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제국을 굴복시킨
소년과 뚱보
일본제국의 확장을 상징하는 '욱일승천기'
일본제국이 한 때 점령, 지배했던 지역들
일본항복의 직접적 계기가 된
1945년 8월 6일과 9일의 미군의 두 차례의 원폭투하!!
두 번 다 태평양의 '티니안 섬'에서 폭격기가 출격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우라늄 폭탄)
별명 'little Boy' (작은 소년)
에놀라 게이에 실리기 직전에 촬영한 장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에 출격한 에놀라게이 폭격기와
승무원들 중 일부 (가운데가 기장 폴 티베츠 대령)
히로시마 원폭투하에 출격한
'미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하늘을 나는 모습
원폭이 투하될 당시의 히로시마 시를 재현한 모형
오전 8시 15분 원폭투하
원폭 폭발음 듣기(26초)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AtSt5XZ7fq4
리틀 보이가 떨어진
당시 '히로시마 산업장려관' 건물,
원폭 투하 당시 건물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즉사했다.
현재는 '원폭 돔'이라 불린다.
히로시마에 원폭투하 후에 생긴 핵구름
원폭 투하 후 1개월 후의 히로시마 시
8월 6일 당일에 7만 8천명이 사망하였고,
1945년 말까지 모두 14만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히로시마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증언한 그림들
*원폭으로 입고 있던 모든 옷이 타버렸고,
온 몸은 빨갛게 익혀졌다.
강물위를 떠다니는 무수한 시체들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서 헤메는 어떤 가족
원폭으로 인해 사상당한 사람들
원폭투하 지점에서 2.3 킬로미터 떨어진
한 중학교 학생들이 사상당한 모습
원폭피해 사진들
피폭된 팔의 피부가 벗겨지는 모습,
원폭으로 벗겨진 피부는 다시 소생되지 않는다.
"
저는 폭발지점 800미터 근처에 있었어요..
B 선생(미군 폭격기) 소리를 들은 후였습니다.
저는 그 폭탄이 왜 공중에 떠도는지 궁금했어요.
경계 싸이렌 조차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엄청나게 강한 빛을 봤고,
저절로 얼굴을 감쌌습니다.
곧 얼굴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폭탄에 맞아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이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곧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난 후 보니
온통 어두웠고 전 무너진 벽돌더미에 깔렸습니다.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살려줘요! 물 좀 줘요!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습니다.
구조되었을 때,
저의 머리는 모조리 다 타고
얼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저는 왜 내 티셔츠가 모두 타서
내 팔에 걸려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티셔츠가 아니라
저의 피부껍질이었습니다.
완전히 지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물을 찾았고,
그 물을 마신 후 즉사 했습니다.
도시 전체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갈 곳이 전혀 없었어요.
"
피폭받아 괴로워하는 사람들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원폭관련 히로시마 관광안내도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출격해 원폭을 투하한
박스카 폭격기와 승무원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플루토늄 폭탄)
별명 'fat man'(뚱보)
오전 11시 2분 원폭투하
나가사키 원폭투하 동영상(약 2분)
https://www.youtube.com/watch?v=6l5jI4iO4-g
나가사키 원폭투하후에 발생한 버섯구름
이 사진은 대대적으로 전 세계의 언론을 장식했고,
이후 버섯구름은 원폭의 상징이 되었다.
원폭 투하 전후의 나가사키
투하 전-상, 투하 후-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당일에 약 5만명이 사망하였고,
1945년 말까지 모두 8만명이 사망하였다.
사진은 1945년 9월 2일,
미군함, 미주리 호에서 있었던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정식 항복조인식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뭇솔리니, 히틀러와는 달리
당시 일본점령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의 비호아래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던
일왕 히로히토 (1901-1989).
전시내각 총리였던 도죠 히데키는
최고의 전범으로 자신이 처벌받는데 불만을 품고,
'나는 천황폐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읍니다.'
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으나,
히로히토를 살리려는 맥아더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히로히토는 일본인 300만명을 포함,
약 2천만명의 아시아인을 죽게 한 장본인으로
반드시 사형당했어야 할
일본제국 제 1의 특급전범이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징용되어
연합군 포로 감시원으로 활동하다가
전후 재판으로 사형당한 한국인들만
수 십명임을 생각할 때,
그 당시 세계에 정의란 없었다.
1989년 1월,
일왕 히로히토가 88세로 죽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히로히토의 죽음을 애도하고,
조의를 표했는데,
'마땅히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자가
천수를 누리다가 죽으니,
참으로 유감이다.'
라고 의사를 표시한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1932년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를 척살하려 했으나,
실패한 이봉창 의사
만일 이 때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성공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1945년 3월 9일,
미군 폭격기의 소이탄 집중 공격받는 동경.
하루 밤새 10만명이 사망하고 도시는 초토화되었다.
이런 엄청난 피해를 입자,
일본 전쟁 수뇌부 일부에서는
종전을 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으나,
일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세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국국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히로히토의 전쟁강행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었고,
자존심이 아니라, 완고한 고집이었다.
그의 고집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분단되어야 했고,
300만명의 사람들이 더 희생되어야 했다.
K-방송, 역사를 바꾼 사건들(다큐)
히로시마 원폭투하(약 25분)
시청하기(아래 링크클릭)
https://www.youtube.com/watch?v=44er-WZP3Sk&feature=player_detail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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