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대한민국의 국보1호와 보물1호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백삼/이한백 2015. 3. 2. 15:23

일본총독부는 1933년 8월〈 조선보물 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을 제정, 남대문을 보물1호로, 동대문을 보물 2호로 지정한 바 있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을 탈취하려는 경쟁을 벌였다. 1592년 음 5월 3일,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온 두 장수 중 소서행장(小西行長)이 먼저 동대문을 돌파하여 한양으로 입성하였으며, 같은 날 가등청정(加藤淸正)은 길을 달리하여 남대문을 거쳐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러고서 남대문과 동대문을 자신들의 전승기념문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해 남대문을 보물1호로, 동대문을 보물 2호로 지정한 후 나머지 대문을 철거해 버렸다. 그런데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왕조의 궁궐도 아닌 남대문을 국보 1호로, 동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하였다. 일제가 만든 틀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보 1호는 참성단(塹城壇)이 되어야 한다.
참성단(塹城壇)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제천문화의 성지다. 지금으로부터 4298년전, 단군조선의 초대 단군왕검께서 재위 51년 무오(단기 51, BCE 2283)년에 운사 배달(倍達) 신하에게 명하여 장정 8천명을 동원하여 세운 제천단이다. 역사적 가치로 보나 문화사적 가치로 보나 남대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한민족 원형문화의 국가적 유산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보물 1호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어떤 책인가?  김부식 (金富軾.1075-1151)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철저하게 당唐나라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삼국사기의 서술 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이다.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我唐太宗(우리 당태종)”이라고 칭하였다.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帝將,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永輝)’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김부식은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묘청, 정지상 등이 고토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벌인 서경천도 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이 이것을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왜곡의 기본 원전이 되었다.

 

 

 

일연(一然, 1206~1289)의《삼국유사三國遺事》<고조선기古朝鮮記>를 보면 "고기(古記)"에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얘기하고 있다. 석유환국(昔有桓國), 석(昔)에 유환국(有桓國), 옛적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고기(古記)"를 일연(一然 1206∼1289)승려도 분명히 읽었다. 예를 들어 삼성기(三聖紀)라는 책은 세조실록에도 그 책 이름이 나온다. 민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일연은《삼국유사三國遺事》<고조선기古朝鮮記>에서 석유환국(昔有桓國) 옆에 써 붙인 주석에 “위제석야(謂帝釋也,불교의 제석을 이른다)”라고 임의로 설명을 붙여 환국(桓國)을 세운 환인천제(桓仁天帝)를 불교의 신神, 환인(桓因)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제석환인(帝釋桓因Sakra-Devanam Indra)을 줄여서 제석(帝釋) 또는 환인(桓因)이라 부른다. 제석(帝釋)은 인드라Indra라는 인도 신령을 일컫는다.

 


일제가 조선의 뿌리 역사를 제거하기 위해 만든 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왜곡에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이 바로 이마니시 류(금서룡)이다. <조선사> 편찬의 중심인물이기도 한, 이마니시 류는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보면, ‘51종 20여 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

 

일제는 강탈한 조선사 문헌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끝에 조선의 시원 역사를 말살 할 결정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쓴 <조선고사의 연구>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삼국유사]<고조선기古朝鮮記>의 석유환국(昔有桓國) 옆에 써 붙인 주석, “위제석야(謂帝釋也)”에 있었다.

 

 

[삼국유사]<고조선기古朝鮮記>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뜯어고친 것이다. 이로써 ‘옛적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인류 창세사의 건국 이야기를 ‘옛적에 환인(桓因)이 있었다’는 한낱 신화로 바꾸어 버렸다. 국(國)을 인(因)으로, 글자 하나를 변조함으로써 한민족 상고사의 첫 번째 나라인 환국(桓國)을 통째로 지워버린 것이다.

 

이마니시 류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국(國)자를 인(因)자로 바꿈으로써 환국(桓國)에서 뻗어나간 배달국과 고조선의 건국자도 허구의 인물로 부정되어 버렸다. 그러고서 배달국에 이어 단군왕검의 고조선(古朝鮮) 역사의 일웅일호(一熊一虎)를 이걸 실제 한 마리의 곰과 호랑이라고 사람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지금 모든 역사 교과서가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한민족의 7천 년 상고사가 송두리째 뿌리 뽑혀 버린 것이다. 삼성기(三聖紀)에는 웅호이족(熊虎二族),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라고 족호(族號)로서 얘기를 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위제석야(謂帝釋也(불교의 제석을 이른다)”라는 잘못된 주석에 의존하여 환국(桓國)을 신화의 역사로 부정한 것에 대해 이마니시 류는 ‘자신은 일연(一然,1206-1289)의 기록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일연을 내세워 자신의 한민족 시원 역사 부정에 대한 알리바이를 세운 그는, 1926년에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 새겨진 [삼국유사三國遺事]<경도제대 영인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소위 반도사관, 식민사관, 왜식사관을 날조해 낸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러한 사관에 따라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그들과 한목소리를 내는 이땅의 식민사학자들
일본인들은 1922년 12월 달에 ‘조선사편수회’ 즉,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1938년까지 본문만 35권이 되는『조선사(朝鮮史)』를 일본인들이 만든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 이병도는 今西龍(이마니시류)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등 공로자가 된다.

 

 

이병도의 화려한 약력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을 지냈고, 34년 진단학회(震 檀學會) 창립에 참여,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듬해 국사편찬위원, 56년 진단학회 이 사장, 60년 교육부장관 역임 등. 역사 날조에 앞장섰던 사람이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교육부장관까지 했으니 우리 역사가 해방 후에도 바로잡힐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역사를 배운 후학들은 도대체 어떤 역사를 배웠겠는가? 또 강단 주류학파로 일컬어지는 그들이 지금도 사학계를 주도하고 있다. 과거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는 이 식민사관의 ‘왜독倭毒’에서 아직도 전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
역사란 다름 아닌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지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문명 진화의 총체이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 역사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모르면 현재를 진단할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다., 지구촌의 정세를 훤히 꿰뚫어보는 국제정치의 대가라 해도, 인류의 원형 문화를 모르고서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명을 알 수도 준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 놓고서 성(姓)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지금 한국인은 제 나라 역사도 모르는 정신적 미아로 살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살려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된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했던 바로 그 다음해에 운초 계연수(桂延壽, 1864~ 1920) 선생이 그의 스승 해학 이기(李沂, 1848~1909)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스승의 명을 맡아가지고, 예로부터 민간에 비장되어 온,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 종의 책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환단고기桓檀古記』다.

 

신라 고승(高僧) 안함로(安含老,579~640)에서 조선조 이맥(李陌,1455~1528)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년 세월에 걸쳐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진 것이다. 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편집한 것이 아니다. 삼성기(三聖紀)라는 책은 세조실록에도 그 책 이름이 나온다.

 

 

계연수 선생이 쓴, 환단고기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를 보면 그 글들이 어디서 왔는지 출처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환단고기라는 책을 부정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후대에 조작된 책이 아니다. 이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독보적 가치는 무엇보다도 국통맥(國統脈)을 바로 세워주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 선생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찾아준 하나님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현재 남아 있는 우리역사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 고대사의 뿌리와 인류 창세역사의 원형을 동시에 밝혀주는 역사문화경전이 바로『 환단고기(桓檀古記)』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이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지키기 위해 뿌려 놓은 <환단고기>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환단고기』는 보물 1호가 되어야 마땅하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자격이 있는 1만년 인류사의 정통사서이다.

 

 

삼신오제(三神五帝)가 우리 민족의 창세 역사, 우리 민족의 문화 역사를 보는 근본 틀인데, 이걸 중국 사람들이 가져다가 삼황오제(三皇五帝)라고 했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삼황(三皇)은 가져가지 못한 것이다. 이게 동방족 역사의 원 뿌리기 때문에 오제(五帝)만 갖다가 오제(五帝) 역사로서 자기들의 과거 역사를 정리 했다. 우리는 지금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삼황(三皇)의 역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가가 100년 전에 중국을 알려면 상해를 가라. 그러나 그대가 5백년 전의 중국을 볼려면 북경을 보라. 자금성, 1천 년 전의 중국을 볼려면 서안, 장안을 보라. 그러나 5천년 전의 중국을 보려면 탁록을 가보라. 탁록이 황하문명의 원조인데 여기를 가보면 황제성이 있다. 황제헌원이 4,700년전에 다스렸던 그 성터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그런데 그옆에 가보면 바로 치우천蚩尤泉이 있다. 배달국 14대 환웅桓熊, 치우천황(蚩尤天王,BC2706~ BC2598)과 함께 전쟁을 했던, 그 치우蚩尤가 동방의 대황제다. 천자다. 치우(蚩尤)는 옛동방의 古天子라고 중국 사서 주석에 있다. 전쟁을 했던 그 유적지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우리가 환국과 배달, 단군조선에서 보면 단군조선이라는 나라를 삼한으로 다스렸다. 고조선이 진한, 마한, 번한인데 바로 진한眞韓의 수도가 하얼빈, 마한馬韓은 한반도의 평양, 그 다음 번한番韓은 안덕형이라고 대지진 났던 당산이었는데, 그래서 이 삼한의 삼경 균형이 무너지는 날 고조선이 패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게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도 나오고, 조선왕조 때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이 내용이 있다.

 

 

고조선이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서 다스렸다. 이게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다. 삼한으로 나라의 국가 영토 경계를 나누어가지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 삼한이 무너지면서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서 바로 경주에 진한, 가야의 번한, 익산의 마한, 이것이 나중에 바로 백제, 가야, 신라가 되었는데 지금은 남삼한(南三韓)만 아는 것이다. 남삼한(南三韓). 한강 이남의 이 작은 남삼한. 그런데 이 남삼한은 다 북삼한(北三韓)에서 내려왔다.

 

 

우리가 중국 문명을 중심으로 보면, 지금 황하 양자강 남부에서는 대략 한 8천년 전에 유물이 나오고 있다. 자산(磁山)문화가 8천년에서 7,500년. 앙소(仰韶)문화가 7천에서 한 5천년 전 신석기 유적이 나오고 있고, 하모도(河姆渡) 문화가 한 7천년 전. 중국은 이 마가빈(馬家濱)이 7천이고, 대계(大溪)문화가 거기도 7천년에서 5천년. 제일 오래된 자산문화가 한 8천년인데, 만리장성 북쪽은 본래는 중국 사람들도 그것은 동이족의 문화라고 했다. 동방문화. 자신들 문화하고는 문화 양식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