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청나라 금석문 학자들, 고려 금석문 연구를 위해 추사 김정희에게 고려사 책을 빌리다

백삼/이한백 2015. 2. 23. 09:59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1809년 사신으로 떠나는 부친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셋. 젊은 추사는 이때의 연행(燕行)에서 청나라 금석학의 대가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만나 새로운 학문에 눈뜬다. 옹방강은 추사에게 책과 글씨를 선물로 줬고, 두 아들인 옹수배(翁樹培·1764~1811)와 옹수곤(翁樹崑·1786~1815)을 불러 추사와 인사시켰다.

특히 막내아들 옹수곤은 추사와 동갑내기로 둘은 각별한 친구가 됐다. 옹수곤의 호는 '성원(星原)'. 그는 자신의 별호를 추사에서 한 글자 빌려 '성추(星秋)'라고 했다. 추사는 귀국 후에도 옹방강·옹수곤 부자와 편지로 교류를 이어갔고 청나라로 떠나는 조선의 학자들을 옹수곤에게 소개했다.

추사와 옹수곤을 비롯해 19세기 한·중 지식인들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고려사' 필사본이 영국에서 발견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지난해 실시한 '구한말 해외 반출 조선시대 전적 현황 조사 연구' 과정에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 웨이드 문고(Wade Collection)에 고려사 필사본 완질 139권 19책이 보관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사단의 허경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서가를 살피다 양장(洋裝) 제본에 'KAOLI SHIH'라고 표기된 19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허 교수는 "괘선지에 해서체로 또박또박 고려사 전체를 베껴 쓴 완질"이라고 했다. 웨이드 문고는 주청 영국 공사를 역임하면서 중국 고서를 전문적으로 수집한 토머스 웨이드(Thomas Francis Wade·1818~1895)가 기증한 도서. 중국 책 속에 그가 북경에서 수집했던 한국 고서가 섞여 들어간 것이다.

무엇보다 옹수곤과 장서가 고천리(顧千里·1766~1835) 등이 함께 읽은 책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책의 주인은 청대 대표적 금석문 학자인 유희해(劉喜海·1793~1852). 첫 권 고려사 서문인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에 유희해의 도장이 찍혀 있어 그의 장서였음을 알 수 있다.

'진고려사전'이 끝나는 부분에는 옹수곤이 적은 "1813년 12월부터 교열하면서 읽다가 목록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한다"는 문장이 있고, 권137 뒤에도 그가 적은 "여덟 상자나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 108일이나 걸렸다"는 글이 확인됐다. 이 두 편의 글에 각각 '수곤상관'(樹崑嘗觀)과 '성원상관'(星原嘗觀)이라는 도장을 찍어서 자신이 대조하며 읽었음을 밝혔다.

당시 옹수곤은 고려 시대 금석문 연구에 몰두해 있던 때라 조선 사신이 오갈 때마다 탑본(탁본)을 부탁하고, 이렇게 구한 탑본의 글자를 판독하고 고증하기 위해 '고려사'를 구해 열심히 대조해가며 읽었다. 허 교수는 "특히 '고려사' 완질은 구하기 힘들어 옹수곤은 추사나 정조의 부마이자 당대의 문장가인 홍현주, 문인 이광문 등에게 빠진 부분을 구해 달라고 편지로 부탁했다"며 "따라서 이 필사본은 청나라 금석학자들이 조선 금석문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지 보여주는 귀한 자료"라고 했다.

옹수곤은 불행히도 1815년 29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옹방강은 아들의 부음을 추사에게 보내는 1000여자 장찰(長札) 속에 알려왔다. 유홍준 명지대 명예교수는 저서 '완당 평전'에서 "(옹방강은) 자식에게 못 다한 정을 추사에게 내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추사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