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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마운드에 섰던 YS를 추억해 본다

백삼/이한백 2015. 11. 24. 09:50

일간스포츠 이상서]

“오바마 대통령은 어젯밤 CNN을 통해 생중계된 민주당 토론회만 시청하지 않고 야구 경기를 본 것 같다. 내 생각에는 물론 그가 리모콘을 쥐고 야구와 토론회와 채널을 왔다 갔다 하면서(little channel surfing), TV 앞에 앉아 있던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지난 달 14일 미국 백악관의 대변인인 조시 어니스트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당시 민주당의 대선 후보 TV토론회가 방송된 시간과 비슷하게 메이저리그 플레이오프 경기가 중계됐기 때문이다. 아다시피 시카고 출신인 오바마 대통령이 이런 빅매치를 지나칠리 만무했다. 실제로 오바마는토론회 일주일 전에도 트위터를 통해 “컵스팬 축하, 화이트삭스팬까지 응원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올린 바 있다. 대선 토론 언급은 없었다. 대통령의 야구 사랑을 보여준 일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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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사랑한 대통령은 미국에만 있지 않다. 우리나라 대통령들도 끈끈한 야구 사랑으로 유명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무현 등 역대 대통령들은 능숙한 폼으로 시구를 즐긴 바 있다. 특히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유달리 야구장을 많이 찾아 시구에 참여했고 경기를 관람한 것으로 유명했다. 김 전 대통령과 한국야구가 얽힌 추억을 반추해 봤다.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졸업했다. 경남고가 어떤 학교인가. 최동원, 이대호 등을 배출했고 전국대회에서 21번이나 우승한 야구 명문고 아닌가. 졸업을 하고도 그때 느낀 야구의 감동은 간직했던 걸까. 그는 신민당 총재 시절인 1979년에도 청룡기 고교야구 현장을 직접 찾아 대회에 출전한 모교를 응원하기도 했다. 자연스레 야구에 대한 관심이 각별해진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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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이 다른 전직 대통령과 가장 크게 다른 점 하나. 그는 단순한 야구 관람객이 아닌 ‘플레이어’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1954년 초선 의원 시절 서울 정동 배재학당에서 열린 여야 친선 야구 대회에 야당 대표로 출전해 포수를 맡는 등 그라운드에서 직접 활약하기도 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는 훗날 당시를 회고하며 "나는 캐처를 맡았고 관중들은 압도적으로 야당을 지지해줬다. 그러자 다음부터 여당에서 야구하자는 말을 안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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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93년 이후 야구와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1994년과 1995년에 연이어 KBO리그 한국시리즈 개막전에서 시구자로 나서는 등 야구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특히 1995년 4월 16일 잠실 개막전인 LG와 삼성전을 찾아 시구와 함께 선수단을 직접 독려하기도 했다. 그해 프로야구의 처음과 끝 모두 대통령이 있었던 셈이다.
야구장을 종종 찾으니 해프닝도 많이 생겼다. 1995년 시구를 마치고 관중석으로 돌아와 관람하던 김 전 대통령은 두 차례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구팬인 그였지만 당시의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1-1로 팽팽히 맞선 7회말, LG가 공격을 할 때였다. 삼성의 투수인 김태한이 1루 주자인 유지현을 의식한 나머지 보크를 범했던 것. 이어 나온 최한경 역시 같은 실수로 보크를 저질렀다. 결국, 1루 주자는 투수가 공을 던지지도 않았는데 2루로 진루하고 또 홈을 밟은 셈이다. 보기 드문 장면에 야구팬이라 자부했던 대통령마저 고개를 갸우뚱한 상황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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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야구인을 청와대로 초청해 따뜻한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1997년 당시의 최고 스타는 누가 뭐래도 ‘코리안 특급’ 박찬호였다.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올라선 뒤 고정 선발로 진입한 첫 해, 박찬호는 온 국민을 TV 앞으로 불러들였다. 그 해 4월 30일 첫 승을 올린데 이어, 8월 11일엔 빅리그 첫 완투승을 거두는 등 기량을 만개한 것이다. 최종 성적은 14승 8패 평균자책점 3.38. 누구도 한국인이 최고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박찬호가 탄생하기 전까진 말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 해 11월 귀국한 박찬호를 그의 부모님 등과 함께 초청해 따뜻히 격려했다. 그는 “박찬호는 올해 우리나라를 빛낸 가장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극찬하며 “그가 국민 모두가 기다리던 단비를 몰고 왔다”고 말했다. 오찬이 끝날 무렵, 김 전 대통령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박찬호에게 남겼다.“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갈 때를 생각해야 한다”고. 그 말을 들은 메이저 초년병인 박찬호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첫 승 당시 썼던 모자와 공에 사인을 담아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어쩌면, 그 말은 약 석달 뒤면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당신의 상황을 에둘러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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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야구계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민주당 총재 시절이던 1988년엔 유달리 야구장에선 난투극이 많이 발생됐다. 당시의 프로야구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지역 감정의 표출구였고, 억눌린 분노의 해방구였다. 이미 2년전 대구구장에서 발생한 해태구단 버스 방화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 프로야구였다. 1988년 5월 18일 인천도원구장에서 시작된 난투극은 다음 날 대전구장으로 번졌다. 빙그레(현 한화)와 해태(현 KIA)가 맞붙은 이날 경기에서 관중 200여명이 그라운드로 난입해 심판을 구타하고, 팬들끼리 난투극을 벌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관중사망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를 본 김영삼 전 대통령은 “프로야구 불상사가 많은 지역은 부산, 광주, 대구였는데, 이제는 사람이 죽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좋으나 프로야구가 지역 감정을 엄청나게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며 비판했다.

2011년 3월 28일 열린 프로야구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야구는 많은 이들을 흥분시키는 것 같다. 내 큰 딸도 (야구 경기를) 응원하러 부산까지 가기도 한다. 서른 살을 맞은 프로야구가 더욱 빛나기를 바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야구인들의 발전을 기원한다.” 그는 야구를 사랑했고, 야구는 그런 그에게 감동을 안겨 줬다. 인생이란 이름의 야구를 9회까지 끝마친 김 전 대통령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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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팀=이상서 기자cod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