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건대, 박정희는 왜 '빨갱이'가 됐을까? 비록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당시로선 수재들이 들어가던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문경에서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교사로 3년 가량 근무하였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일제하에선 만주군 장교로, 또 해방 후에는 육사를 나와 장교로 근무하면서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그다. 그런 그가 대체 왜 '빨갱이'가 됐을까?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샘이 없는 물이 없듯이 모든 일에는 시원(始原)이 있기 마련이다. 박정희가 '빨갱이'의 길로 들어선 데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대적 배경, 개인적 성격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다음 세 가지를 든다. 첫째 사범학교 시절에 목격한 '현준혁사건', 둘째 바로 위 친형 박상희의 죽음과 분노, 셋째 춘천 8연대-육사 근무 시절 좌익 군인들과의 교류 등이 그것이다. 그 하나하나씩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구사범 시절에 목격한 '현준혁 사건'
일제 당시 대구사범(5년제)은 서울의 경성사범, 평양의 평양사범과 함께 3대 사범학교로 꼽힌 명문이었다. 교사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이들은 한국인 학생들에게 모욕적 차별대우를 하였다. 그 와중에도 몇몇 한국인 교사들은 학생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고 그 영향으로 일부 학생들은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기도 했다. 그 후 몇몇 학생들은 이른바 '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는데 이는 모두 현준혁(玄俊爀, 1906~1945)의 지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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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32년 4월 1일 제4기생으로 대구 사범에 입학했다. 바로 그해 4월 현준혁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항일 동맹휴교를 주도했다. 1932년 11월 10일 자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대구지방법원에서 "학생에 적화 선전한 적색 3대 결사 사건, 오는 14일에 공판 개정, 피고 현준혁 등 25명"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른바 '현준혁사건'으로 현준혁은 6년간 복역하였고, 교직에서도 파면되었다. 출옥 후 그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재수감되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암살당했다.
박정희와 대구 사범 동기생인 언론인 황용주(전 부산일보 주필·부산문화방송 사장, 2001년 작고)는 99년 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가 펴낸 <격동기 지식인의 세 가지 삶의 모습>에서 "처음 좌파에 눈뜬 것은 대구 사범 재학시절에 발생한 '현준혁 사건'이 첫 계기였고, 이를 계기로 <공산당선언>, <자본론> 등의 서적을 '한 달 용돈을 다 털어서' 사서 읽곤 했다"고 증언했다. 좌파 지식인으로 불리는 황씨는 5·16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박정희를 적극 도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황씨는 대구 사범 재학 시절 일본 교토대 좌익교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가 쓴 <빈보모노가다리(貧乏物語)>(유물론과 맑스주의를 알기 쉽게 풀어쓴 해설서)를 읽고 감동받았다고 증언했다. 지난 97년 당시 분당 자택에서 가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황씨는 "당시 학생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황씨와 동급생인 박정희도 이 책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박정희 역시 이때 처음 '좌파'를 접한 셈이다.
다만 이때 박정희가 '현준혁 사건'을 통해 접한 '좌파'는 이념적 성향보다는 민족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 민족진영 내에는 좌파계열도 있었고 이들의 투쟁은 반제(反帝), 반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 좌파 경향은 하나의 사조(思潮)였고, 시대적 울분을 표출하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구 사범 '독서회사건' 연루자들은 모두 항일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박정희가 대통령 시절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좌파지식인' 친형 박상희의 죽음과 분노
박정희는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여러 형제 가운데서도 바로 위의 박상희(朴相熙, 1906~1946)를 유독 존경하고 따랐다. 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상희는 구미지역에서는 유지급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며, 일제하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 구미지국장, 1935년에는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비밀결사 단체인 '건국동맹'에도 가담하였다. 그의 딸 박영옥은 김종필(JP) 전 총리와 결혼해 그는 JP의 장인이기도 하다.
좌파 지식인이자 민족적 의기를 갖고 있었던 박상희는 당시 구미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8·15 해방 무렵 구미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박상희를 따랐던 송재욱의 증언에 따르면, 박상희는 구미 선산경찰서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 돼 있다가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한다. 해방 이튿날 박상희는 마을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통운회사 건물을 인수하여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 간판을 내걸고는 당시 구미보통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무장해제도 지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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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에서 2기생으로 한창 훈련을 받고 있을 무렵인 1946년 9월 말 대구에서 좌익들의 주동으로 대규모 파업사태가 발생했다. 10월 1일, 이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군중데모가 발생하자 경찰은 총을 쏘며 맞섰고 성난 군중은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폭동'으로 발전했는데 이 사건이 이른바 대구 10·1항쟁이다. '폭동'은 이후 경북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구미에서도 10월 3일 2000명가량의 군중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불범 감금하였으며, 경찰관 및 관리들의 집 86채를 박살냈다. (미군 방첩대 보고 참조)
구미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박상희는 군중을 지휘하여 선산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점령하고는 '구미 좌익정권'을 세웠다. 그리고는 구미면장을 비롯해 의용소방대장, 이승만계 독립촉성회 간부 등 관내의 우익 유지들을 붙잡아 들였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는 박상희의 지인들이어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오히려 박상희는 구미 경찰관들을 피신시켜 주었는데, 구미사람들은 박상희가 덕분에 유혈사태가 빚어지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다만, 박상희가 '구미폭동'을 기획했는지, 아니면 사건 수습 과정에서 저절로 지도자가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런 박상희가 경찰관 총에 맞아 죽은 건 다분히 '우연'이었다는 주장이 정설이다. '구미 폭동' 이틀 뒤인 10월 5일 새벽, 대구에 파견되었던 충청도 경찰 병력이 구미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도중에 경찰관들이 무참하게 학살된 것을 목격하고는 몹시 흥분된 상태였다. 이들이 총을 쏘며 구미로 들어오자 경찰서를 지키던 폭도들은 달아났고 박상희도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그러자 하루 전에 석방된 백철상 서장이 그에게 "자네는 우리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니까 우리가 보증을 서 겠네"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경찰이 총을 쏘며 경찰서로 진입하자 박상희는 경찰서 인근 논두렁으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서장실로 밀려든 경찰관들은 박상희를 '좌익 폭도'로 오인하고 그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포를 들고 황급히 뛰어가 보니 박상희의 가슴과 배에서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박상희의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졌다. 평소 그의 명망을 생각하면 문상객이 줄을 이을 법도 했지만, 그가 경찰관 총에 맞아 죽은 탓에 문상 오기를 꺼린 사람들이 많아 장례식은 쓸쓸한 가운데 치러졌다.
육사에서 훈련 중이던 박정희는 형의 피살 소식을 접했으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그 며칠 뒤 조용히 다녀갔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한 측근에게 "형이 피살된 사정을 알아보려고 장교 복장으로 고향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숙군 때 김창룡으로부터 그 점을 추궁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가장 따르고 존경했던 형 박상희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또 이 일로 박정희는 형을 죽인 경찰과 그 배후인 미군에 대해 분노와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또 반체제적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춘천 8연대-육사 근무 시절 좌익 군인들과의 교류
1946년 말 육사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가 처음 배치받은 곳은 춘천 8연대(연대장 원용덕 대령)였다. 그런데 이곳 8연대는 당시 '좌익 소굴'이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 군인이 많았다. 박정희와 신경군관학교 2기 동기생인 이상진(8연대 부연대장) 소령은 연대 내 총책이었는데 박정희는 이 이상진과 자주 어울리면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박상희의 친구이자 당시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었던 이재복이 박정희에게 접근해 남로당 가입을 권유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8연대에서 9개월간 근무한 박정희는 중위를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해 그해(1947년) 9월 27일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제1중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육사에는 좌익 군인이 더 많았다. 제1중대 2구대장 황택림 중위, 제2중대장 강창선 대위, 제2중대 2구대장 김학림 대위 등이 그들인데 모두 박정희와 친한 사이였다. 김학림은 3기 때부터, 강창선은 4기 때부터 육사에서 생도들을 대상으로 포섭활동을 벌였는데 '여순사건'에 가담한 홍순석과 김지회, 동해안 일대의 좌익 총책 강문영 등이 모두 3기생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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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정무관으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핸더슨이 63년 초에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남로당 조지부장 이중업(李重業)이 군부 내 인사들을 '접촉'하면서 박정희를 만난 것으로 나와 있다.
핸더슨은 이 문건에서 이중업이 박정희를 '접촉'한 시기를 박정희가 중국서 귀국한 1946년 5월 직후로 보고 있으며, 그 후 박정희는 춘천 8연대 근무 종료시점인 1946년 12월부터 1947년 2월 사이에 육사 제1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사관생도들을 포섭하는데 열중했던 것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3기생은 47년 3, 4월에 졸업함)
그 무렵 박정희 주변에는 좌익성향의 일본 육사 및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이 많았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는 오일균(일본육사 61기), 김종석(56기), 조병건(60기), 김학림(60기) 등,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는 최남근(봉천 6기), 이상진(신경 2기), 이병주(신경 2기) 등이 그들이었는데 대개 숙군 때 처형되었다. 친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미 '왼쪽'으로 기울어 있던 그를 공산당 조직으로 이끈 것은 친형 친구들(이재복과 황태성)과 만군·일본군 출신 좌익 인맥이었다. 급기야 박정희는 1948년 11월 특무대에 체포됐고, 군사재판에 회부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현역 언론인 시절 박정희의 삶을 다방면으로 취재했던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씨는 박정희의 전반부를 다룬 <박정희-불만과 불운의 세월>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가게 된 데는 그의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대구사범 재학 시절,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만군 장교 시절, 그리고 해방 뒤인 청년장교 시절에 걸쳐 일관되게 발견되는 박정희의 성격은 현실에의 불만, 기성질서에의 반항, 외세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한 박정희에게 남로당은 하나의 유혹이었다. 진보적 성향, 독립운동의 전통, 그리고 반외세를 상징하고 있던 남로당에 들어간 것은 박정희의 사상적 표현이라기보다는 그의 기질에 맞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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