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망사/설도

백삼/이한백 2016. 8. 11. 09:15

 

? 어이하리오~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들.....

 

春 望 詞 (춘망사)

 

-薛 濤 (설도)-

花 開 不 同 賞 (화개불동상)

花 落 不 同 悲 (화락불동비)

欲 問 相 思 處 (욕문상사처)

花 開 花 落 時 (화개화락시)

 

攬 草 結 同 心 (남초결동심)

將 以 遺 知 音 (장이유지음)

春 愁 正 斷 絶 (춘수정단절)

春 鳥 復 哀 吟 (춘조부애음)

風 花 日 將 老 (풍화일장로)

佳 期 猶 渺 渺 (가기유묘묘)

不 結 同 心 人 (불결동심인)

空 結 同 心 草 (공결동심초)

那 堪 花 滿 枝 (나감화만지)

飜 作 兩 相 思 (번작량상사)

玉 箸 垂 朝 鏡 (옥저수조경)

春 風 知 不 知 (춘풍지불지)

 

꽃 피어도 함께 바라볼 수 없고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네

그리운 그대는 어디에 계신지

꽃 피고 꽃이 지는 이 시절에

 

풀 뜯어 동심결로 매듭을 지어

님에게 보내려 마음 먹다가

그리워 타는 마음 끊으려 하는데

봄 새가 다시 와 애달피 우는구나

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아름다운 기약 아득히 먼데

한마음 그대와 맺지 못하고

헛되이 동심초만 맺고 있다네

 

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날리어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거울속 옥 같은 두 줄기 눈물

봄바람아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중국 당(唐)나라 덕종(德宗)때

글 잘쓰고 미색이 뛰어난 설도라는 기생 겸 여류시인이 있었다.

설도(薛濤)의 고향은 장안(長安)

이었으나. 하급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성도(成都)에 이주해 살았다. 어려서부터 능히 음률 시 서예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을 뿐 만

아니라 자색 또한 뛰어나 당대

보기 드믄 재녀였다.

부친이 사망하자 가세가 기울어 16세에 악적(樂籍 :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고급기녀)에 올랐다.

설도는 문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말재주도 뛰어났다.

그녀는 당시 사천 절도사 위천(韋泉,위고)이라는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설도를 공식적인 관명인 교서(校書)를 부여해 주었고,

후세에 기녀를 교서라 칭하게 된 유래다.

위천은 805년(설도 나이 약 35세)

에 사망했다. 설도는 위천 사망후 악적(樂籍)에서 나오게 된다.

원진은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고 그와 더불어 알기 쉬운 새 시풍을 개척했는데, 소동파는 이를 일러 원경백속(元輕白俗)이라고 평하였다. 원진은 권력 다툼에 중앙에서 밀려나 대략 809년 동천(東川, 혹은 통주(通州))에 좌천되었다.

809년 설도와 원진이 처음 만났다. 당시 원진은 동천으로 좌천되어 와 있었는데 설도의 문명(文名)을 듣고 방문하게 된 것이다. 설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설도는 시를 쓰기위해 직접 목부용(木芙蓉)을 원료로 양질의 종이를 발명하였는데 당대 풍류인

들에게 좋은 평을 받으며 설도전,

완화전이라는 이름을 얻고 당시대에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색종이에 원진과의 애뜻한 사랑의 시를 쓰며 서로 주고 받았는데

일종의 러브레터이다.

두 사람은 이별을 할때,

동그란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직하면서, 다시 만나

반쪽이 된 벼루를 동그랗게 만들

날을 기약하였다.

그러나 원진의 은사였던 위하경(韋夏卿)이 자신의 질녀(姪女)를 중매하게 된다. 은사의 질녀 위(韋)

씨녀는 원진을 사랑하여 그 벼루 반쪽을 강물에 던저버렸다.

 

설도는 악기(樂妓)였던 자신의 한계와, 원진보다 10년 정도 연상이

었고, 천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명문 출신도 아니었다, 설도의 나이 40세, 이미 청춘을 벗어나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아픔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40세나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정인을 만난 설도는 사랑은 찾았으나 영원히 마음을 엮을 수

있는 동심인(同心人)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원진을 사랑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설도는 만년에 두보가 살았던

성도의 서쪽 교외 완화계(浣花溪)

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살았는데

설도도 그 근처에 음시루(吟詩樓)라는 집을 짓고 살았으며

집에는 항상 창포와 대나무가

가득 했다고 한다.

지금도 성도의 망강공원 주위에는

그녀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녀의 시 91수가 전해진다.

 

 

가곡 동심초는 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려진

안서 김억이 번역하고

김성태선생이 작곡하여

동심초라는 가곡이 태어났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