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윌리 세일러(Willy Seiler, 1903~?)

백삼/이한백 2015. 10. 22. 10:27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서울의 건물과 산업 시설이 어느 정도 복구되자,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농사, 장사, 직장생활 등이다. 그런데 전쟁 후 도시에 사는 남자들이 취직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회사나 공장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낙네들이 머리에 함지를 이고 행상을 하거나 재래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이거나 작은 가게 터를 얻어 장사를 했다.

최근에는 백화점과 대형 할인점에 상권을 빼앗기고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재래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약 30여 년 동안 전국민의 수요를 충족시킬 정도로 우리나라 유통 경제에서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독일계 미국 화가 윌리 세일러(Willy Seiler)가 그린 〈빈틈없는 계산〉은 1950년대 우리나라 재래시장의 광경이 섬세하게 묘사된 작품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소금가게다. 소금은 우리 식생활에 필수적인 품목이기 때문에 5일장이나 재래시장에서 소금을 취급하던 사람들은 대개 많은 부를 축적한 부자들이었다. 그들은 축적한 자본으로 소금을 대량으로 사들여 박리다매로 팔았기 때문에, 영세한 상인들로서는 감히 경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소금장수들은 이런 독점적 위치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거나 제때 소금을 공급하지 않는 등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금반지를 낀 손에서 부유함이 묻어나는 아주머니는 주인인 듯, 장사는 일꾼들에게 맡기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며 짙은 초록색 전대에 손을 넣어 돈을 세고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종업원들의 모습에서는 당시 고달픈 삶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이발하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라 머리를 짧게 깎았고 장갑도 귀해서 맨 손으로 소금을 퍼내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애교머리를 하고 장을 보러 나온 새댁과 돈을 받는 종업원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당시의 빈부차이를 볼 수 있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낸 돈을 바라보는 다른 두 아주머니의 표정이 절묘하다. 아니, 이렇게 많은 지폐를 건네는 혹은 큰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는 새댁이 부러웠을 것이다. 당시 종업원들의 월급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전차비나 버스비를 아끼려고 웬만한 거리는 대개 걸어다녔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먹을거리를 사야만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삶의 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195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기쁨보다는 슬픈 일이 많았기에, 여인네들의 삶은 더욱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악착같은 장사〉 또한 윌리 세일러의 ‘한국 시리즈’ 13점 중 한 작품으로, 재래시장에서 치열하게 장사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다. 오른쪽 아주머니는 허리에 맨 포대기 끈으로 보아, 아기를 등에 업은 채 장사를 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5~6남매는 보통이고 많으면 7~8남매까지 있었으니, 식구들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여인네들의 삶은 고달팠다. 게다가 남자들이 할 만한 일자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아낙네들이 시장에 좌판이라도 벌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젖가슴을 드러낸 채 장사를 하는 아기엄마의 수심 가득한 표정이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렇게 젖가슴이 드러난 여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은 당시 가난한 우리나라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불순한 의도에 의해서 그려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리얼리즘의 실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윌리 세일러의 다른 한국 소재 작품을 보면, 우리나라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이 아주머니가 판에 담아 파는 작은 생선은,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밴댕이(디포리 또는 띠포리라고도 불린다)로 멸치의 한 종류다. 멸치는 행어 · 정어리 · 곤어리 · 운어리 등 네 종류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인데, 밴댕이는 곤어리의 일종으로 은빛이 돈다. 그림에서도 은빛을 느낄 수 있으니, 참으로 섬세한 묘사다. 밴댕이는 멸치보다 냄새가 강하지만 국물이 진해, 김치를 담그거나 김치찌개 국물을 내는 데 주로 사용된다.

옆의 아주머니는 1원짜리 지폐를 이 사이에 꽉 물고 있다. 정말 악착같이 돈을 벌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진다. 당시는 하루하루 돈을 벌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절이었고, 그래서 서민들은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돈을 벌었다. 미국인 화가의 작품이지만, 그가 남긴 우리나라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절박하고도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 전 서울의 인구는 170만 명이었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피난을 떠난 1951년의 정부 통계는 648,000명으로 43.8퍼센트가 감소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는 다시 100만 명을 넘어섰고, 1957년에는 167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다양한 차원의 인구 뒤섞임 현상이 일어나면서 서울 토박이의 비중이 급격히 줄었다. 1960년 서울 토박이의 비중은 43.5퍼센트로, 다른 도시들의 토박이 비율이 대략 65퍼센트 정도인 것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치다. 그만큼 서울로 이사오는 인구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로 유입되는 인구가 점점 많아지면서 복덕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동네 어귀에는 어김없이 복덕방 간판이 있었다. 모시적삼을 입은 동네 어르신들이 장기나 바둑을 두며 “한 수 물러라” “싫다”고 옥신각신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복덕방’이라고 쓰인 포렴(布簾)을 들치고 가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용도에 맞는 물건을 설명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앞장섰다. 그렇게 동네를 한바퀴 돌며 여러 집을 보여줬는데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그냥 가면, 헛품 팔았다고 입맛을 다시며 복덕방 앞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많은 사람이 ‘복덕방 할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쾌(家儈)’,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얼마 동안은 ‘집주릅’이라고 불렀다. ‘집 흥정 붙이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복덕방(福德房)’이라는 말은 생기복덕(生氣福德, 복과 덕을 가져다주는 곳)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복덕방이라는 단어가 처음 신문에 등장한 건 1900년 11월 1일자 〈황성신문〉 광고에서다. 당시 사진자료에는 복덕방 간판도 보인다. 집주릅이라는 단어는 이보다 빠른 1899년 신문에 등장한다. 이렇게 근대의 초입에 등장한 복덕방이 일제강점기에는 단순히 집만 소개하는 게 아니라 투기를 조장하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이태준이 1937년에 발표한 소설 《복덕방》에 당시의 투기바람이 잘 묘사되어 있다.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복덕방 주인은 구한말에 훈련원의 참위로 봉직했던 서 참위다. 안 초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사업 실패로 몰락해 서 참위의 복덕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 무용가로 유명한 딸이 있으나, 딸에게 짐이 되기 싫어 재기하려는 꿈을 안고 살아간다. 박 영감은 훈련원 시절 서 참위의 친구다. 재판소에 다니는 조카를 빌미로 대서업을 한다고 일어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는 재기를 꿈꾸던 안 초시에게 부동산 투자에 관한 정보를 일러준다. 안 초시는 딸이 마련해준 돈을 몽땅 부동산에 투자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새로운 항구가 건설된다든가, 땅값이 오를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박 영감에게 정보를 준 사람이 자신의 땅을 처분하기 위해 사기극을 벌인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충격을 받은 안 초시는 음독자살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에는 먹고사는 게 최우선 과제였으므로, 1950년대 복덕방은 투기를 부추길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복덕방은 집이나 방을 찾는 사람들의 안내자 역할에만 충실했다.

윌리 세일러의 〈휴식〉은 1950년대에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우리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집 마당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65퍼센트가 농촌에 살았다. 경운기 같은 농기구가 없던 시절이라 소를 이용해 쟁기질하고, 호미로 잡초를 맸다. 추수 때는 낫으로 벼를 베 지게로 운반했고, 낟알은 홀태로 털었으니, 손에서 일이 떠날 날이 없었다. 당시 농사는 그렇게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고, 추수가 끝난 농한기에도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힘든 농사였기에 부모들은 자식이 대를 이어 농사꾼이 되기를 원치 않았고, 조금만 형편이 되면 자식들을 서울로 올려보냈다. 일일이 사람 손이 필요한 시절이라, 시골에 있으면 공부보다는 농사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과 밭을 팔아서라도 서울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휴식〉에서 문간방은 비어 있다. 방문을 항아리와 갈퀴가 막고 있다.

쪼그리고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며 담배를 피우는 농사꾼의 얼굴에서 피곤함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빈 가슴이 클클해 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셨을 수도 있고, 호롱불 아래서 밤늦도록 새끼를 꽜을 수도 있다. 이런 농부의 삶에 대해 1990년대 시인 오봉옥은 이렇게 노래했다.

쪼그리고만 살았던 일평생
정녕 소원은 무엇입니까
허기진 배 찌꺼기나 드시고
자식새끼 배 부르는 거
자식놈 따습게 재우는 거요?

인젠 쬐까 있는 밭뙈기도 없이
어쩌자고 팔으셔야만 해놓고
두루두루 흙 한줌씩 살펴보고
흘리시는 눈물은 무엇입니까.
- 오봉옥, 〈농꾼은〉 부분

우리의 근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에도 자식들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쟁 중에도 천막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도 어머니들은 함지를 머리에 이고 행상을 했고, 아버지들은 열심히 농사를 짓거나 직장에 다녔으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집을 개조해 구멍가게를 차렸다. 누나언니들은 동생들 학비를 벌기 위해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에 들어가 밤늦게까지 일했고, 형오빠들도 막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기술과 장사를 배웠다. 누구 하나 예외없이 모두가 그렇게 근면하게 일하고 공부해 그 어려운 시기를 헤치고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온 몸으로 근대를 지나 현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윌리 세일러

윌리 세일러(Willy Seiler, 1903~?)
독일 출신 미국 화가로, 뮌헨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1928년부터 2년간 파리에서 공부한 후 45개국을 떠돌며 작품활동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20여 년간 일본에 거주하면서 주일 미군 사령부에 근무했고, 1956~1960년 세 번에 걸쳐 우리나라를 방문해 13점의 한국 소재 동판화를 남겼다. 워낙 구름처럼 떠돌던 인생이라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한국 시리즈’에는 재래시장 풍경뿐 아니라 〈낚시꾼 할아버지〉 〈마을 이장〉 〈한복 입은 미인〉 등 다양한 작품이 있는데, 이중 몇 점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구입해서 소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