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임진왜란발발

백삼/이한백 2013. 11. 19. 18:38

조선 개국 200년인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군이 대거 침략해 왔으나 조선은 전면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종 때의 삼포왜란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란처럼 국지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이달 13일 새벽안개를 틈타 적이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에서 망을 보던 관리가 처음에 온 4백여 척을 보고 

주진(主鎭)에 보고했는데, 변장이 처음 보고받은 이것을 실제 수효로 여겼다. 그래서 병사(兵使)가 장계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못 되는데 한 척의 인원이 수십 명에 불과하니 그 대략을 계산하면 만 명쯤 될 것이다’ 라고 

하였으므로,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

 

임진왜란에 대한 최초의 보고는 ‘만 명 정도의 왜구 침략 소동’ 이었고,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 

기껏해야 삼포왜란 때처럼 경상도 해안 일대를 노략질하는 왜구로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곧 일본이 전력을 기울인 전면전이란 사실이 명백해졌다.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이끄는 제1군 1만 8천여 명,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이끄는 제2군 2만 2쳔여 명,

 흑전장정(구로다 나가마사)이 이끄는 제3군 1만 1천여 명, 도진의홍(시마즈 요시히로)이 이끄는

 제4군 1만 4천여 명 등 육군 9개군 15만 8,700명과 수군 9,200명 등 도합 16만 7,900여 명의 대군이었다.

 

당초 경상 우수영과 좌수영이 부산포에서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해야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조선군이 전의를 상실하는 바람에 일본군이 무인지경으로 상륙한 것이다.

 

해상 관문인 부산진성에서는 수군첨절제사 정발이 군민을 모아 결전에 대비했으나 정규 병력은 겨우 1천여 명에 불과했다.

 이튿날(4월 14일) 부산진성 군민들은 3면에서 포위하고 공격하는 소서행장의 군대를 맞아 치열하게 접전했으나 

일본군이 북쪽 성벽을 넘어 성안으로 돌입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정발이 전사하고 군민들도 다수 살상되면서 

부산진성은 실함되고 말았다. 조선의 첫 패전이었다. 이어서 인접 지역에 있는 다대포진도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첨사 윤흥신이 전사하면서 함락되었다. 수많은 비극을 낳은 임진왜란의 문이 이렇게 열린 것이다. 

국지전이 아니었다. 사태가 심상찮아지자 조정에서는 급히 도원수와 군사를 뽑아 보내려고 했다. 

제승방략체제에 따른 대처였으나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군민들이 모집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징비록》

이일이 서울에 있는 날쌘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가려고 병조에서 군사를 뽑은 문서를 가져와 보니, 

모두 여염이나 시정의 백도들이며 서리와 유생이 반수나 되었다. 임시로 점검하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과거 때 글을 지어 올리는 종이)을 들고 있었고, 서리들은 평정건(각 관서의 서리가 쓰는 두건)을 

써서 군사로 뽑히는 것을 모면하려는 사람들만 뜰에 가득했고, 보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일이 명령을 받은 지 3일이 

되도록 떠나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이일을 먼저 가게 하고 별장 유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가도록 하였다.

 

경장인 순변사 이일이 불과 300명의 군사도 모집하지 못했다. 시권을 들고 있거나 평정건을 쓴 것은 양반이나 아전임을

 나타내 징병에서 빠지려는 뜻이다. 다급해진 선조는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했다. 

체찰사란 지방에 병란이 있을 때 왕의 특명으로 군무를 총괄하는 임시 벼슬로 재상 겸임이 관례였다. 

영의정 이산해의 추천에 의한 것인데, 이산해와 선조 모두 그가 군무에 능한 재상임을 인정한 것이다. 

《징비록》에 따르면 유성룡은 체찰사가 된 후 가장 먼저 김응남을 체찰부사로 삼고, 

옥에 갇힌 전 의주 목사 김여물을 석방시켰다. 

김여물은 임란 3개월 전 의주 목사로 있을 때 의주성을 수리하고 진(陣) 치는 연습을 했다고 투옥된 인물이다. 

유성룡이 김여물을 석방시키자 많은 무사들의 마음이 풀어져 비장(裨將) 급 무사 80여 명이 몰려왔다.

 

전세는 급박했다. 유성룡은 대장 신립을 삼도 순변사로 천거했다. 유성룡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언급했을 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 신립이지만 당장 방법이 없었다. 호언을 믿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는 직접 신립을 전송하면서 보검 한 자루를 하사하며 말했다.

 

“이일 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처단하라. 중외(中外)의 정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의 군기를

 있는 대로 사용하라”

 

상방검은 군무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는 징표로 살생권이 있었다. 그러나 삼도 순변사 신립은 출발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군사들이 모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징비록》

신립이 대궐 문 밖에 나가서 직접 무사를 모집했으나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나(유성룡)는 중추부에서 

남쪽 전쟁터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신립이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뜰 안에 모집된 많은 군사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에 노기를 띠며 김판서(체찰부사 김응남)를 가리키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런 분을 대감이 데리고 가서 무슨 일에 쓰겠습니까? 소인(신립)이 체찰부사가 되어 가기를 원합니다.”

 

나는 신립의 노여움이 무사들이 자신을 따라가지 않는 데 있는 것을 알았으므로 웃으면서 말했다.

 

“다 같은 나라 일인데 어찌 이것저것을 구별할 수 있겠소? 공(公)이 급하니 먼저 내가 모아둔 군사들을 데리고 떠나시오.

 나는 따로 모집해 따라가겠소.”

 

군관 이름이 쓰인 단자(單子)를 내어주니 신립은 뜰 안에 모여 선 무사들을 돌아보면서, “이리 오너라” 하고서 이끌고 나가니 여러 

사람들이 실의(失意)에 찬 기색으로 따라갔다. 김여물도 같이 갔으나 마음속으로는 매우 좋지 않게 여겼다.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신립이 상방검까지 하사받았으니 군관들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신립이 임금께 하직하고 대신들의 회의장소인 빈청으로 와서 대신들에게 인사하고 막 섬돌을 내려설 무렵 사모가 갑자기 떨어졌다. 

불길한 징조이기에 대신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게다가 신립은 용인에 도착해 선조에게 글을 올리면서 자신의 이름도 쓰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신립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이처럼 불안하게 출발한 신립의 두 어깨에 조선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경장 신립과 이일이 제승방략에 따라 

지방 수령들이 모아놓은 군사를 이끌고 승리하면 다행이지만 패배하면 다른 대책이 없었다. 

유성룡이 지적한 제승방략의 문제점이 그대로 노정되고 있었다.

 

신립과 이일을 내려보낸 유성룡은 그 후속 작업을 준비하고 신립이 패전할 경우에 대비한 대책을 미리 세워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악화되었다.

 

진관체제로의 개편을 반대한 경상 감사 김수는 일본군이 대거 경상도에 상륙하자 가장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과 신경이 쓴 《재조번방지》는 김수가 급히 동래로 향하다가 이미 양산도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밀양으로 후퇴했다고 전한다. 제승방략에 따라 “도내 각 군현의 수령들은 밀양에 군사를 집결시키라” 고 명령했으나

 모일 백성들이 없었다. 

《난중잡록》은 그가 전라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 ‘전라도의 군관 3~4명과 군사 3천~4천 명을 보내달라’ 고 요청했으나

 호남 사람들도 겁에 질려 적을 피할 마음뿐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울산에 있던 경상 좌도(낙동강 동쪽 지역) 병사 이각의 행보도 김수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과거처럼 국지전으로 생각해 급히 동래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적의 기세를 보자 생각이 달라진 그는 동래 부사 송상현에게

 “그대는 성을 지키시오. 나는 원병을 모아 보내겠소” 라면서 혼자 성을 빠져 나갔다. 《국조보감》에는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면서 동래성을 빠져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방장 홍윤관이 송상현에게

 일단 물러나 “험고한 지형에 의지하여 적을 막자” 고 건의했으나 송상현은 “성주가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라며 거부했다.

 

4월 15일 부산진성을 점령한 소서행장이 명나라를 칠 길을 내달라고 요구하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라고 거부했다.

 

그러자 2만여 명의 일본군이 3개 대로 나뉘어 동 · 서 · 남 3방면에서 조총을 쏘며 성벽을 기어올랐다. 

동래성 군민들은 화살이 떨어지자 지붕의 기와를 뜯어 적병에게 던지면서 사력을 다했으나 포위된 데다 

지원군도 오지 않아 함락되고 말았다. 부사 송상현은 적의  침략행위를 꾸짖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소서행장 군은 4월 19일 밀양성을 무혈점령한 이후 청도를 거쳐 21일에는 대구 부근으로 진출했다.

 대구 수성천 변에서는 일부 군현의 병사들이 야영하면서 감사 김수와 조정에서 파견된 경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째 김수나 경장의 소식은 묘연했고 식량은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데 

일본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요한 군사들은 밤사이 흩어져버렸고, 소서행장 군은 대구에도 무혈입성했다. 

소서행장 군은 인동을 지나 4월 24일에는 낙동강을 건너 선산 방면에는 진출했다.

 

가등청정이 지휘하는 제2군 2만 2천여 명이 부산에 상륙한 것은 4월 18일이었다. 이들은 부산에서 동북쪽으로 진출하여 

19일에는 언양을 점령하고, 21일에는 경주에 무혈입성했으며, 다음 날에는 영천을 거쳐 군위로 진격했다. 

의흥에는 좌방어사 성응길과 조방장 박종남, 경주 부윤, 풍기 · 예천 군수 등이 진을 치고 있었으나

 가등청정 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근왕(임금을 호위)’ 을 핑계로 죽령을 넘어 북쪽으로 도망갔다.

 

흑전장정이 지휘하는 제3군 1만 1천여 명은 4월 19일에 낙동강 하구의 죽도에 상륙해 김해로 향했다.

김해 부사 서례원과 초계 군수 이유검은 일본군은 어둠을 틈타 성벽을 넘자 도주하고, 

김해성은 20일 새벽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그야말로 일본군도 예상하지 못한 파죽지세였다.

 

순변사 이일이 조령을 넘어 경상도 문경에 도착했을 때 성은 텅 비어 있었다. 이일이 상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3일이었다.

 

《징비록》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 이르니 상주 목사 김해는 순변사를 맞으러 간다는 핑계로 산속으로 도주했고, 

판관 권길만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군사가 없다는 이유로 권길을 책망하면서 

뜰에 끌어내 목을 베려고 하니, 권길은 나가서 군사를 불러 모으겠다고 애원하여 밤새도록

 촌락을 수색한 끝에 이튿날 아침 수백 명을 데리고 왔으나 모두 농민들뿐이었다. 

이일이 상주에서 하루를 더 머물면서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달래 모으니,

 산골짜기에서 하나씩 모여든 것이 또한 수백 명이 되어 갑자기 대오를 짜서 군대를 만들었으나 

전쟁을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경상도의 방어체제는 무너졌고, 소서행장의 선두부대는 상주 바로 밑 선산까지 북상했다. 

저녁 무렵 선산 서쪽 개령 사람이 적군이 가까이 왔다고 알려왔다. 그러자 이일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의혹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목을 베려 했다. 일본군이 상주 근처까지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을 베려고 하자 개령 사람은 “자신을 가두어두었다가

 내일 아침까지 적군이 오지 않거든 죽여도 늦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일은 그를 가두어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도 일본군이 보이지 않자 목을 베어 죽였다.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이일의 군중에는 척후병이 없었다” 고 말한 것처럼 밤사이 이일은 적군이 실제 가까이 왔는지

살펴보는 기본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신립이나 이일은 병법의 기초보다 아군의 목을 베는 것을

 장수의 제일 과업으로 생각했다. 기껏 정보를 제공한 사람에게 상 대신에 목을 벤 처사는 곧 업으로 돌아왔다.

 

《징비록》

조금 후에 몇 사람이 숲속에서 나와 이리저리 거닐면서 이편을 바라보다가 돌아가니, 여려 사람들이 적군의

 척후인가 의심했으나, 개령 사람의 일을 징계하여 감히 알리지 못했다. … 잠시 후에 적의 대부대가 몰려와서

 조총 10여 개를 가지고 쏘아대니 총에 맞은 사람은 즉시 쓰러져 죽었다. 이일이 급히 군사를 불러 활을 쏘게 했으나 

화살이 겨우 수십 보 밖에 떨어지므로 적을 죽일 수가 없었다. 적군은 이미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서 깃발을 들고

 우리 군대 뒤로 포위하며 몰려왔다.

 

이일은 일이 다급한 것을 알고 말을 급히 돌려서 북쪽으로 달아나니 군사들은 크게 혼란해져서 

각각 자기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쳤으나 살아간 사람은 몇몇에 지나지 않았고, 종사관 이하 미처 말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적군에게 살해되었다.

 

이일은 말과 장수갑옷을 벗어버리고 머리털을 풀어헤친 채 알몸뚱이로 신립이 있는 충주로 달아났다.

 이렇게 상주를 접수한 일본군은 4월 26일 문경을 공격했다. 

성이 비어 있고 백성 한 사람 눈에 띄지 않자 안심하고 관아 앞을 

지나가던 일본군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을 맞고 몇 명이 쓰러졌다. 문경 현감 신길원이 20여 명의 결사대와 함께 매복 기습한 것이다.

 곧 체포된 신길원은 항복을 거부하고 참살당했다.

 

소서행장의 제1군이 4월 26일 중로의 관문인 조령 부근까지 진출해 진을 치자, 가등청정의 제2군도 죽령을 넘어

 단양-충주로 우회하는 길을 포기하고 조령으로 진출했다. 

가등청정은 소서행장이 서울을 먼저 점령할까 두려워 원래 계획과 다르게 조령을 선택한 것이다.

 일본군 제1, 2군이 모두 좁은 조령으로 몰려들면서 이 협곡은 승부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어가고 있었다.

 

삼도 순변사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남하하면서 군사를 모았다. 

이렇게 모은 8천여 명의 병력이 조선군의 전부였다. 신립은 4월 26일에 충주 남쪽의 단월역에 진영을 설치했는데,

 이때 상주에서 패전한 이일이 달려왔다.

 

신립이 군사를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얼마 있다가 이일이 꿇어앉아

 부르짖으며 죽기를 청하자 신립이 손을 잡고 물었다.

 

“적의 형세가 어떠하였는가?”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신립이 쓸쓸한 표정으로 의기가 꺾이자 김여물이 말했다.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했다.

 

“이 지역은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임진왜란 초기의 최대 수수께끼 중 하나가 신립이 왜 천험의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를 결전의 장소로 삼았는가 하는 것이다.

 상촌 신흠은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 에서 신립이 조령을 지키자는 이일과 김여물 등의 의견에 대해,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고

말했다고 적었다. 신립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싸우는 소극적 전법보다 적을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로 승부를 짓는 

적극 전법을 택했다. 신립은 조선군의 기병이 왜군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립은 4월 28일 아침 전 병력을 탄금대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개활지인 탄금대를 결전 장소로 선택했다. 일본군을 보면 도주하기 바쁜 신병 중심의 조선군에게

 승리만이 살길이란 심적 부담을 주기 위해서였다.

 

문경에서 하루를 묵은 소서행장 군 1만 5천 명은 4월 27일 새벽에 문경을 출발하여 매복병이 없는 조령을 넘어 

28일 정오 무렵에 단월역에 도착했다. 드디어 두 군은 탄금대에서 마주쳤는데 소서행장 군은 중앙을 담당하고

 종의지 군과 송포진신(마쓰우라 시게노부) 군이 좌 · 우익을 맡아 3면에서 조선군을 포위했다.

 

신립은 기병 제1진 1천여 명으로 적을 제압한 다음, 곧바로 제2진 2천여 명을 투입하여 또다시 왜군을 격퇴했다. 

왜군은 조선의 기병을 맞아 개전 이후 최초로 밀렸다.

 

그러나 조선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인 데다가 탄금대가 저습지인 것이 악재로 작용했다. 

말발굽이 수렁에 빠져 기병 특유의 기동력이 저하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네 차례나 일본군을 격퇴했으나 결국 전세는 기울고 말았다. 

신립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 병력에게 최후의 총공격을 명령했으나 끝내 패전하자 남한강에 투신 자결했다. 

종사관 김여물도 적진으로 돌격하여 장렬한 최후를 맞았으며, 충주 목사 이종장도 마지막까지 용전분투하다가 전사했다.

 

조선이 전력을 기울여 지원한 삼도 순변사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의 항전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순변사 이일은 여기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상주 전투 패전보고에 이어 두 번째 패전보고를 올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당일 저녁 소서행장 군은 충주성에 무혈입성했고, 29일에는 가등청정 군도 충주에 도착해 합류했다. 

두 장수는 서울 진공계획을 짰다. 소서행장의 제1군은 여주와 양평을 거쳐 서울 동대문으로

, 가등청정의 제2군은 죽산과 용인을 거쳐 남대문으로 향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양군은 4

월 30일 충주를 출발해서 서울로 향했다. 이때 추풍령을 넘어 청주 쪽으로 진출한 흑전장정의 제3군은 

청주에서 곧바로 죽산으로 북상하여 제2군의 뒤를 따라 서울로 향했다. 그들의 기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충주에서 패전보고가 올라오자 가장 당황한 인물은 선조였다. 

그는 패전보고가 이르자마자 파천(播遷=임금이 난을 피해 도성을 떠나는 것)을 떠올렸다.

 정상적인 국왕이면 전시 비상내각을 꾸려 도성수호를 결의하고 전국에 선전교서를 보내 항전을

 독려해야 했지만 선조는 달랐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조는 “충주에서 패전보고가 이르자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이때 “대신 이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고 전한다. 영중추부사 김귀영이 그중 한 명이었다.

 

“종묘와 원릉이 모두 이곳에 있는데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서울을 고수하며 외부의 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승지 신잡도 반대했다.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여든 넘은 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수찬 박동현도 마찬가지였다.

 

“전하께서 일단 도성 밖으로 나가시면 인심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輦)을 멘 인부들 

또한 길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

 

《선조실록》은 박동현이 “목 놓아 통곡하니 상이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고 그날의 분위기를 전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임금이 먼저 파천을 주장한 사실이 알려지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종실인 해풍군 이기 등 수십 명이 합문을 두드리고 통곡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선조가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 라고 말을 바꾸자 

이기 등이 물러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박동량이 쓴 《기재사초》는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고 전하고 있다. 선조는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 는

 전교를 내려 안심시킨 후에 몰래 파천을 준비한 것이다. 선조는 징병 체찰사 이원익과 최흥원을 

각각 관서(평안도)와 해서(황해도)로 보내면서 이원익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이 전에 안주를 다스릴 적에 관서 지방의 민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경을 잊지 못한다고 하니, 

경은 평안도로 가서 부로(父老)들을 효유하여 인심을 수습하라. 적병이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남쪽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함락되니 경성(서울) 가까이 온다면 관서로 파천해야 한다. 이러한 뜻을 경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최흥원에게도 마찬가지로, ‘황해도로 가서 거가(車駕)를 영접하라’ 고 당부했다. 선조는 이때 최흥원에게

 “지금 인심이 흉흉하여 토붕와해의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윗사람을 위해 죽는 의리가 없어졌다” 라며 

오히려 인심을 탓했다. 선조의 파천 결심은 굳셌다. 문제는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의 태도였다. 

두 사람마저 반대하면 선조 혼자 무작정 파천하기는 어려웠다. 이때 파천을 지지하고 나선 인물이 이산해였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

이때 대신 이하 모두가 입시할 적마다 파천의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오직 영의정 이산해만은 그저 울기만 하다가 나와서

 승지 신잡에게 옛날에도 피난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으므로 모두가 웅성거리면서 그 죄를 산해에게 돌렸다. 

양사가 합계하여 파면을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도성의 백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도성을

 고수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이산해의 파천 지지를 비난하면서도 ‘도성을 고수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선조실록》의 편찬자들이 이산해가 영수로 있던 북인들이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은 파천에 대한 유성룡의 태도는 

직접 기술하지 않았다. 다만 대사간 이헌국의 말이 기록되어 있어 유성룡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선조실록》 25년 5월 2일

이때 신잡이 입대했다가 나오면서 “성상께서 파천하라는 전교가 계셨다” 고 했는데, 영상은 아무 말이 없었고 

좌상(유성룡)이 “파천계획은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는데 이 무슨 말씀인가” 하니, 영상이 밖으로 나오면서 

“옛날에도 잠깐 피한 적이 있는데 어찌해서 꼭 만류해야 하는가” 라고 했습니다.

 

이산해가 파천을 지지하자 유성룡이 ‘파천 계획은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는데 이 무슨 말씀인가’ 라고 반대했다는 것이다. 

선조는 파천을 반대하는 유성룡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유성룡은 선조의 태도를 보고 세자를 세우는 것이 대단히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선조의 태도로 봐서 도성을 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여차하면 요동으로 도망갈 수도 있었다.

 이 경우 세자를 중심으로 위기를 수습해야 했다. 그러나 정철이 세자 책봉을 주청했다가 귀양 간 데서 알 수 있듯이 

선조는 그간 세자 책봉 문제로 온갖 소란을 일으킨 군왕이었다. 자칫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처리해야만 할 일이었다.

 

《연보》 임진년

이때 적군의 기세가 날이 갈수록 급박하였다. 선생(유성룡)이 대신들과 세자를 세워 인심이 정착할 곳이 있게 하자고 계청하였다. 

상이 일렀다.

 

“중궁(中宮)이 만일 원자(元子)를 낳으면 처리하기 어려울 게 아닌가?”

 

선생이 말했다.

 

“송 인종은 나이 겨우 서른 남짓하여서도 사마광 같은 분들이 빨리 세자를 세우자고 하였는데, 어찌 예측한 바 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상이 한참 생각하더니,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가 될 만하다.”

 

《선조실록》이 전하는 실제 과정은 《연보》의 기록보다 훨씬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우승지 신잡이 세자 책봉을 

주청하자 선조는 대신들을 불렀다. 선조가 “내가 편복(便服)으로 대신을 인견할 수는 없다” 며 ‘내전으로 들어가 옷을 바꾸어

 입은 후 인대(引對)하겠다’ 고 말하자 신잡이 옷자락을 잡고, ‘이러한 때에 작은 예절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고 말렸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

대신들이 앞으로 나아가니 상이 대신들에게 일렀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다시 형적(形迹)을 보존할 수가 없다. 경들은 누구를 세울 만하다고 생각하는가?”

 

대신들 모두가 아뢰었다.

 

“이것은 사신들이 감히 아뢸 바가 아니고 마땅히 성상께서 스스로 결정하실 일입니다.”

 

이렇게 되풀이하기를 서너 차례 하자 밤이 이미 깊었건만 상은 그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선조는 대신들이 누구를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세자를 세우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선조는 시간을 끌어서 세자를 책봉하지 않고 넘어가려 한 것이다. 이런 선조의 내심을 간파한 인물이 이산해였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

이산해가 허리를 굽히고 자리를 피하려 하자, 신잡이 말했다.

 

“오늘은 기필코 결정이 내려져야 물러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대신은 다시 자리로 나아갔다. 상이 미소를 띠고 일렀다.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를 세워 세자로 삼고 싶은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대신 이하 모두 일시에 일어나 절하면서 아뢰었다.

 

“종묘사직과 생민들의 복입니다.”

 

《선조실록》은 “신잡 등이 합문 밖에서 의논을 정했다” 고 적고 있는데, 이런 대사는 정승들이 계책을 정하는 법이지

 승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의논을 정하는 사람’ 은 유성룡 같은 대신들이고 신잡은 실행을 맡은 중견 관료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연보》는 이 자리에서 세자 책봉 못지않게 중요한 논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연보》 임진년

선조가 인하여 이르기를,

 

“내가 본디 병이 많고 또 나라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종묘를 받들고 국가를 다스리겠는가. 

세자에게 아예 왕위를 전하고 싶은데 어떠한가?”

 

선생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하께서는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세자를 때때로 전하 곁에 있게 하여 모든 사무를 참여하여 처리하도록 

하면 되는데 어찌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홍복(弘福)을 누리시어 어려움을 구제하소서.”

 

유성룡이 세자 책봉을 계청하자 선조는 선위(禪位)를 언급함으로써 충성심을 떠본 것이다. 자신의 왕위를 흔들기

 위해 세자 책봉을 계청한 게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유성룡이 세자 책봉을 주청한 이유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선조가 요동으로 도주할 경우 세자를 중심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조가 국내에 있으면 당연히 선조가

 국난 극복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유성룡은 선조의 이런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선위를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선조의 파천 계획을 반대하고 세자 책봉을 주청한 것 때문에 선조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선조에게는 이미 유성룡을 제거할 계책이 세워져 있었다. 유성룡을 서울을 지키는 유도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도성에 남아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도 좋고, 죽지 않고 도주하면 왜 서울을 지키지 못했느냐고 힐문할 수도 있었다. 

이때 말리고 나선 인물이 도승지 이항복이었다.

 

《기재사초》 박동량

도승지 이항복이 아뢰었다.

 

“이제 국사가 끝장났는데 만약 중국에 구원을 청하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사이를 주선하고 응대하는 데에 

유성룡이 없어서는 안 되오니, 서울에 머물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이양원으로 대신하였다.

 

이항복은 유성룡의 능력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의 반대 때문에 선조는 유도대장을 이양원으로 교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는 하루라도 늦어지면 일본군의 포로가 된다는 듯 파천을 서둘렀다.

 

《선조실록》 25년 4월 30일

새벽에 상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는데 홍제원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종2품 후궁)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에서 먹었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개국 이래 최초의 파천은 이처럼 무질서했다. 선조 일행이 도성을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궁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평소에 백성들 위에 군림하다가 막상 왜적이 침입하니까 

도성을 버리고 도주한 작태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불태운 기관이 형조와 장예원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장예원은 노비 문서를 관할하는 곳이고, 형조는 백성들을 형벌로 다스리는 곳이다.

 백성들은 조선 사대부 지배체제에 불을 지른 것이다. 유성룡은 「꿈에 나타난 징조」 라는 글에서 

대궐이 불타는 것을 미리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잡저》 꿈에 나타난 징조

나는 평생에 꿈꾼 징험(징조가 들어맞는 것)이 많았는데, 몸소 널리 돌아다닌 곳 절반 이상은 꿈속에서 본 것이다. 

신묘년(1591) 겨울에 내가 우연히 한 꿈을 꾸었는데, 경복궁 연추문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내가 그 아래서 이리저리 거닐고 있으니 곁에 있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이 궁궐은 처음 자리를 정할 적에 지나치게 평지로 내려갔으니, 지금 만약 고쳐 짓는다면

 마땅히 약간 높은 곳으로 산에 가깝게 자리를 정해야 할 것이오.”

 

놀라서 깨어보니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는데, 이런 꿈 이야기를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이듬해 임진년(1592) 4월에 임금의 행차가 경복궁을 떠나고 세 궁궐(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왜적의 군대가 우리나라의 팔도에 가득 찼으며, 여러 사람들이 나라의 

회복은 가망 없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나와 친하여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몇 사람에게 

이런 꿈 이야기를 하고는 또 이렇게 일렀다.

 

“꿈속에서 이미 경복궁을 고쳐 지을 일을 의논하였으니, 이는 곧 나라가 회복될 징조이므로 왜적을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여러 사람들이 나라의 회복은 가망이 없다’ 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판국이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그러나 선조가 선택한 도주 길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재사초》 박동량

이날 낮에 대가는 큰비를 무릅쓰고 벽제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한 후, 어둠을 타서 임진강을 건너려 했으나 

강물이 불어 범람하고 길은 진흙이며 나룻배는 겨우 5~6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로 대소 인원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어 상하가 문란하고 마부와 말이 분산되어 혹은 걷기도 하고 혹은 말을 탔지만 밤새도록

 건너가지 못했다. 후궁 민빈은 가마멀미로 계속 파주에 남아 있었다. 임금은 배를 타고 기다렸다. 

이미 이경(오후 9~11시)이 되었으나 저녁식사를 들지 못한 임금이 내시에게 술을 가져오라 하니 서울에서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차를 가져오라 하니 차도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므로, 왕은 갈증을 참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내의원의 용운이란 사람이 상투 속에서 사탕 반 덩어리를 끄집어내 강물에 타서 드렸다. 

밤중에 동파관에 도착하여 사경(새벽 1~3시)에야 비로소 궂은 진지를 들었고, 세자 이하는 모두 밥을 굶었다. 

좌의정 유성룡이 백미 3승(되)을 올리니, 다음 날 아침에 밥을 지어 드렸다.

 

선조는 도성을 떠나 파천하면서 거의 실성한 사람이 되어갔다.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이모야 유모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라고 울부짖는 상황이었다. 선조는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소만록》 윤국형

임진년 4월 그믐, 대가(임금의 수레)가 도성문을 나가서 종일 비를 맞으며 임진강에 이르러 배를 탔다. 

상은 호행(扈行)하는 여러 재상들을 입시하게 하고, 유 정승(유성룡)에게 일렀다.

 

“경이 항상 나라의 방비가 소홀하다고 경계하더니,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상이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도 모두 울었다. 상이 시종에게 술이 있느냐고 물어서, “소주 한 병이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뱃사공이 가지고 있는 사기 종지를 구해서 여러 신하들에게 한 잔씩 돌렸다.

 

저물어서 동파역에 이르니 밤비가 죽죽 내리는데,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잤다. 임금이 드실 음식도 

어지러운 군사들에게 뺏기게 되어 찬성 최황이 쌀 두 말을 가지고 가서 임금께 바쳤다 한다.

 

그런데 문제는 파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파천보다 더 큰 문제는 요동으로 도망가려는 요동내부책이었다. 

선조의 요동내부책은 유성룡이 강력하게 만류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로 인해 더욱 선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파천을 받대하고, 세자 책봉을 계청한 데다가, 요동내부책까지 반대한 유성룡을 선조는 제거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 후과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5월 1일 선조 일행은 개성에 도착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주하는 행렬에 기강이 서 있을 리 없었다.

 《선조실록》은 “이날 저녁 호위병 중에 가위에 눌려 헛소리를 지르는 군사가 있어 모두 깜짝 놀라 서로

 치고받는 소리가 대내(大內)에까지 들렸다” 라고 전하고 있다. 같은 날짜에 “호위하는 군졸 중에 평안도 토병(土兵)의 말을

 빼앗은 자가 있었는데 즉시 목을 베어 조리돌렸다” 라는 기록도 있다. 

그렇잖아도 평안도민들은 서북인 차별 정책으로 조정에 불만이 많았다. 

평안도 토병이 선조 일행에게 칼을 겨누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민심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기재사초》 박동량

처음 임금이 서울을 떠날 적에,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나라의 형세가 반드시 

떨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유식한 벼슬아치들도 결국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 생각하여, 

음관과 한산(휴직자) · 문관으로 호종하는 자가 백에 한둘도 없었다. 대체로 인심이 이미 떠나버려 모두 책할 수 없었다. 

수찬 임몽정은 파천 하루 전날 피하여 숨고, 정언 정사신은 겨우 반송정까지 따라왔다가 달아나고, 지평 남근은 연서에

 이르러서 달아나고, 그 나머지 여러 부서의 소관들도 제멋대로 흩어져 가버렸다.

 

파천 길 역시 극도의 고생길이긴 마찬가지이자 신하들 사이에서 서울을 버린 것이 실수라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백성들에게 조롱받으며 도주하느니 도성에서 결전하는 것이 나을 뻔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하들은 파천을 주도한 선조에게 분노했지만 선조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기에 파천을 찬성한 이산해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선조는 5월 1일 이산해를 파직하고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임명해 신하들의 마음을 달랬다. 

최흥원이 좌의정, 윤두수가 우의정이었고, 유도대장 직책을 갖고도 도성을 버리고 도주한 이양원은 정승에서 체직시켰다.

 

《연보》

이때 대간이 의논하여 영의정 이산해는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망쳐놓았으니 관직을 삭탈하도록 아뢰자,

 상께서 파직을 명하고, 이어 선생을 불러 영의정에 내정하였다. 선생이 아뢰었다.

 

“신은 이산해와 더불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국사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산해는 이미 파직되었는데 신만이 어찌 감히 스스로 무죄라고 해서 정승으로 있겠습니까.”

 

그리고 계상을 내려와서 대죄하였다. 상이 승지 이충원에게 부축하여 일으켜 전에 오르도록 명하니, 선생이 굳이 사양하며 아뢰었다.

 

“신은 죽을죄를 지었으니 끝내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물러나 또 뜰 복판에 엎드려 있었다. 상이 명령하여 일으켜 내보내고 전상에 있는 여러 제신들에게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을 추천하게 하였다. 선생이 영의정, 최흥원이 좌의정, 윤두수가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선생을 허물을 자책하고

 극구 사양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가 눈 밖에 난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승진시킨 것은 파천에 대한 신하들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분노는 이산해의 파직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선조실록》 25년 5월 2일

양사가 제일 먼저 파천을 주장한 이산해를 논핵하여 멀리 찬출시키기를 청했다. 

육 승지와 어가를 호종한 신하들을 부청(개성부청사)에서 인견하였는데 모두가 의논하여 파천의 실수를 공격하고 

그 계획이 이산해로부터 나왔다고 분한 감정에 복받쳐 그를 박살(撲殺=때려죽임)하자는 논의까지 나왔다.

 

이산해가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은 파천 찬성 외에도 평소 선조의 후궁 김빈의 오빠 김공량과 결탁해 많은 비리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이산해와 김공량을 죽여 민심을 수습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선조실록》 25년 5월 3일

삼사가 합계하여 김공량의 효시(목을 베어 내거는 것)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김공량이 언제 정사를 어지럽힌 일이 있는가? 왜변(倭變)이 어찌 이 사람 때문에 일어났겠는가. 처벌은 죄에 맞아야 한다.

 그러니 우선 가두어두라.”

 

신하들의 분노는 이산해에게도 향했다. 심지어 때려죽이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선조는 이산해의 처벌을 막았다. 

파천에 찬성한 이산해에 대한 공격은 사실상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산해를 처벌하면 자신의 잘못을 

천하에 공표하는 일이기 때문에 선조는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성룡을 끌어들였다.

 

《선조실록》 25년 5월 2일

상이 일렀다.

 

“파천을 결정한 날 간하여 말리지 못한 죄는 영상(이산해)과 유성룡이 같은데, 어찌하여 지금 유독 영상만 논하고 

성룡은 언급하지 않는가? 만약 영상을 죄준다면 유성룡까지 아울러 파직해야 할 것이다.”

 

상은 산해를 지칭할 적에 늘 영상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사간 이헌국이 아뢰었다.

 

“물의가 모두 죄를 이산해에게 돌립니다. 유성룡의 경우는 자못 애석하게 여깁니다.”

 

사간원 정언 황붕은 산해 처의 종여서(백숙부의 사위)로 반열이 뒤였으므로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병조정랑 구성이 벌떡 일어나 그의 옷을 잡고 책망했다.

 

“너는 이산해에게 빌붙어 청현 직에 올랐지만 천위(임금)가 바로 지척인데 감히 사사로운 은혜를 품고 군부를 속일 수 있는가?”

 

끌어내리려 하자 황붕이 말했다.

 

“감히 말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아뢰려고 한 것일 뿐이다.”

 

한참 동안 서로 당기고 비트는 것을 이헌국이 뜯어말렸다. 신잡이 아뢰었다.

 

“여항(민간)에서 전하는 말들도 이와 같습니다.”

 

상이 일렀다.

 

“죄를 줄 수는 없다. 천지 귀신이 위에 있거늘 누구는 죄주고 누구는 보호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선조의 물귀신 작전이었다. 파천을 지지한 이산해는 원한의 표적이 된 반면 파천을 극력 반대하고, 

요동내부책을 저지시킨 유성룡은 여러 신하들이 존경하는 대상이 되었다. 

유성룡 동시처벌론이 선조의 억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선조실록》 25년 5월 2일

이충원이 아뢰었다.

 

“죄를 균등하게 주어야 한다는 말씀은 지극히 공변됩니다만, 이산해는 오랫동안 인심을 잃었고 유성룡은 사람마다 

촉망하는데 함께 파직하신다면 인심이 반드시 놀랄 것입니다.”

 

상이 일렀다.

 

“군사의 일을 완만히 하여 실패시킨 죄는 성룡이 더 무겁다.”

 

이헌국이 아뢰었다.

 

“신이 듣기로는, 당초 성상께서 파천할 뜻이 계셨고 삼사(三司)의 장관이 합문 밖에 청대했고 종실도 왔었습니다

. 이때 신잡이 입대했다가 나오면서 ‘성상께서 파천하라는 전교가 계셨다’ 고 했는데, 영상은 아무말도 없었고 좌상(유성룡)이

 ‘파천 계획은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는데 이 무슨 말씀인가’ 하니, 영상이 밖으로 나오면서 ‘옛날에도 잠깐 피한 적이 있었는데

 어찌해서 꼭 만류해야 하는가’ 라고 했습니다.”

 

사간 이곽이 아뢰었다.

 

“파천 논의는 영상이 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상이 일렀다.

“어쨌든 변란에 대응하지 못하고 적의 칼날을 받게 한 죄는 대신이 함께 져야 된다. …

 미리 막지 못하고 적으로 하여금 마치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게 하였으니 대신들이 어떻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적들을 한없이 우려했는데 도리어 내가 한 말을 비웃었으니, 이점에 대해서는 유성룡 혼자 그 죄를 받아야 된다. 

민폐가 된다고 하여 예비하지 않아 방비가 허술하게 만든 것은 모두가 유성룡의 죄이다.”

 

홍인상이 아뢰었다.

 

“떠도는 말을 듣건대, 이번 파천에 대하여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파천 계획은 이산해가 주장한 것입니다. 

어가가 출발한 뒤로도 행색이 망극하여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기므로 삼사가 아뢴 것입니다. 유성룡의 일에 대해서는

 신은 알 수 없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유성룡을 파직하라.”

 

선조의 억지였다. 그러나 임금의 입에서 ‘파직’ 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영의정뿐만 아니라 

겸임하던 도체찰사 직에서도 파직된 것이다. 《연보》는 “선생이 비록 면직되었으나 어가를 모심에 감히 뒤처지지 

않았다” 라고 전하는데, 도체찰사로 어가를 수행하는 것과 벼슬 없는 백두(白頭)로 수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는 임란 초기의 중요한 전기였다. 군무에 능한 유성룡이 도체찰사로 전쟁을 총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도주하기 바쁜 선조가 전쟁을 총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