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조선시대의 명문가문

백삼/이한백 2015. 2. 16. 12:39

 조선시대 명문가 (광산김씨,연안이씨,달성서씨,전주이씨,신안동김씨)

조선조의 5대 명문가를 꼽으라면
※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가문
※ 연안이씨 월사 이정구가문
※ 달성서씨 약봉 서성가문
※ 전주이씨 백강 이경여가문
※ 신안동김씨 청음 김상헌 가문으로 꼽는데 주저 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 가문은 한 성씨가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문형(文衡:대제학) 한 사람 배출도 어려운데 비하여 한가문에서 무려 6명~7명을
배출하였고 그것도 3세를 내려가며 연이어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들이며,
나머지 가족들은 최소 정2품(判書:장관) 이상을 역임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문형(대제학)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주무 장관으로서
당대의 유림과 학자를 대표하는 수장임으로 관직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직이며 청직으로
삼정승 육판서 전부를 배출한 것 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여겼다.

1.★ 광산김씨 (光山金氏)********************************************************

조선조에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고
5명의 정승과 7명의 문형, 4명의 청백리, 왕비 1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사계 김장생선생 가문의 경우는 아들 신독재 김집(金集)이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부친의 예학을 계승하고 부자가 문묘에 배향 되었다.
김반(金槃)은 귀봉 송익필의 문인으로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아들 6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광산김씨 가문을 가장 번창하게 하였다.

김반의 맏아들 김익렬(金益烈)의 증손자인 남파 김천택(金天澤)은
청구영언의 저자이며 둘째인 창주 김익희(滄洲 金益熙)는 병자호란 때
척화신(斥和臣)으로서 효종 때에 이조판서. 대제학에 올랐다.
영조 때 벽파로서 영의정에 올랐던 김상복(金相福)은 그의 현손이며
정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희(金憙)도 그의 후손이다.

세째아들인 김익겸(金益兼)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성을
사수하다가 자결하였으며 충정공(忠正公)의 시호를 받은 인물로
그의 자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배출, 사계집안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맏아들인 서석 김만기(瑞石 金萬基)는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로서 김수항의 천거로 대제학에 올랐고 경신대출척에 1등공신이 되었다.

둘째인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은 유복자로 태어나 현종6년 문과 장원하고 공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며 서포만필과 사씨남정기, 구운몽의 저자로 유명하다.

김만기의 둘째아들 김진규(金鎭圭)가 예조판서. 대제학에 올랐고
그의 아들 김양택(金陽澤)이 영의정과 대제학에 올라
무려 3세를 내리 문형을 배출하고 형제가 문형을 지낸 명실상부한
조선조 최대 명문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김만기의 맏아들인 김진구(金鎭龜)는 참찬에 올랐으며 그의 7세손인
김영수(金永壽)는 조선조 말 고종 때 이조판서. 대제학에 올랐고
김반의 네째 김익훈(金益勳)은 여섯째 김익경(金益炅:대사헌)과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남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일을 자행하였고
형조참판에 올랐다가 기사환국에 남인이 집권하자 죽임을 당했다.

그의 8세손에 김상현(金尙鉉)이 이조판서. 대제학에 올라 광산김씨 사계집안에서
무려 7명의 대제학과 형제 대제학, 3세 대제학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고 김익경의
후손에 김상휴(金相休), 김기만(金箕晩), 김기은(金箕殷)은 모두 이조판서에 올랐다.


2.★ 연안이씨(延安李氏)*********************************************************

조선조 8명의 정승과 7명의 대제학과 청백리 6명,문과급제자 250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연안이씨를 중흥시킨 사람은 연성부원군 이석형(李石亨)이다.

세종 때 문과에 장원하고 성종 때까지 무려 6대를 섬긴 명신이며
훈구파로서 정인지와 고려사와 치평요람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현손에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와 6세손 이귀(李貴)가 있어
연안이씨 가문을 명문의 위치로 올려 놓았다.

월사 이정구는 우리 역사상 한문학 대가로 손꼽는 학자로서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중기 4대문장가로 일컬어진다.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의 문인인 그는 선조 때 대제학을 지냈고
인조 때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백주 이명한(白洲 李明漢)도 인조 때 이조판서.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명한의 맏아들 청호 이일상(靑湖 李一相)이 효종 때 대제학에 올라 3세에 이은
문형을 배출하였다.


3.★ 달성서씨 (達城徐氏)*********************************************************

달성서씨는 조선조에 영의정 7명,
좌의정과 우의정 각각 한명씩
총 9명의 상신(相臣)을 배출하였고
대제학 6명, 왕비 1명으로서

정승의 배출은 전주이씨가 22명으로 가장 많고
동래정씨(東萊鄭氏)가 17명으로 그 다음이며 신안동김씨가 15명,
청송심씨(靑松沈氏)가 13명, 청주한씨(淸州韓氏)가 12명, 여흥민씨 (驪興閔氏)가 12명
파평윤씨(坡平尹氏)가 11명에 이어 남양홍씨(南陽洪氏)와 같이 제8위이다.

달성서씨의 대표적 인물은 사가정 서거정(四佳亭 徐居正)으로서
세종과 성종에 이르는 6대왕조를 섬긴 신하로서
45년간 6조의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성리학자로서, 한문학과 천문.지리.의약 등에까지 통달하였으며
경국대전,동국통감,대동여지승람,동문선,동인시화를 편찬하고 향약집성방을 국역하였다.

고려 성리학의 적통인 양촌 권근의 외손자이며 그의 종현손
약봉 서성이 달성서씨 가문을 명문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다.

약봉 서성은 율곡 이이와 귀봉 송익필의 문인으로 공조판서와
판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서인인 까닦에 인조반정을 계기로 그 일가는 전성기를 맞았다.
네아들 모두 출중하였고
특히 서경우(徐景雨)는 우상(右相)에 올랐으며
선조의 부마가 된 서경주(徐景주)의 가문이 가장 번성하였는데
문벌가로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손자 서문유(徐文裕)는 이조판서이고
서문중(徐文重)은 영의정,
문유의 아들 서종옥(徐宗玉)은 이조판서,
서종옥의 아들 서명선(徐命善)은 영의정,
서명응(徐命膺)은 대제학,
명응의 아들은 직제학,
손자 서명거 (徐有거)는 대제학에 올랐으며
병조참판 서문상(徐文尙)의 아들인
서종태(徐宗泰)는 영의정겸 대제학, 그의 두 아들인
서명균(徐命均)은 좌의정,
서명빈(徐命彬)은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명균의 아들 서지수(徐志修)는 영의정,
지수의 아들인 서유신(徐有臣)은 대제학, 그의 아들
서영보(徐榮輔)도 대제학,
서영보의 아들 서기순(徐箕淳) 또한 대제학에 올라 3세를 이어 문형을 배출하였고,

서경보(徐耕輔)는 이조판서에,
서긍보(徐兢輔)는 참판. 그의 아들
서정순(徐正淳)은 예조판서,
서당보(徐堂輔)는 영의정을 지냈다.

따라서 서종태- 서명균 - 서지수는 3세 상신을 지냈고,
영의정 서지수의 아들 서유신이 대제학에 올라
서유신 - 서영보 - 서기순이 3세로 연이은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서종태로부터 직계 5대 가족이 3세 상신에 3세 문형을 배출한 명문인 것이다.


4.★ 전주이씨 밀성군파 (백강 이경여 가문)**************************************

전주이씨는 왕족으로서
22명의 상신(相臣)과 7명의 대제학, 873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전주이씨 100여파 중에서 세종의 아들인 밀성군 이침(密城君 李琛)의 파가
6명의 정승과 3세 대제학을 배출하여 명문의 자리를 굳혔다.

그의 6세손인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輿) 가문에서
3세 대제학과 영의정 1명,좌의정 3명,우의정 2명을 배출,조선조 4대 명문으로 꼽혔다.

이경여는 인조조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서하 이민서(李敏敍) 는
우암 송시열 문인으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고,
민서의 아들 병산 이관명(屛山 李觀命)이 영조 때 대제학과 좌의정에 올랐으며
관명의 아들 노포 이휘지(老圃 李徽之)가 대제학과 우의정에 올랐다.


5.★ 신안동김씨 (壯洞金氏 淸陰 金尙憲家)***************************************

신안동김씨는 김방경 가문의 구안동김씨와 구분하여 장동김씨라고 한다.
청음 김상헌이 지금의 효자동 부근에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조말 세도가이기도 한 장동김씨는 금관자가 서말이라고 할 정도로 현관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다.
즉 정.종 2품이상 관료의 수가 그렇게 많았다는 것이다.
60년간 중앙권력을 쥐고 있었던 까닦에 집안이 전부 정.종 2품의 관직을 독점하였다.

장동김씨가 권력의 기반을 잡은 것은 광해조 때 도정을 지낸
김극효(金克孝)가 선조조 때 좌의정과 대제학을 역임한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의
사위가 되었고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柳自新)과 동서간이 됨으로 인하여 서서히
권력의 터를 다지게 되었다. 그의 아들인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이 정승에 오르면서중흥의 기반은 더욱 다져졌다.

특히 청음 김상헌이 두각을 나타냈는데
김상헌은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의 문인으로 서인(西人)으로서
청서(淸西)의 영수가 되었으며 ,
대제학을 거쳐 여러 판서를 지내고
병자호란을 당하여는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여 심양에 잡혀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를 남겨 더욱 유명해 졌다.
심양에서 풀려나 곧 좌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부자 대제학이 배출 되었고,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그리고 수십명의 판서가 쏟아져 나왔다.

손자 김수흥(金壽興)은 노론으로 숙종 때 좌의정에 올랐다가
경신대출척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진도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았다.
그의 동생인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은 60년 김씨세도의 주축을 이룬 장본인이다.
그는 현종조에 우암 송시열의 1차기년설을 지지하여
대제학.예조.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라 2차예송에서
남인의 기년설에 밀려 사임했으며, 숙종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에 올랐으나
남인의 탄핵으로 유배되어 경신대출척으로 영의정이 되었다가 기사환국으로
형인 김수흥과 사사되었다.

그의 아들 몽와 김창집(夢窩 金昌集)은 노론4대신의 한사람으로
부친 김수항이 사사되자 잠시 은거했다가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하자
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나
경종을 대신하여 왕세제인 영조를 대리청정케 하려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아
자신을 포함한 노론 사대신은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동생인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은 대제학.예조판서에 임명 되었으나
학문에만 전념했고 김창집의 현손
김조순의 여식이 순조의 왕비가 되어 김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다음해 죽자
더디어 김조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무렵 김조순(金祖淳)의 오촌 종숙인 김이익(金履翼)이 병조판서,
김이도(金履度: 좌의정 金履素의 아우)는 예조.형조판서에 올랐으며,
김달순(金達淳)은 우의정이며 김문순(金文淳)은 이조판서,
김희순(金羲淳:우의정 김상용의 7세손)은 형조.병조.이조판서에올랐으며
김조순의 조카뻘인 김교근(金敎根)은 병조.호조.형조판서를 거치며
조정의 병권과 상권과 인사권 등의 요직을 한 집안의 가족이 독차지 하였다.

풍양조씨와의 권력투쟁이 있었지만 김조순의 7촌 조카인 호위대장
김조근 (金祖根)의 여식이 헌종의 왕비로 책봉 되면서 김씨의 세도는 더욱 확고했다.
아들 김좌근(金左根)이 영의정, 손자 김병기는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김문근(金汶根)의 딸이 철종의 왕비가 되면서
김씨가문의 세도는 더 이상 막을 세력이 없었다.

김조순의 종질인 김홍근(金弘根)은 좌의정.
김응근(金應根)은 공조판서,
김흥근(金興根)은 영의정, 김응근의 아들 김병덕(金炳德)은 좌의정,
김병시(金炳始)는 영의정, 김수근(金洙根)은 이조판서,
그의 아들 김병국 (金炳國)은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은 대제학. 영의정을 지냈다.

김조순과 김조근과 김문근의 딸이 각각 왕비가 되었고
김수항과 그의 아들 김집이 父子 영의정을 지냈으며,
김수항과 그의 아들 깁창협이 父子 대제학을 지냈으며,
김흥근과 김홍근 형제, 그들의 조카 김병덕. 김병시 형제,
김병국과 김병학 형제가 모두 정승을 지냈으니
국가 권익을 독점한
풍산홍씨를 비롯하여 풍양조씨, 신안동김씨, 여흥민씨들의 외척세력은
조선조 말까지 그 세력을 이어갔고 국가 재정의 피폐와 권력의 부조리로 인하여
조선조 500년 왕조를 멸망케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이밖에 조선시대 3명 이상의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은************************

안동김씨(6명), 의령남씨 (6명), 덕수이씨(5명), 풍양조씨(4명), 안동권씨(3명),
남양홍씨 (3명), 여흥민씨 (3명), 경주이씨(3명), 연일정씨 (3명), 해평윤씨(3명),
양주조씨(3명), 고령신씨(3명), 청풍김씨(3명), 해주오씨(3명) 등이 있다.


(출처 : '조선조 5대 명문가' - 네이버 지식iN)

 

조선시대 명문 가문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을 빛내는 것이 유학생들의 꿈이었습니다.조선시대 명문가라고 하면 이런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고 정계에 진출한 이가 많은 가문을 말합니다.

생진과에 가장 많이 합격한 가문은 2.719명을 배출한 전주이씨입니다. 이어 파평윤씨 934명, 안동권씨 909명, 남양홍씨 833명, 청주한씨 768명, 밀양박씨 755명, 안동김씨 716명, 연안이씨 614명, 청송심씨 567명, 평산신씨 516명 순입니다.

합격생 순으로는 전주이씨,파평윤씨,안동권씨가 되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문과(대과)를 중시했는데, 문과 합격자 순으로 보면 전주이씨, 안동권씨, 청주한씨 순입니다. 그 숫자를 살펴보면 전주이씨 873명, 안동권씨 359명, 파평윤씨 331명, 남양홍씨 329명, 안동김씨 315명, 청주한씨 287명입니다.

조선시대에 학문과 인격을 아울러 갖춘 '벼슬의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홍문관 대제학을 7명씩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전주이씨,광산김씨,연안이씨 순입니다.

대제학을 3대로 내리 이어서 배출한 가문은 광산김씨, 달성서씨, 연안이씨 순입니다.광산김씨 문중은 향교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18현 가운데 김장생, 김집 부자를 배출했습니다.

3대 연속으로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은 연안이씨,달성서씨, 광산김씨,전주이씨 4 가문뿐입니다.

청백리를 많이 배출한 문중 순서는 전주이씨가 8명으로 가장 많고, 연안이씨가 7명, 남양홍씨·안동김씨·양천허씨·진주강씨·전의이씨·파평윤씨 등 6문중입니다.

 

 

 

********** 조선시대 최고 명문 종합적 평가 **********

 

<약칭> (문):문과급제자, (대):문형/대제학, (상):상신, (청):청백리, (궤):궤장 

 

 

1위 : 전주이씨 - (평점내역 : 총 39점) : 대9, 상10, 청10, 궤10

 

2위 : 연안이씨 - (평점내역 : 총 29점) : 문8, 대9, 상2, 청10

 

3위 : 안동김씨 - (평점내역 : 총 26점) : 문1, 대7, 상8, 청10

 

4위 : 남양홍씨 - (평점내역 : 총 23점) : 문2, 상2, 청10, 궤9

 

5위 : 전의이씨 - (평점내역 : 총 21점) : 문4, 청10, 궤7

 

6위 : 동래정씨 - (평점내역 : 총 18점) : 상9, 궤9

 

7위 : 광산김씨 - (평점내역 : 총 14점) : 대10, 청4

 

8위 : 파평윤씨 - (평점내역 : 총 14점) : 상4, 청10

 

9위-13위(공동/10점) : 광주이씨, 광주김씨, 달성서씨, 풍영조씨, 한산이씨

 

( 무과급제자는 자료제출 미비로 평가요소에서 제외됨)

 

그밖에 다음 순위로는 문화유씨, 연안김씨가 9점, 안동권씨, 의령남씨, 청송심씨 등이 7점을 얻었습니다. 이 순위는 본 답변에서 정한 기준에 의한 것이며, 전주이씨의 경우 왕족이란 점에서 당연히 1위를 차지한 점을 인정합니다. 

 

 

▶유명한 학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은 

 

안동권씨, 파평윤씨,연안이씨,광산김씨,달성서씨,반남박씨,은진송씨.남양홍씨 

 

▶상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은 

 

안동김씨, 청송심씨,동래정씨,파평윤씨,여흥민씨,연안이씨  

 

▶왕비를 많이 배출한 가문 

 

청주한씨,여흥민씨,파평윤씨,안동김씨.청송심씨,경주김씨,반남박씨.풍양조씨,청풍김씨,거창신씨  

 

▶문형을 많이 배출한 가문 

 

연안이씨, 광산김씨, 달성서씨, 연일정씨  

 

▶청백리를 많이 배출한 가문 

 

광산김씨, 안동김씨,연안이씨,달성서씨,의령남씨,덕수이씨 

 

▶당상관을 많이 배출한 가문 

 

반남박씨,남양홍씨,대구서씨,풍천임씨,안동김씨,동래정씨,기계유씨  

 

▶문과를 많이 배출한가문 

 

안동권씨, 파평윤씨,남양홍씨,밀양박씨,안동김씨,청주한씨,연안이씨,여흥민씨.진주강씨,경주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