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부대’로 의심받는 용역업체 회장을 지낸 국정원 출신의 김흥기 전 카이스트 겸직 교수의 ‘사기극’ 파장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김 전 교수가 2013년 9월부터 2년간 중국과학원 한국교육원장 행세를 하면서 벌인 ‘가짜 수료증 장사’(<주간경향> 1150호 보도▶바로가기)에 외교관까지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래창조과학부, 특허청, 중소기업청,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발명진흥회, 카이스트에 이어 외교부까지 김 전 교수에게 농락당한 정부기관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학원이 자체조사를 통해 한국의 외교관이 사기극에 동원된 사실을 확인한 것은 11월 중순이다. 중국과학원 입장에서는 가짜 수료증 장사에 한국의 정부기관들이 후원기관으로 참여한 것도 그렇지만 외교관까지 동원된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중국과학원 아시아지역 대외협력 총지배인인 이치장(Yiqi Jiang)은 <주간경향>에 “김 전 교수가 한국 수강생들을 데리고 중국과학원 가상경제센터를 방문할 때 한국 외교관도 항상 동행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름을 밝히긴 곤란하나 해당 외교관은 베이징 대사관에서 지식재산업무를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외교문제 때문에 자신들이 직접 나서기 곤란하니 대신 확인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중국과학원은 가상경제센터에서 진행된 반나절짜리 방문행사의 의미와 쓰용 부센터장 이름으로 발급한 수료증의 실체도 알고 있었다. 다만 김 전 교수가 공식 승인을 받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만든 사기극 ‘소품’에 한국 외교관까지 동원됐다는 점이 중국과학원의 심기를 건드렸다.
중국과학원 가상경제센터에서 지난 4월 현장학습(field trip)을 진행할 당시 모습. 중국과학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상경제센터와 김흥기 전 교수 간 반나절짜리 사적교류에 한국의 외교관이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 |
한마디로 ‘도대체 한국정부는 이런 말도 안되는 사기극에 뭐하고 있느냐’는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중국과학원에서 “한국에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적극 협조하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주간경향>은 세융 실장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자마자 외교부 조준혁 대변인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전했다. 조 대변인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이틀 후였다. 그는 “한 명만 빼고 베이징 공관 전 직원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했다”며 “나머지 한 명의 직원이 관련된 것 같은데, 지금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외교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며 “조속히 경위를 파악해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도록 외교부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중국과학원에 전화 한 통만 걸면 금방 알 수 있는데도 “아직까지 정확하게 누가 관련됐는지 파악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가 마지막 메시지였다. 외교부가 진상확인보다는 내부입장 조율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결국 몇 차례 독촉전화 끝에 외교부의 공식 반응을 접할 수 있었다. 문제의 외교관은 특허청에서 파견된 특허관이었다.
외교부 유창호 공보담당관은 “당시 상황을 알아보니 그 행사에 중국과학원 교수와 중국 특허청 부국장이 오고 기업이 21개 참여한다고 해서 당시 특허관이 ‘한 번 가봐야 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 전 교수의 요청이나 ‘윗선’의 지시가 아니라 특허관 자체 판단으로 중국과학원 행사에 참석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협약을 맺는 것도 아니고 김 전 교수 개인이 진행하는 민간교류에 중국 특허청의 부국장과 한국 특허관이 참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한·중 양국의 외교 사정을 잘 아는 막후의 누군가가 김 전 교수가 운영하는 최고위과정을 정부나 중국과학원 차원의 교류로 믿도록 만들거나 특허관의 참석을 독려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실제로 중국과학원 가상경제센터의 쓰용 교수는 지난달 말 <주간경향>이 최초로 접촉할 때만 해도 김 전 교수의 최고위과정을 한국 특허청과 공동운영하는 프로그램(joint program)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특허청을 김 전 교수가 운영하는 과정의 공동운영자로 믿게 만들었을까.
역대 주중대사 3명 강사 동원 ‘배경’은이 점에서 김 전 교수가 중국과학원 이름을 도용한 최고위과정에 권병현, 정종욱, 김하중 등 역대 주중대사 3명을 특강 강사로 동원할 수 있었던 ‘배경’이 주목된다. 정종욱 전 대사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하중 전 대사는 통일부 장관까지 지낸 인사여서 김 전 교수 혼자만의 힘으로 동원하기는 쉽지 않은 인물이다. 1992년 본부대사로 한·중수교의 산파역을 담당한 권 전 대사도 마찬가지다. 권 전 대사는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6월 취임 후 첫 중국 방문 연설에서 한·중 양국 젊은이들의 대표적 교류로 언급했던 ‘한·중 미래숲’ 대표로 여전히 양국 외교가에서 영향력이 큰 편이다. 그런 권 전 대사가 김 전 교수가 최고위과정 명예원장으로 위촉한 4명 중 한 명에 포함되고, 글로벌이코노믹 ‘파워인터뷰’(2014년 4월)에도 등장한 점은 예사롭지 않다. 글로벌이코노믹은 ‘댓글부대’로 의심받는 용역업체 그린미디어에서 발행하는 신문으로, 김 전 교수가 지난해 12월 회장으로 취임한 바 있다. 권 전 대사와 김 전 교수의 인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린미디어가 올해 1월 제출한 용역보고서에 국정원, 민주평통자문회의, 자유총연맹과 함께 한상네트워크를 주요한 정보협력 파트너로 제시한 바 있다. 한상네트워크는 권 전 대사가 2000~2003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할 때 조직했던 단체다. 하지만 권 전 대사는 이 모든 의혹을 한사코 부인했다.
그는 “대사관 리셉션에서 스치듯 본 적은 있지만 평소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다”라며 “전화 부탁을 몇 번 거절했더니 직접 찾아와 자신을 국정원 출신이라고 소개하며 강의를 부탁해서 한 번 나갔던 게 전부”라고 말했다. 그는 “명예원장으로 위촉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 한상네트워크가 용역보고서에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고 했다. 파워인터뷰에 대해서는 “강의를 하기 직전 대기실에서 잠깐 그와 인터뷰를 진행했던 것이 전부”라고 설명했다. 김 전 교수와의 접촉과정에 다른 특별한 제3자의 개입이나 배경은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이스트는 사표 받는 선에서 모든 의혹 덮기로하지만 창간한 지 2년밖에 안된 그린미디어가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으로부터 15억원이 배정된 용역사업을 수주하고 용역보고서에 국정원과 외교부 조직을 정보협력 파트너로 올린 과정을 모두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 전 교수의 모스크바 국립대 초빙교수와 중국과학원 한국교육원장 약력이 모두 날조로 드러났음에도 사기극에 동원된 정부기관들이 일제히 ‘침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김 전 교수의 가짜 모스크바 국립대 초빙교수 약력을 그대로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가 학생회로부터 항의를 받은 후에 슬그머니 내린 카이스트 역시 석연찮기는 마찬가지다. 카이스트는 첫 보도가 나간 후 아무런 진상확인 작업도 하지 않다가 뒤늦게 보름 정도 지나서 인사위원회를 소집했으나 김 전 교수가 사표를 제출하자 곧바로 사태를 종결했다. 박상필 책임교수는 “초빙교수직을 확인할 연락처나 증명서가 있으면 달라고 했지만 본인이 사표를 제출한 마당에 더 조사를 진행하지는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허위약력 제출과 채용경위에 대한 아무런 진상조사 없이 사표 제출로 모든 문제를 덮기로 한 것이다.
이래저래 ‘김흥기 미스터리’는 외교부와 카이스트에 이르기까지 의혹만 눈덩이처럼 커진 채 피해자 격인 정부와 공공기관이 사기꾼의 눈치를 보는 웃지 못할 ‘소극’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단독]‘댓글 용역’ 김흥기, 장차관 동원해 ‘가짜 수료증’ 장사
▶“김흥기, 가짜 수료증 장사 한국경찰 수사 적극 협조”
<강진구 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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