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돌프 히틀러

백삼/이한백 2016. 2. 2. 16:36

                                        비극적인 世界 2次 大戰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1889년
1945년
독일
《나의 투쟁》

 

 

요약 화가가 되고자 했으나 미술 아카데미 시험에 떨어진 후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군에 입대했다. 종전 후 독일에 불리하게 결정된 조약들에 반발하여 민족사회주의자 독일노동당(나치당)에 가입했다. 총리가 된 후 독일 재무장을 선언하고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었다. 아리아 인 순혈주의를 주장하여 수많은 유대 인과 집시 등을 학살했다.

크지 않은 체구에 코밑에 난 쪽수염, 빳빳이 빗어 올린 머리카락과 긴 군화를 신고 대중들 앞에서 열띤 연설을 하는 20세기가 낳은 최후의 악인 아돌프 히틀러. 그는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수천만 명의 유대 인을 학살했던 잔혹함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하급 세무 관리였던 아버지가 열세 살에 죽고 나서 그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빈의 미술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1907년과 1908년 두 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그는 화가의 꿈을 포기한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극심한 민족 문제를 겪고 있었다. 권력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점하고 있었고, 관료층과 군인, 지주, 자본가, 지식인 계층은 거의 독일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자 폴란드 인, 남슬라브 인, 체코슬로바키아 인 등의 세력이 커지면서 민족의 자치권을 요구했고, 독일인들의 권력 독점에 대한 불만 역시 팽배해졌다. 결국 20세기 초,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인들 사이에 민족적 갈등이 불거졌다.

이렇게 각 민족들 간의 민족감정이 고조될 대로 고조된 상황에서 히틀러 역시 독일 민족주의, 반유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오스트리아 내 독일인 거주 지역을 독일에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게오르크 폰 쇠네러의 독일 민족지상주의와 반가톨릭 교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히틀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자원 입대했고, 바이에른 보병 16예비연대 소속으로 플랑드르에서 영국군과의 교전에 참전했다. 이때 히틀러는 군생활이야말로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혁혁한 공을 세웠고, 2개의 철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중도에 귀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비참한 패배로 끝나자 그는 독일의 11월 혁명과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격렬한 반대 입장에서 '독일노동당'이라는 작은 우익정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 정당은 열렬한 민족주의 이념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동시에 반민주(反民主), 반자본(反資本), 반공산(反共産), 반유대의 노선을 표방하고 있었다. 얼마 후 이 당은 '민족사회주의자 독일노동당'이라고 명칭을 바꾸었는데, 앞부분의 민족사회주의자(Nationalsozialist)의 머릿글자를 따 '나치(Nazi)'라고 불렸다. 나치의 중심에는 히틀러가 있었다. 그는 군대 동료들을 입당시키고 그때까지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당의 노선을 친대중적으로 바꾸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을 본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융합한 민족사회주의 노선을 띠어갔다.

나치 독일 군기

히틀러는 각종 상징과 선전물을 통해 국민에게 자신과 나치를 각인시켰다.

나치당의 당세는 급속하게 신장되기 시작했다. 이는 히틀러의 연설 실력 덕분이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과도기적인 형태로 들어선 바이마르 정부의 실정에 실망한 군중들이 나치당을 지지한 까닭도 있었다.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의 군대가 전쟁 배상금 문제를 빌미로 루르 지방을 점령했을 때 마르크화의 가치는 천문학적으로 폭락하여 차라리 연료를 사느니 마르크화로 불을 때는 편이 낫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오랜 노력으로 마르크화를 저축했던 독일 국민들의 분노와 정부에 대한 실망은 실로 엄청났다. 당시 독일투쟁동맹을 이끌던 히틀러 역시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공화정 타도를 외쳤다. 히틀러를 위시한 독일투쟁동맹의 주장은 바이에른 우익정부가 베를린으로 진격하고, 전 독일의 우익 독재정부 수립이 주요 골자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나치당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이에른 정부가 나치당을 전 독일 우익 독재정권의 수뇌부에서 배재할 의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1923년 11월 3일 히틀러와 독일투쟁동맹은 뮌헨의 한 맥주 주점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비어홀' 폭동 사건이다. 이들은 전 독일 우익 독재정권이 수립될 때 수뇌부에 나치당을 포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바이에른 정부 수뇌에게 접근하여 포섭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폭동은 실패했고, 히틀러는 체포되었다.

히틀러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비어홀 폭동과 관련한 재판에서였다. 히틀러는 재판정에서 자신이 이 폭동의 단독 주모자이며, 봉기의 목적 역시 당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일 민족을 위한 것임을 결연히 주장했다. 그의 단호한 카리스마에 대중은 매료되었다. 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복역하는 동안 그는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이제 전 세계는 위대한 인종 아리아 인, 그중에서도 특히 독일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역사가 가장 증오해야 할 인종으로 유대 인을 지목했다. 그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배척했으며 전쟁과 무력이야말로 강자가 행사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서술했다.

공격받은 유대 인 상점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풀려난 히틀러는 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 흐트러져 있던 나치당을 재정비했다. 그러나 나치당은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침체한 가운데 몇 년을 보내야 했다. 1925년부터 1929년 사이 독일은 경제적 부흥기를 맞았으므로 누구도 나치당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때 독일에서는 대규모의 공공 토목사업이 진행되었다. 독일은 한때 세계 제2의 산업국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전 세계를 가혹하게 휩쓸기 시작한 대공황이 독일에도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종전 후 갈수록 늘어나는 실업률과 생활고, 거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든 대공황으로 독일 시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히틀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군중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뛰어난 연설 능력으로 정부의 무능함을 조목조목 지적함으로써 시민들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했고, 곧 그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1930년 총선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600만 표를 얻으면서 일약 제2당으로 급성장했다. 히틀러의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했고, 결국 193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바이마르 정부의 영수이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와 경쟁하게 된다. 히틀러는 1932년 3월 13일 31.3퍼센트, 4월 11일 36.8퍼센트의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총선 결과 1,130만 표를 득표하여 1,870만 표를 득표한 힌덴부르크에게 패했다.

그러나 히틀러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는 매우 높았고, 힌덴부르크는 1933년 1월 30일 그를 독일 수상을 임명했다. 히틀러의 행보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독일 육군과 해군 수뇌부를 자기 편으로 만든 것은 물론 경제계 거물들까지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이용하여 공산당을 탄압하고, 대대적인 정적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이런 상황에서 실시된 1933년 3월 5일 총선에서 나치당은 43.9퍼센트의 지지를 얻었고, 7월 무렵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를 장악하여 나치당에 의한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이때부터 학살자 히틀러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관직에 있던 모든 유대 인들을 강제로 쫓아냈으며, 군사조직을 자신의 친위대 형식으로 재편하면서 방해가 되거나 반항의 기미를 보이는 무리들을 즉결처분했다.

1934년, 히틀러는 총통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을 모두 아우르는 막강한 권력자가 되었다. 총통이 된 히틀러는 전쟁 배상금과 대공황으로 휘청거리고 있던 독일의 경제 회복에 총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다. 유명한 '아우토반'도 이때 건설된 고속도로다. 경제회복과 실업률 감소는 독일 국민들에게 하나의 희망이었다. 히틀러의 인기는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1935년, 히틀러는 전 세계를 상대로 아주 중요한 성명 하나를 발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채택된 "독일은 영원히 무장하지 못한다"라는 결정을 철회하겠다는 것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새로운 독일군을 모집하는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1936년, 히틀러는 독일의 무장선언 이후 처음으로 라인란트 비무장지역으로 진군해 요새화시켰다. 일종의 시험이자 전쟁의 시작이었다. 라인란트의 군사화는 프랑스의 안보체제에 절대적인 위협을 가했다.

히틀러는 세계 열강들의 반응에 주목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독일의 비무장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이를 체결했던 열강들은 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폭풍우 속에 독일의 주변국 침략을 경고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세계 정복 계획을 착착 진행시켜나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관한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써 '불세출의 영웅', '전무후무한 위인'으로 독일인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끝없이 인기가 치솟았다.

이때부터 열강들은 독일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며 대응조치를 강구하기에 이른다. 영국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평시징집(平時徵集)이 시행되었고, 프랑스에서도 달라디에 수상에게 국가방위를 위한 비상권을 부여했다. 오직 미국만이 루스벨트의 고립주의 정책에 의해 중립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1939년 9월 1일,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개입을 미연에 차단한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했다. 영국은 히틀러에게 폴란드를 침략할 경우 영국은 즉시 폴란드를 지원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은 독일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이어서 프랑스 역시 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검은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강대국들이 모두 참전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포츠담 선언

종전 직전 독일 포츠담에서 미·영·중 3국의 수뇌가 모였다. 이날 발표된 공동 선언에서는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다.

폴란드를 가운데 두고 벌어진 독일과 영국·프랑스의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 사이 덴마크와 노르웨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정복했다. 영국·프랑스군이 벨기에를 지원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함락으로 유명한 마지노선이 세당 지역에서부터 뚫리고 독일군은 이를 이용하여 프랑스로 진격했다. 5월 중순,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1941년에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했다. 이어 루마니아를 위성국가화하고 불가리아와 헝가리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해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러시아를 침공했다. 1941년 6월 21일, 독일의 대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조용히 소련 국경을 넘어 발트 해 연안과 흑해 연안에 걸쳐 러시아를 침공했다. 독일의 위성국가들이 진군하는 히틀러군에게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독일은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수도인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물러나기만 했던 러시아는 혹한과 눈으로 보급로를 차단당한 독일군을 끈질기게 괴롭히며 반격을 가했고, 1942년 겨울, 혹한으로 침체돼 있는 독일군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러시아는 점점 더 기세를 높여갔고 독일군은 급격한 하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의 패배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북아프리카에서도 독일은 수십만 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내고 패퇴하기 시작했다.

철저한 고립주의를 표명하던 미국의 자세도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의 몰락 이후 루스벨트는 영국으로 무기를 수송하는 한편, 징병제를 실시하여 유사시에 대비했다. 아울러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한 군수물자가 시베리아를 건너 러시아에 도착했다.

이렇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결속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마침내 히틀러에게도 종말을 고할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1944년 6월 6일, 일련의 군사들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조용히 상륙하여 북프랑스 회복전쟁을 일으켰다. 독일군의 방어선은 무너졌으며, 8월에는 파리가 해방되었다. 그 사이 또 다른 연합군이 남프랑스에 상륙하여 북진했다. 히틀러는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어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1945년 히틀러는 정부였던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후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1945년 5월 8일, 연합군은 독일의 최종적인 항복을 얻어냈다.

짧은 기간 동안 히틀러는 전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악행을 저질렀다. 철저한 유대 인 탄압정책으로 수많은 유대 인을 사살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인들이나 집시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종전 후 히틀러의 지휘하에 유대 인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재판을 통해 단죄를 받았다. 동시대의 독재자였던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시체가 밀라노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민중의 돌팔매질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자살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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