 옛날 옛적이야기

 

이리구불 저리구불 이리 저리 구비치고 갈지자가 몇 개인가.? 천마니 고개는 길기도 하고 높기도 하다.

주태백(酒太白)이 이야기야.

옛날 옛적에 술이라면 먹고는 가도 지고는 못가는 주태백이가

호랑이 한테서 살아난 이야기야.

그날도 술에 떡이 되어서 고개를 오르다가 길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자다가 보니까 술이 좀 깨긴 깼는데 머리가 축축 한 거야.

이게 웬일인가? 하고 살짝 눈을 떠보니 호랑이가 슬슬 다가오는 거야.

이제 죽었구나하고 누워 있는데 호랑이가 꼬리에 물을 묻혀 와서 머리에 추기고는 코에 대고 술 냄새를 맡아 보 는 거야.

아하 호랑이는 영물(靈物)이라 사람이 술이 취했을 때는 먹지 않다가, 술이 깨면 잡아먹는다고 하더니, 지금 나를 잡아먹으려는 거야. 하늘이 노란했다.

호랑이는 또 꼬리에 물을 묻혀가지고 와서는 물을 뿌렸다. 그리고 주태백의 코에 대고 킁킁 술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 산중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고 큰일 났다. 저놈한테 잡혀 먹히기 전에 살아날 방도가 없을까?, 정신을 차려야 산다, 그래 정신을 차리자.

주태백이 한테는 담뱃대가 있었다, 그래 이제쯤 호랑이 식사 때가 되어 가는데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그래 구멍을 찾자, 담뱃대로 콧구멍에 찔러야 호랑이가 나를 못 먹지

자는 척 하고 있었다. 호랑이가 물을 뿌리고 냄새를 맡았다.

담뱃대 끝이 호랑이 콧구멍에 닿았다.

있는 힘을 다해서 설대가 부러져라 하고 밀어 꽂았다.

담뱃대가 호랑이 코구멍으로 해서 목구멍에 박혀 버린거야.

호랑이는 산이 떠나가게 으르렁 거리고 날뛰다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주태백은 무사히 산을 내려왔고...

얼마 후에 나무를 갔다가 그 호랑이를 만났어.

빼빼 말라 있었어. 먹을 수가 없어 굶은 거야.

그래 그렇지. 한편 불쌍하기도 하데.

(영동향토지 지명편)

 

 

마당바우 도깨비

설계리 옛날이야기

 

영동읍 구교동에서 서낭댕이 고개를 넘으면, 설계리가 내려다보이고, 중간 길가에 마당(場)바우가 있다.

서낭댕이 고개 마당(장)바우에는 도깨비 잘 만나기로 유명한 고개였다.

도깨비불이 나타나거나 사람 닮은 도깨비를 만나 애를 먹은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였다.

하루는 설계리 사람이 읍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서낭댕이를 넘었다.

아무 일없이 넘나보다 했는데 마당바우 옆을 지날 때였다,

이마에 불을 단 도깨비가 앞을 딱 가로막는 것이었다,

담력이 세었던 그 사람은 일순간 술이 확 깼다.

‘옳지 요놈이 나하고 씨름을 하자는 것이구나‘ 하고

소매를 걷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와락 덤벼들었다.

또깨비도 와락 달려들어 허리끈을 잡았다,

술취한 사람과 도깨비가 씨름을 하게 된 것이다.

담력이 세고 기운이 장사인 설계리 사람도, 도깨비도 서로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넘어갈듯 하다가도 일어나고 또 엉키고, 둘은 한참동안을 그렇게 겨루다가 설계리 사람이 온 힘을 다하여 도깨비를 쓰러뜨렸다.

도깨비가 쿵하고 넘어지자 잽싸게 옆에 있던 새끼줄로 꽁꽁 묶어서 도망가지 못하게

마당바우에 묶어 놓고 내려 왔다.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집에 돌아와서 정신없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설계리 이웃 사람들과 묶어놓은 도깨비 구경을 하려고 여럿이 마당바우에 올라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도깨비는 없고 쓰다버린 몽당 빗자루만 새끼줄에 묶여 마당바우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영동향토지 지명편)

 

 

한일(一)한글자 명필

초강리 사랑방 이야기

 

초강리 큰부자집에서 열두폭 병풍을 만들어 놓고 좋은 병풍을 만들겠다고

명필을 구하였다.

이곳 저곳에서 글씨를 쓴다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이 사람이 쓴 글씨를 저 사람에게 보이면 못 마땅해 하고

저 사람이 쓴 글씨를 이 사람에게 보이면 못 마땅해 하고

누가 명필인지 가늠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서울 사람이 초강에를 내려 왔다.

이 사람은 서울 종로에서 건달이나 하던 사람으로 말이라면 번지르르 하지만

글자는 한일(一)자 한자 밖에 아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명필은 고사하고 글씨를 쓸 것이 없었다.

그것을 모르는 주인은 서울 명필의 글씨를 얻으려고 융숭한 대접에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서울 건달은 말만으로 하루하루를 때워 나갔다.

“길을 많이 걸어서 며칠 노독을 풀어야 겠오”

 

그럭저럭 한 이레가 지나갔다

“먹을 갈아야 하는데 ....”

주인은 머슴을 불러 먹을 갈도록 하였다.

“붓은 제일 큰 것으로 구해 주시오”

주인은 청주 전주를 다니면서 그 중에 제일 큰 붓을 구해왔다.

먹물은 큰 동이에 하나 가득 준비가 되었고

붓은 싸리 빗자루 만 한 큰 것이 준비 되었다.

 

그럭저럭 서너 달이 지나갔다

서울 사람은 더는 핑계를 댈 수도 없고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병풍을 펴시요”

열두 폭 병풍을 한꺼번에 쫙 펴놓고

특대 필에 먹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잔뜩 묻혔다.

주인은 걱정이 되었으나 명필이 잘 쓰겠지 하고 보고 있는데

서울 명필이 드디어 병풍에 붓을 대고,

쫙---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병풍 끝까지 단 한 번에 한일자를 썼다.

그러다가

마지막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문지방에 걸려 밖으로 꼬구라졌다.

마루를 지나 뜨락 끝 돌에 머리를 부딛혀 죽고 말았다.

 

주인은 망연자실하고 열두 폭 병풍을 창고에 버려두라고 했다.

 

몇년이 지나 서울에서 온 양사언인지 한석봉인지 명필(名筆)이 지나 가다가

부자집 창고에서 서기(瑞氣)를 보고 부자를 찾아

“이집에 명품 글씨를 보여 주세요” 정중히 요청했다.

주인은 잊었던 사건을 떠올리고 병풍을 내어와 보여주니

“기이한 작품이도다. 목숨 하나를 바친 작품이로다”

하였다고 한다

 

갈수록 맹랑한 스님

 

재미 있는 얘기는 모두하시고 웃자고 하는 얘깁니다

 

옛날 옛적에 신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스님 한분이 있었다.

그 스님은 늘 말하기를 불경에 무불통지하고 이제는 생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술 고기며 여자를 가까이 해서는 않된다고 했다.

이 스님이 하루는 저자거리에 나왔다가 신도 한 사람을 만났다.

신도가 스님의 가사소매 속에서 병꼭지가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스님 소매에 병은 무슨 병입니까?”

“아 이것 말이요. 술병이지요.”

“호호 스님께서도 약주를 잡수십니까?”

“아-예 그 그런 게 아니라 고기가 좀 있길래 술은 약으로 먹는 것이지요.”

“그럼 고기도 잡수시는군요.”

“아 아니요. 어제 장인이 오셔서 대접을 하려는 것이지요.”

“스님께 장인이 계십니까.? 한번도 못 뵈었는데요”

“그럴거외다. 다른 때는 오시지 않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어제는 오실 일이 있었습니다. 큰마누라하고 작은마누라가 대판싸움을 했는데 애들도 못 말리고 해서 그걸 말리려고 오신겁니다.”

“아들 딸도 있었구먼요.?

“큰놈은 키가 장대하고. 둘째 놈은 재주가 좋고. 세째 놈은 인물이 잘나고....두몸에서....”

(영동향토지 지명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