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난중일기》 1597년 6월 14일

백삼/이한백 2013. 11. 19. 18:24

《난중일기》 1597년 6월 14일 ※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이희남이 들어와서 아산의 어머님의 영연과 위아래가 모두 다 무사하다고 하였으나 쓰리고 그리운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아침 식후에 이희남은 편지를 가지고 우병사(김응서)에게로 갔다.

 

군관 이희남이 김응서에게 보낼 편지를 가지고 갔는데, 도착 인삼(백의종군 신고식)를 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순신 하옥사건의 발단은 ‘선조-김응서-요시라-고니시 간의 비밀교류’ 에서 비롯되었기에 김응서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순신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5일 ※
맑다. 이날은 보름인데 몸이 군중에 있으므로 어머니의 신위(神位)에 절을 하고 곡을 할 수 없으니 아픈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초계 군수가 떡을 마련하여 보내왔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군관을 보내어 전하기를 “원수가 산성으로 가려고 한다” 고 하였다. 나도 뒤를 따라 큰 냇가에까지 이르렀다가, 혹시 다른 의견이 있을까 염려되어 냇가에 앉은 채 정상명을 보내어 병이 나았다고 보고하게 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3년상 동안에는 초하루와 보름날 빈소에서 곡을 해야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아픈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라고 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6일 ※
맑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아무도 들여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들 열과 이원룡을 불러들여 책을 매어서 변씨(卞氏) 족보를 쓰게 하였다. 저녁에 이희남이 편지를 보냈는데 “병사가 보내주지 않는다” 고 하였다. 아들 열과 정상명이 큰 냇가에 가서 전마(戰馬)를 씻겨가지고 돌아왔다. 변광조가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김응서로부터 회신이 없었다. 전마(戰馬)가 있었는데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7일 ※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 식후에 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공(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것을 많이 말하고, 또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여주는데 “원균의 장계에 의하면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다고 말했으니, 안골포의 적을 먼저 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고…

 

원균이 비변사에 건의한 내용은 이순신이 지난 5년간 피력해 온 지론이다. 그런데 원균은 지난 5년 동안 이순신의 이 같은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신이 통제사가 되면 함대를 부산 쪽으로 끌고 가서 왜적을 섬멸하겠다고 주장해 왔다. 선조는 이 같은 주장에 현혹되어 이순신을 갈고 원균을 통제사에 제수했던 것이다.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원균의 장계 내용을 보자.

 

※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백 척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을 지나서 가덕도 뒤에 숨어 있게 하고 가볍고 빠른 배를 골라서 서너 척이나 네댓 척씩 절영도 밖으로 나가 무력시위를 하게 하는 한편 100여 척이나 200척이 큰 바다에서 무력시위를 하면, 가등은 본래 해전에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겁을 먹고 반드시 군대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수군으로 하여금 적을 바다 밖에서 맞아 침으로써 적들이 육지에 오르지 못하게 한다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지난날 수군을 맡아 바다를 지킨 일이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후 통제사가 된 원균은 조정에서 부산 진격을 독촉하자 ‘부산 진격을 위해서는 안골포 등지의 왜군을 먼저 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육군 쪽에서 왜군들을 바다로 몰아내 주어야 한다’ 는 건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철옹성에 진을 친 10만여 명의 왜군들을 공격하려면 그보다 몇 배의 병력이 필요한데 조선에는 그만한 병력이 없었다. 당시 조선 육군은 총 3만 명 규모였고 대부분이 산성과 산골 소로, 읍성 등지에 분산 주둔하고 있었다.

 

안골포와 인접한 곳에 있는 조선 육군은 김응서 경상우병마사의 병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수천 명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낙동강 하구에서부터 초계 지역까지를 수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병력으로 남해안에 있는 10만의 왜군을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응서는 그 대신 ‘선조-김응서-요시라-고니시 간의 비밀 대화창구’ 를 활용, “원균 통제사가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나아가 고니시와 손잡고 가토를 사로잡게 하자” 는 내용으로 선조를 설득하고 있었다.

 

선조는 여러 해 전부터 ‘선조-김응서-요시라-고니시 간의 비밀 대화창구’ 를 유지해 오면서 ‘원균으로의 통제사 교체’ 작업을 추진해 왔다. 선조가 추구하려고 했던 전략적 목표는 부산과 남해안 일대의 왜군들을 몰아내는 데 있었다.

 

선조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결국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했지만, 원균은 전날의 이순신처럼 “수군만으로 부산포 공격이 어렵다” 고 장계를 올렸고, 김응서는 “원균이 부산으로 나가면 고니시의 협력을 얻어 부산의 왜군들을 몰아낼 수 있다” 며 서로 엇갈린 주장들을 했다.

 

선조의 총애를 받아온 수륙의 장수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자 비변사와 도체찰사, 그리고 도원수부에서도 이 사안을 놓고 난감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원균의 장계를 받은 비변사는 권율에게 의견을 물어왔던 것이다.

 

또 원수의 (비변사의 공문에 답하는)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직 안골포를 먼저 쳐야 한다고만 말하며, 수군 여러 장수들은 많이들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뿐더러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하다” 는 것이었다.

 

권율은 비변사의 공문에 답하는 장계를 보여주면서 이순신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원수에게 건의하여 이희남과 변존서, 윤선각 등에게 모두 공문으로 독촉해서 오게 하자고 하였다. 올 때 황 종사관을 보고 1시간이나 의논하고 머무르고 있는 집으로 돌아와 희남의 종을 의령산성으로 보내고 청도에는 파발로 공문을 보냈다.

 

권율이 의견을 물었는데 이순신이 어떻게 답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수발을 들고 있는 군관들까지 관아와 산성 등지로 보내면서 군병을 모으라고 건의했음을 보면 현실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8일 ※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황종사관(황여일)이 종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명나라 사람 섭성이 초계에서 와서 이야기하고, 또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언룡이 일찍이 일본에 사로잡혀 갔다가 이번에 나왔는데 적병 10만이 벌써 사자마(쓰시마)나 대마도에 왔을 것이오. 행장(고니시)은 의령을 거쳐 곧장 전라도를 칠 것이오. 또 청정(가토)은 경주 · 대구 등지로 진을 옮기고 그대로 안동으로 가려고 하오” 라고 하였다. 저물어 원수가 사천에 갈 일이 있다고 알려왔기에 곧 정사복을 보내어 물었더니, 원수가 수군의 일 때문에 사천으로 간다고 하였다.

 

고니시 군은 전라도로, 가토 군은 대구→안동으로 북상한다는 정보다. 하지만 왜군들의 이 같은 진격은 원균의 조선 함대를 먼저 분쇄한 후에야 진행될 계획이었다.

 

아무튼 이 무렵, 왜군들은 이순신을 실각시켰던 것처럼 원균 함대분쇄를 위한 2차 반간계를 진행하고 있던 때였고, 원균을 부산 쪽으로 유인해 내기 위한 온갖 시도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9일 ※
새벽닭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진에 이르니 원수와 황종사관이 나와 앉아 있었다. 원수가 내게 원균의 일을 말하기를 “통제사(원균)의 일은 그 흉측함을 다 말할 수가 없다. 안골포와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심보인가. 질질 끌면서 나가지 않으려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천으로 가서 독촉하겠다” 는 것이었다. 또 위에서 내려온 밀지(密旨)를 보니 ‘안골포의 적은 경솔히 들어가 칠 것이 못 된다’ 고 하였다.

 

권율의 부름을 받고 꼭두새벽에 권율을 만났다. 권율은 원균이 올린 장계를 놓고 사천으로 가서 따지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또 임금의 밀지도 보여 주었는데 안골포의 적을 치지 말고 곧바로 부산을 치라는 것인지, 아니면 추후 출병하는 명군과 합세해서 안골폴를 친 후 부산을 치라는 것인지 그 내용이 확실치가 않았다.

 

후에 조정이 선전관을 보내어 원균의 부산 출동을 어명으로 독촉하면서 명확해졌지만, 조정에서는 그 중요한 작전명령서 하나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0일 ※
비. 하루 종일 비가 왔다. 늦은 아침에 (어릴 적 친구들인) 서철, 윤감, 문익신, 문보, 변유 등이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오후에 노마료(종과 말 등의 유지비)를 받아왔다. 병든 말이 차츰 좋아지고 있었다.

 

종과 말의 급료가 나왔다. 이순신에게도 역시 소정의 급료가 나왔을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1일 ※
비가 오다 개었다 하였다. 영덕 현령 배진경이 원수를 만나러 왔다가 원수가 사천으로 가고 없자 나를 찾아와서 좌도(左道)의 사정을 많이 전해 주었다. 황 종사관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을 하였다. 저녁에 변존서, 윤선각이 와서 밤새 이야기하였다. 작은 월라말이 먹지를 않는다. 더위를 먹었나보다.

 

영덕 현령으로부터 전하는 말만 들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조언했다. 변존서, 윤선각은 인척이자 직속 군관들이다. 이들과 모병관계를 논의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2일 ※
개었다 비가 오다 하였다. 아침에 초계 군수가 연포국(무, 두부, 다시마, 고기 등을 넣고 끓인 맑은 국)을 끓여가지고 와서 권하기는 했으나 오만한 기색이 많았다. 그의 하는 짓이 말할 수 없이 무례하엿다.

 

늦게 이희남이 들어와서 우병사(右兵使)의 편지를 전하였다. 낮에 정순신, 정사겸, 윤감, 문익신, 문보 등이 찾아왔고 이어서 이선손도 찾아 왔다.

 

이순신은 상주가 된 후 고기를 일절 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계 군수가 연포국을 권하면서 예의를 어긴 말을 한 것 같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3일 ※
아침에 불화살을 다시 다듬었다. 늦게 우병사가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크고 작은 환도(環刀)를 보내왔다. 그러나 가지고 온 사람이 물에 빠뜨려 장식과 칼집을 망가뜨렸으니 유감스럽다. 나굉의 아들 재흥이 자기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왔다. 또 어려운 살림에 노자(路資)까지 보내주어 미안, 미안하다. 이방이 찾아왔다. 방은 아산 이몽서의 둘째 아들이다.

 

백의종군 중에도 화전(火箭)을 제작하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4일 ※
새벽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였다. 오늘은 입추(立秋)날이다. 아침에 수사 권언경의 종 세공과 감손이 와서 무밭에 관한 일을 아뢰었다. 무밭을 갈고 씨 뿌리는 일을 감독할 관원으로 이원룡, 이희남, 정상면, 문임수 등을 정해 보냈다. 생원 안극가가 와서 보고 세상일을 이야기하였다. 합천 군수가 조언형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날씨가 지독하게 더워서 찌는 듯하였다.

 

군관들을 무밭 둔전관으로 보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7일 ※
맑다. 다시 명령하여 무씨를 뿌리게 하였다. 황 종사관이 와서 군사(軍事)를 의논하였다. 저녁에 종 한경이 한산에서 돌아왔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이 왜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다” 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적 한 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어버리니 통탄함을 어찌 다 말하랴. 원수가 오늘 내일 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일방적으로 당한 싸움이었던 것 같다. 이 무렵 왜군들은 패를 나누어 사냥개가 곰을 번갈아가며 공격하듯 작은 단위로 번갈아 공격하는 해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조선 함대는 왜선보다 속력이 느렸기에 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로부터 20일 후, 원균 함대가 부산포 앞바다로 나갔다가 되돌아올 때, 왜군 함대는 하루 종일 ‘사냥개들의 곰몰이 작전’ 을 구사했고 이에 지친 원균 함대가 칠천량에 정박해 있던 새벽에 대대적인 야간기습을 해왔다.

 

‘원수가 오늘 내일 진으로 돌아올 것’ 이라고 하였는데, 권율은 6월 19일 사천포로 갔다가 이날 초계진으로 돌아왔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6일 ※
맑다. 중군장 이덕필과 변홍달, 심준 등이 찾아왔다. 아산의 종 평세가 들어와서 어머님의 영연이 평안하시고, 여러 집안 상하가 모두 무고하다고 하였다. 다만 석 달이나 날이 가물어 농사가 결딴나서 가망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장삿날은 7월 27일로 하려다가 미루어 8월 4일로 택했다고 하였다. 지극한 그리움과 슬픔을 어찌 다 말하랴.

 

어머니의 장례일이 8월 4일로 연기되었다. 장례일 하루 전날 이순신은 통제사에 복직된다.

 

※ 《난중일기》 ※
경상우병사(김응서)가 체찰사에게 ‘아산의 이방, 청주의 이희남이 복병하기 싫어서 원수(권율)의 진영 곁으로 피해 있다’ 고 보고한 일 때문에, 체찰사가 원수에게 공문을 보내왔다. 원수는 크게 노하여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병사 김응서의 속뜻을 알지 못하겠다. 이날 작은 월라말이 죽어서 내다 버렸다.

 

이희남과 이방은 도원수, 전라감사, 전라병사 등의 합의하에 이순신의 군관으로 배속된 이순신의 ‘친한 군관’ 들이다. 그런데 김응서는 이들 군관들이 ‘복병(요새지 근무)하기 싫어서 원수의 진영으로 피해 있다’ 며 이원익 체찰사에게 고발했다.

 

이순신은 ‘아산의 이방’, ‘청주의 이희남’ 이라고 적어 놓았다. 두 군관이 충청도 출신이므로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관할이 아니라는 점도 기록해 둔 것이다. 때문에 ‘김응서의 속뜻을 알 수 없다’ 고 했다.

 

이순신의 시각에서는 김응서가 왜 자기 관내의 일도 아닌데 나섰는지, 또 문제를 제기하려면 경상감사나 권율에게 할 일이지 왜 우의정을 겸한 이원익 체찰사에게 곧바로 고발해서 권율을 노하게 했는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선조-김응서-요시라-고니시의 비밀 대화통로’ 가 통제사 교체의 창구로 활용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으로서는 김응서의 이 같은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게 비춰졌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7일 ※
맑다. 노응린, 박진삼이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이희남, 이방이 체찰사의 행차가 이르는 곳으로 갔다.

 

김응서의 고발에 따라 이희남과 이방은 자신들의 직분을 해임하기 위해 체찰사에게로 갔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8일 ※
맑다. 황해도 백천에 사는 별장 조신옥과 홍대방이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초계의 아전이 올린 보고서에서 ‘원수(권율)가 내일 남원으로 가신다’ 고 하였다. 이날 새벽 꿈자리가 매우 어지러웠다. 종 한경이 물건을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권율이 순찰과 독려를 위해 남원 지역으로 떠났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29일 ※
맑다. 이희남, 이방이 돌아왔다. 중군장(이덕필)이 심준과 함께 와서 전하기를 “심유격(심유경)이 붙잡혀 갔는데, 양 총병이 삼가로 와서 그를 결박해서 보내더라” 고 하였다.

 

이희남과 이방은 자신들의 역할을 해명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이원익은 이순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날 선조가 원균을 통제사로 삼으려고 했을 때 늘 반대편에 섰던 인물이다. 그런데 원균을 통제사로 결정하는 어전회의 때에는 지방출장 중이었기에 통제사 교체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정황을 살펴보면 이희남 등이 무사히 돌아온 이유는 쉽게 짐작할 만하다.

 

명나라 심유경이 강화회담의 실패로 탄핵을 받아 붙잡혀 갔다. 심유경이 붙잡혀 간 사건은, 이제 조 · 명 · 왜 간에는 전쟁 이외에 다른 수단은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30일 ※
맑다. 새벽에 정상명을 보내어 체찰사에게 안부를 묻게 하였다. 이날 몹시 더워서 찌는 듯하였다. 흥양의 신여량, 신제운 등이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연해안 지방에는 비가 알맞게 왔다고 한다.

 

이원익이 초계에 왔다. 권율은 이틀 전에 남원으로 떠났기 때문에 이원익과 권율은 만나지 못했다. 대신 이원익은 이순신을 만났다.

 

● 조선수군, 칠천량에서 수장되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1일 ※
새벽에 비가 오고 늦게 개었다. 명나라 사람 셋이 와서 부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송대립과 송득운이 함께 왔다. 송득운이 원수의 진영을 왕래했는데, 오는 길에 보니 황 종사관(황여일)이 큰 냇가에서 피리를 들으며 놀고 있더라고 하였다. 이날은 바로 인종대왕의 제삿날인데 참으로 놀랄 일이다.

 

권율은 남원 지역 순시를 위해 자리를 비웠고, 심유경 사건도 일단락되었기에 황 종사관은 모처럼만에 하루를 쉰 것 같다. 그런데 이순신은 인종대왕의 제삿날 황 종사관이 피리소리를 들으며 놀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당시 임금의 제삿날에는 관청에서도 긴급업무가 아닌 한 휴무를 했을 만큼 삼가는 날이었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
2일. 맑다. 늦게 신제운과 평해 사는 정인서가 종사관의 심부름으로 이곳에 문안하러 왔다. 오늘은 바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신날인데, 천리 밖에 와서 군문에 소속되어 있으니 이런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3일. 맑다.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사무쳐 비통한 마음이 더욱 극심해졌다. 제사에 쓸 조과(만든 과자, 유밀과, 과자 따위를 말함)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늦게 정읍의 군사 이량, 최언환, 건손 등 세 사람을 사환(심부름꾼)으로 쓰라고 보내왔다.

 

늦게 장준완이 남해로부터 와서 남해 현령(박대남)의 병이 위중하다고 전했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합천 군수 오운이 와서 산성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오후에 원수의 진영으로 가서 황 종사관(황여일)과 이야기하였다. 종사관은 전적 박안의와 활을 쏘았다. 그때 좌병사의 군관이 항복한 왜인 두 명을 압송해 왔는데, 청정의 부하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 돌아왔다. 고령 현감이 성주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다.

 

합천 군수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했다. 가토 기요마사 진영으로부터 투항해 온 왜군들을 문초하는 자리에도 참석해서 문초를 주도했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4일 ※
맑다. 황 종사관이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이방과 유황이 왔다. 자모군(지원병)들이 흥양 · 노량 등지에 도착했다.

 

백의종군의 몸으로 지원병 모집 현황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기록해 놓았다. 아무튼 이러한 현황 파악은 뒷날 큰 도움이 된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
5일. 비가 왔다. 이른 아침에 초계 군수가 체찰사의 종사관 남이공이 경내(境內)를 지나간다고 하면서 산성으로부터 와서 문 앞을 지나갔다. 늦게 변존서가 마흘방으로 갔다.

 

6일. 맑다. 변존서가 마흘방에서 돌아왔다. 안각 형제도 변흥백(변존서)을 따라서 왔다.

 

7일. 맑다. 오늘 칠석(七夕)을 맞으니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꿈에 원공(원균)과 만났다.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공이 기쁜 기색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박영남이 한산도로부터 왔는데 그 주장(원균)이 실책과 과오로 죄를 받기 위해 원수에게 붙들려갔다고 하였다. 초계 군수가 햇것들을 갖추어 보내왔다. 아침에 안각 형제가 찾아왔다. 저물어서 흥양의 박응사가 찾아오고, 심준 등도 왔다. 의령현감 김전이 고령으로부터 와서 병사의 처사에 전도된 것들이 많다고 하였다.

 

원균은 이날 그동안 권율의 명령을 무시하고 잘 따르지 않다가 결국 붙들려가서 곤장을 맞았다.

 

김응서가 선조의 총애를 믿어서인지, 또는 요시라와 고니시가 진심으로 조선을 도와주고 있다고 믿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거슬리는 점이 많았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
8일. 맑다. 아침에 이방이 찾아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원수(권율)가 구례로부터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다. 늦게 집주인 이어해와 최태보가 찾아왔다. 저녁에는 송대립, 유홍, 박영남이 왔다. 송대립과 유홍 두 사람은 밤이 깊어지자 돌아갔다.

 

9일. 맑다. 내일 열을 아산으로 보내려고 제사(장례일 8월 4일)에 쓸 과실을 봉하였다. 어버이 그리워서 슬피 울면서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10일. 맑다. 열과 변존서를 보내려고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일찍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처지에 이르렀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염려가 되었다. 열 등이 막 떠나자 황 종사관이 와서 두 시간 넘게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텅 빈 방에 혼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에 마음이 몹시 편치 않아 밤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11일. 맑다. 열이 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더위가 너무 기승을 부리니 걱정을 금할 수 없었다. 늦게 변홍달, 신제운, 임중형 등이 찾아왔다. 혼자 빈 방에 앉아 있으니 그리운 마음을 어찌 하랴, 비통해 마지않았다. 종 태문과 종이가 순천으로 갔다.

 

12일. 맑다. 합천 군수가 햅쌀과 수박을 보내왔다. 점심밥을 지을 때 방응원, 현응진, 홍우공, 임영립 등이 박명현으로부터 와서 함께 식사를 했다. 종 평세가 열을 따라 갔다가 돌아와서 잘 갔다고 전해주었다. 다행이다. 그러나 슬프고 한탄스러움을 어찌 말하랴. 이희남이 사철 쑥 백 묶음을 베어 왔다.

 

13일. 맑다. 남해 현령(박대남)이 편지와 음식물을 많이 보내주었다. 또 전마(戰馬)를 가져가라고 하였다. 늦게 이태수, 조신옥, 홍대방이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이야기하였다.

 

14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나와 체찰사가 함께 어떤 곳에 이르니 시체가 많이 널려 있어서 혹은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기도 하는 꿈이었다. 이른 아침에 전마를 끌고 올 일로 정상명을 남해로 보냈다. 방응원, 윤선각, 현응진, 홍우공 등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홍우공은 자기 아버지가 병이 나서 종군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니, 나에게는 팔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었다. 놀랄 일이다.

 

황 종사관이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하고 또 김해 사람으로 왜적에게 부역했던 김억의 편지를 보여주었는데 ‘7일 왜선 5백여 척이 부산으로 나오고 9일에는 왜선 1천여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 앞바다(태종대 앞)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5척이 표류하여 두모포에 이르고, 또 7척은 간 곳을 모른다’ 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황 종사관에게 달려가서 의논했다.

 

15일. 비가 오다 개었다 하였다. 중군장 이덕필이 왔다. 그 편에 우리 수군 29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으로 통분하였다.

 

도원수부의 중군장이 패전소식을 전하면서 대응책을 듣고 갔다. ‘곰 함대’ 는 계속 당하고만 있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한산도로 물러나 견내량을 막아섰을 것이다. 그랬다면 왜군들은 가덕도 해안에 머물러 있다가 이듬해 히데요시가 병사하고 나면 모두 철수했을 것이다. 그 무렵에는 히데요시의 중병설이 파다했고 심지어 히데요시의 사망설도 몇 차례나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16일 ※
16일. 비가 오다 개었다 하면서 끝까지 흐린 채 맑게 개지는 않았다. 아침 식사 후에 손응남을 중군장의 처소로 보내서 수군의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가 돌아와서 중군장의 말을 전하기를, 좌병사의 긴급 보고를 보니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세하게 말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낮에 이희남을 시켜서 칼을 갈게 했더니 아주 예리하게 갈았다. 적의 괴수를 잘라도 될 것 같았다. 저녁에 영암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이 서생포(울산군 서생면 서생리)로부터 맨몸으로 왔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7월 5일에 우후가 타는 배의 격군이 되어 칠천량(거제군 장목면)에 도착해서 자고, 6일에 옥포로 들어갔다가, 7일 새벽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도착하니 왜선 8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배들이 곧바로 돌진하였더니 왜적들은 모조리 육지로 올라가고 빈 배만 남겨두었습니다. 우리 수군들은 그것을 끌어내다 불태우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해 갔습니다. 그때 마침 대마도로부터 건너오는 적선 1천여 척과 마주쳐서 서로 맞붙어 싸우려고 했으나 왜선들은 흩어져서 회피하므로 결국 잡아 섬멸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탄 배와 다른 배 6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여 표류하다가 서생포 앞바다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육지로 올라가다가 적들에 의해 거의 다 살육을 당하고, 저만 혼자서 수풀 속으로 들어가 기어서 겨우 목숨을 살려 간신히 여기까지 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다면 다시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온통 찢어질 것만 같았다. 또 선장 이엽이 왜적에게 붙들려 갔다고 하니 더욱 통분하였다.

 

세남의 이순신에게 전한 말을 정리해 보면, 세남이 속해 있던 함대는 7월 5일 한산도를 출발해서→칠천량 정박→7월 6일 옥포→7월 7일 다대포→절영도 앞바다에서 왜선 1천여 척과 조우→세남의 배 서생포 표류→세남의 초계 도착이라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이순신은 세남의 얘기를 듣고 ‘무슨 항해와 해전을 이따위로 하고 다니는가?’ 하고 놀라면서 분하게 여겼다. 그럼 여기서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 7월 6일 옥포→다대포→절영도까지 하루 만에 항해한 것은 파김치가 될 정도의 무리한 항해였다. 왜군의 심장부인 부산과 대마도 앞바다까지 이 같은 조건으로 다가갔다는 것은 항해술과 해전술 모두에서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둘째, 부산포에 갔다면 먼저 부산포에 정박해 있는 왜선단을 공격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절영도 앞바다까지 갔을까? 조선 함대가 절영도 앞까지 이르렀을 때 왜군들이 퇴로를 막은 후 김해 · 안골포 · 웅천 등지의 왜선단도 퇴로 차단에 나선다면(실제로 그렇게 된 것이 칠천량해전) 조선 함대는 갈 곳이 없게 된다.

 

셋째, 조선 함대가 자랑하는 해전법은 ‘거북선+학익진의 판옥선단’ 에 의한 협격전이다. 그런데 조선 함대의 해전 원리는 활용해 보지도 못하고 오히려 ‘사냥개들의 곰 사냥’ 해전 원리에 농락당하고 말았다. 이순신은 이러한 점을 분석해 보고는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고 통분해 했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17일 ※
비. 이희남을 황 종사관에게 보내서 세남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세남의 이야기를 전략 전술적으로 분석, 해설하여 도원수부에 보낸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18일 ※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는데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 등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 고 하므로 통곡하였다.

 

얼마 있다가 원수(권율)가 와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어찌할 수가 없다” 고 하였다. 오전 10시가 되도록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나는 “내가 연해안 지대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한 연후에 대책을 세우겠다” 고 했더니 원수가 기뻐하였다.

 

나는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 등 군관들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 현감이 새로 부임하여 나를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통곡을 했다.

 

권율은 멀리 나가 있다가 급보를 받고 달려왔지만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군사 고문으로서 대책을 세우겠노라고 했다. 울돌목 대반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19일 ※
비. 단성(산청군 단성면) 동산산성에 올라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고하여 적이 엿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대로 단성에서 잤다.

 

단성과 초계 지역을 중심으로 경상도 - 전라도의 내륙에는 크고 작은 성이 50여 개에 달했다. 정유재란 때 5만의 왜군이 초계→거창→황석산성→진안→전주로 침공해 오자 이 성들은 스스로 와해되어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왜군의 대부대가 통과한 후에는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는데 이 같은 전략 전술도 이순신의 초계 체류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20일 ※
하루 종일 비, 비가 왔다. 단성 현감이 와서 만나보았다. 정오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에 이르니 진주 목사가 와서 만나보았다. 굴동(진양군 수곡면 창촌리)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진주목사가 마중을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난국 수습의 구심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21일 ※
맑다. 일찍 진주를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도 고을에 있고 백성들도 본업에 힘써서 올벼를 거두기도 하고 혹은 보리밭 준비도 하고 있었다.

 

아직 철천량 패전보를 듣지 못한 곤양 군수와 백성들의 모습이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21일 ※
곤양을 떠나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감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 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서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왔기에 패할 당시의 정황을 물어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달아났기 때문” 이라고 하였다. 거제 소속 배 위에서 자고 있던 현감과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이 새벽 2시나 되었는데,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여 안질을 얻었다.

 

이순신은 칠천량에서 도망해 오는 조선 수군 패잔병들을 찾고 있었고, 때마침 노량에서 패잔병들을 만나 패전의 진상을 들었다. 안질을 얻을 만큼 밤 새워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22일 ※
맑다. 아침에 배설(경상우수사)이 찾아와서 만나보니 원공(원균)이 패하여 도망친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늦게 남해현령 박대남이 있는 곳에 갔더니 그의 병세는 이미 거의 회복불능의 상태였다. 전마를 끌고 갈 일을 다시 이야기했더니, 남해 현령은 종 평세와 군사 1명을 보내라고 하였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러 몸이 불편하므로 그대로 잤다.

 

노량에서 배설도 만났고, 길을 떠나 남해 현감을 방문한 후 곤양으로 돌아왔다. 연일 계속된 강행군으로 몸살이 났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23일 ※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공문을 작성하여 송대립에게 주어 먼저 원수부로 보내고 뒤따라 떠나서 십오리원(곤명면 봉계리)에 이르러 말에서 잠깐 쉬고 진주 굴동의 전일 숙박하던 곳에 이르러 잤다. 배흥립도 와서 잤다.

 

이순신은 도원수부를 떠나오면서 권율에게 “내가 연해안으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한 후에 대책을 세우겠다” 고 약속했고, 7월 21일 노량에서 배설이 12척의 병선을 이끌고 도망해 온 사실 등을 적어 원수부에 보냈다.

 

그동안 권율은 이순신이 공을 세워 복권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배려해 왔다. 그러던 중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었고, 곧장 이순신에게 달려가서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앉아 이순신의 계책을 기다렸는데, 이는 이순신이 아니면 국난을 수습할 수가 없었고, 또 국난을 수습해야 이순신도 복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순신으로부터 대책을 강구하겠노라는 승낙을 받은 권율은 즉시 원수부로 돌아가서 사위이자 병조판서였던 이항복에게 이순신을 통제사에 재임명할 것을 건의했으며, 이항복은 그렇게 건의했다. 이순신도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수군 재건에 나섰고 그 현황을 군관 송대립(송희립의 형)에게 전해 보내는 등 권율과 손발을 맞췄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24일 ※
비. 한치겸, 이안인이 부체찰사에게로 돌아갔다. 식후에 이홍훈의 집으로 옮겼다. 방응원이 정개산성에서 와서 “종사관(황여일)이 산성에 와서 연해안의 사정을 보고 들은 대로 전하더라” 고 전했다. 조방장 배경남이 만나보러 왔기에 술을 주어 위로했다.

 

권율의 종사관 황여일이 하동 정개산성에 와서 방비 태세를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왜군은 10만 대군이었으므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 《난중일기》 1597년 7월 ※
25일. 맑다. 황 종사관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배수립과 이곳 집주인 이홍훈이 와서 보았다. 남해 현감 박대남이 사람을 보내어 내일 들어오겠다고 하였다. 저녁에 배흥립의 병을 보니 고통이 극도로 심하였다. 걱정, 걱정이다.

 

26일. 비가 오다 개었다 하였다. 일찍 식사를 하고 정개산성 아래의 송정으로 가서 황 종사관(황여일), 진주 목사와 함께 이야기하고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27일. 비.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이른 아침에 정개산성 건너편에 있는 손경례의 집으로 옮겨서 머물렀다. 늦게 동지 이천과 판관 정제가 체찰사로부터 와서 명령을 전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다. 이 동지는 배 조방장(배경남)의 처소에서 잤다.

 

28일. 비. 이희량이 와서 만나보았다. 초저녁에 동지 이천, 진주 목사(나정언)가 소촌 찰방 이시경과 함께 와서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29일. 비가 오다 개었다 하였다. 냇가로 나가서 군사를 점고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사람들은 다 말이 없고 활도 없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답답하였다. 박대남이 와서 보았다.

 

권율이 군사를 모아 보냈는데 병력의 규모와 무장 내용이 너무나 형편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