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때문에 박정희가 살아났다"…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5> 경제 개발, 첫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서어리 기자 2014.12.13 17:31:29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0∼1970년대에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도약한다.
서중석 : 박정희 집권 18년간 한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했다.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변신했고, 배고픔도 해결됐다. 또 경공업 국가에서 중화학 공업 국가로 바뀌었다. 1971년에 37.5퍼센트였던 중화학 공업 비율이 1981년엔 51.1퍼센트가 되면서 고도 산업 국가가 됐다. 이 시기에 포항종합제철과 거대한 중화학 공장들이 들어서고 고속도로도 뚫렸다.
또 대단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2∼1966년에는 연평균 7.9퍼센트를 기록했는데, (그다음 시기에 비하면) 그리 높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7∼1971년에는 연평균 9.7퍼센트라는 아주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제조업 성장률이 연평균 21.5퍼센트나 됐다.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72∼1976년에도 9.2퍼센트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성장을 했다.
그러나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77∼1981년에는 5.8퍼센트라는 상당히 저조한 성장을 했다. 유신 체제 말기에 경제가 아주 나빠져서 1980년에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2년 이후 28년 만에 처음으로 규모가 큰 마이너스 성장을 한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1960∼1970년대에는 무엇보다도 수출 신장이 그야말로 눈부셨다. 눈부시다는 말이 제일 적절할 것이다. 1962년에 5400만 달러를 수출한 나라가 1970년에는 그 10배가 넘는 8억3500만 달러어치나 수출하게 된다. 1977년에는 다시 그 10배가 넘는 1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 정말 경이적인 수출 신장이었다. 1962년에서 1980년까지 한국은 국민총생산(GNP) 연평균 성장률이 8.9퍼센트였고 수출 신장률은 40.7퍼센트였다. 전 세계에서 GNP 성장률이 이렇게 높은 나라는 대만을 빼고는 없었다. 대만과는 어느 시기를 갖고 잡느냐에 따라 1, 2위를 다투게 됐다.
라디오만 하더라도 1965년에 125만 대였는데 1980년에는 950만 대를 소유하게 됐다. 텔레비전은 1964년에는 3만 대 정도였는데 1975년에 180만 대나 됐다. 이때는 흑백텔레비전이었지만, 어쨌건 굉장히 늘어났다. 1980년대에는 690만 대를 기록해 가구당 흑백텔레비전 한 대씩은 갖게 될 정도로 생활도 많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비약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경제 발전은 박정희 대통령 덕분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이뤄진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변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에 차이가 많은 것 같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평이한 상식 아닌가. 그런데 해방 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이뤄진 것처럼 여기는 쏠림 현상 같은 것이 많이 보인다.
국내외의 여러 조건을 검토해보면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에 경제 발전이 크게 안 됐다면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박정희가 대단한 경제 발전을 하게 만들었다', '박정희에 의해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 이런 생각을 1960~1970년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아주 어렵다.
박정희 아니었으면 발전 못했다? 고도성장 없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그건 여러 자료로 입증할 수 있는데,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선거 아니겠나. 1963년 대통령 선거는 지금까지 있었던 대선 중에서 당선자와 차점자의 차이가 가장 적은, 15만여 표 차이밖에 안 난 선거라고들 한다. 서울, 경기도 일대에서 박정희 후보 표가 너무나 적게 나왔다. 그건 5.16쿠데타 세력의 실정, 경제적 무능에 대한 강한 심판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963년에 우리 경제가 참 나빴다. 5.16쿠데타 이후 한 번도 경제가 전망을 보인 적이 없었고, 1963년까지는 좋아질 수 있는 무언가도 없었다.
1963년과 달리 1967년 대선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큰 차이로 이겼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사실은 경상도 몰표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서울,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남북도에서는 전부 윤보선 후보가 이겼다. 1966년부터 우리 경제가 좋아지지 않나. 1967년은 그다음 해인데, 서쪽 지방에 사는 사람들, 경기도부터 전라남도에 이르는 이 지역 사람들이 '경제가 박정희 덕에 좋아졌다'고 생각했으면 박정희 후보를 많이 찍었을 것이라고 난 본다. 그렇지 않았으니 그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니겠느냐고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나.
1971년 선거를 보면 정말 백중지세여서 중앙정보부가 바짝 긴장하고 박정희 후보한테 특별한 공약을 하도록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김대중 후보가 졌지만, 이건 그야말로 경상도 몰표가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었다. 유권자 수준이 제일 높다고들 이야기하고 지역 색깔이 상대적으로 약한 서울에서는 압도적으로 김대중 표가 많이 나왔다. 그만큼 박정희 후보에 대한 불신이 컸다는 걸 이야기한다. 난 1971년 선거에서도, 심지어 경상도에서조차 박정희 후보가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몰표를 던진 것이지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를 잘했다. 경제 대통령을 뽑자', 그렇게 해서 많은 표를 던진 건 아니라고 본다. 아울러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뚫리고 포항종합제철 기공식을 하고 그러면서, 그다음 해 선거를 앞두고 화려한 경제 활동이 있지 않았나. 다 선거와 관련이 있다면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사실 경제 성장률이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높았지만) 1970년, 1971년에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리고 1969년에 83개의 대표적인 차관 업체 중 45퍼센트가 부실기업이라고 정부가 발표해버렸다. 차관 업체의 절반 정도가 부실 업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회자된 얘기가 "기업은 빚더미에 올라 안고 기업주는 잘산다", 이것이었다. 돈을 빼돌렸다는 얘기다. 그런 이야기가 많이 돌았다. 이 시기에 김대중 후보는 부정부패를 막 공격하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아주 강렬하게 짚었다. 그것에 대한 호응도가 컸던 것이다. 그 당시 못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집이 없는 사람도 많아서 1970년 통계로 도시에서 무주택자가 48.5퍼센트였다. 유주택자 중에서도 제대로 된 집, 집다운 집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지 않았나. 하여튼 이 당시 유권자들이 성장의 혜택을 피부로 느끼면서 경제가 잘돼간다는 생각을 안 한 게 분명하다.
프레시안 : 1971년 대선에서 중앙정보부가 특별한 공약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후보가 "한 번 더 신임해준다면 후계 인물을 육성하겠다"고 한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당시 김대중 후보가 이번에도 박정희 후보가 승리하면 영구 집권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경고하자, 박정희 후보는 대통령직을 3번만 수행하고 물러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이듬해(1972년)에 박 대통령은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공약을 스스로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린다.
서중석 : 그렇다. 그것이다. 그 후 유신 시대는 그야말로 박정희 1인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총력전 홍보 시기라고 난 본다. 홍보를 참 많이 했다. 유신 시대에 이렇게 대단한 발전이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 당시 TV가 많이 보급되지 않나. 많은 사람이 일하는 시간을 빼놓고는 대부분 TV 앞에 앉아 있던 때다. 그만큼 TV 위력이 컸던 시기인데,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홍보를 많이 해가면서 경제 발전이 엄청나게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유신 제2기로 들어가는 1978년 12월 12일 총선, 유신 체제는 대통령이건 지역구 국회의원이건 임기가 6년이었는데, 어쨌건 이 선거를 보면 민주공화당이 불과 31.7퍼센트밖에 득표를 못하면서 제1야당(신민당)한테도 1퍼센트포인트 넘게 뒤졌다. 그뿐만 아니라, 더 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던 제2야당(민주통일당) 표까지 합치면 야당에 8.5퍼센트포인트나 뒤졌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역구 국회의원과 달리, 박정희 대통령이 지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들의 임기는 3년이었다. '편집자')
세상에 어떻게 유신 체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도 하지만, 그건 '지금 경제 문제 같은 것이 심각하다.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심지어 농민들조차 노풍 피해가 컸기 때문에 박 정권을 그렇게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풍은 통일벼 계열의 신품종으로 1977년에 탄생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신품종을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그러나 1978년 전염병으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노풍 피해가 발생했다. 그해에 78만 명이 농촌을 떠나야 했을 정도로 농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정부의 성급한 농정이 빚은 참사였다. '편집자')
이런 엄청난 서민 항쟁, 시민 항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경제가 전반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다른 정치적인 것은 하나의 계기가 됐을 뿐이다. 그러니까 1978년 12.12선거 때도 그렇고 1979년을 봐도 이 시기에 경제가 참 잘못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하지만, 일부 연구자는 김재규 때문에 박정희가 살아났다고도 이야기하지 않나. 박정희 대통령이 그 시기에 죽었기 때문에 박 정권 말기에 얼마나 경제가 나빴는가를 제대로 인식할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사람들이 박정희의 죽음에 통곡하게 돼버리는 식으로 전개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0.26과 박정희 부활의 역설
프레시안 : 김재규의 총탄이 박정희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담고 있다. 그런데 장군 출신 대통령들의 정권이 막을 내린 후, 군사 독재의 문을 연 박정희가 되살아나는 일이 벌어진다.
서중석 : 박정희가 인기를 얻는 건 죽은 다음이다. 그것도 1990년대 이후, 더 직접적으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체포, 구속되던 1995년 말경부터인 것 같다. 1995년경부터 박정희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나타나고, 특히 그 2년 후(1997년)에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를 맞으면서 절정에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권 시기에 가장 설움을 받았고 어렵게 살았던 서민이나 빈곤층이 IMF 위기 이후에 특히 박정희를 지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난 강만길 선생님하고 이야기할 때 이따금 농담 비슷한 것을 하는데, "어떻게 선생님 학교에서 60∼70퍼센트의 학생이 박 아무개를 지지하는 현상이 생길 수 있었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바로 그 시기였는데 여론 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 선생님은 그냥 웃기만 하셨는데, 하여튼 이 시기 여론 조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 학생들이 또 대부분 이민을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뭘 말하는 건가. 그 당시 젊은 층이건 나이 먹은 층이건 한국에 사는 그 자체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쌓이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박정희에 대한 복고주의적 인기가 엄청난 기세로 2000년대 초반까지 나타난다.
프레시안 : IMF 구제금융 위기는 박정희 정권 시기에 기본 틀이 만들어진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IMF 위기가 박정희 신화를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건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다. 박정희 신화는 오늘날에도 널리 퍼져 있다.
서중석 : 나는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이런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 심지어 '박 대통령이 없었다면 경제 발전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현상에 문제가 많다고 본다. 이 자리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건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 발전에서 박정희가 맡은 역할은 부분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이 시기에 경제가 발전하게 돼 있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성장 제일주의, 과도한 해외 의존, 재벌 중심의 경제 편성 같은 심각한 문제점을 박정희 정권 시기에 갖고 있었다는 점을 무시해선 안 된다. 그것들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이 돼서 한국 경제를 잘못 가게 하지 않나.
그리고 1950년대 초 박정희가 이용문(이건개 전 의원의 아버지) 장군하고 같이 품고 있던 군부 쿠데타 구상을 실행에 옮기고 그게 성공해 정권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 시기에 경제 발전이 이뤄졌을까? 이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시기에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다고 본다. 박정희 식으로 경제 발전이 이뤄질 수 없었던 시기다. 또 1960∼1970년대라 하더라도 만약 박정희 같은 사람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가서 정권을 잡았다고 하면 어땠을까? 당시 이 지역의 권력자들 중엔 군부 출신이 많지 않았나. 박정희 역시 그런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1960∼1970년대 한국(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박정희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전도 안 됐고, 같은 시기라 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정권을 잡았다면 (1960∼1970년대 한국인들이 이룩한 만큼의 경제 성장은) 안 되게 돼 있었다. 이런 점을 명료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60∼1970년대 한국이었기에 박정희는 성공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 :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해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 눈감고 어느 한 사람의 공으로 몰아가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모든 것이 "김일성 수령" 혹은 "김정일 장군"의 은덕이라고 강변하는 북한 같은 곳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서중석 :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경제 발전을 하지만, 아무도 한 개인 때문에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만은 한국과 함께 이 시기에 기린아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대단한 경제 발전을 했다. 그런데 2.28사건 50주년이던 1997년에 대만에 갔더니, 장개석(장제스)에 대한 평이 보통 나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인물로, 역사에서 이젠 떠나보내야 할 인물로 여기고 있더라. 그런데 그 무렵 한국에서는 막 박정희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하고 너무 차이가 나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2.28사건은 194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권이 수만 명의 시민을 학살한 사건으로, 대만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편집자')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과거사 문제 때문에 스페인에 갔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하게 만든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묘지에도 가고 조촐하게 만들어놓은 프랑코 기념관에도 가고 그랬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코 시대를 악몽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더라. 경제 발전이 많이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그런 시대가 와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프랑코의 딸, 나이 먹은 분이었는데, 이분이 아버지에 대해 '그 영혼이 안식하기를 바란다. 내가 죽을 때까지 바라는 건 그것이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봤다. 그러니까 '프랑코 시대는 영원히 가야 한다. 프랑코는 그렇게 기억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이런 분위기였다. 그런데 박정희라는 분이 인격적으로나 성실성에서나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능력에서 장개석·장경국(장징궈) 부자, 프랑코 총통 같은 사람보다 낫다고 볼 수 있나? 스페인에서 이런저런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프레시안 :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후반에 다시 도약한다. 그런데 박정희 신화가 만연한 것과 달리 전두환 신화는 접하기 어렵다.
서중석 : 사실 한국의 경우도 경제 성장만 갖고 이야기한다면 전두환 정권의 어떤 시기에 더 경제 성장이 이뤄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전두환 정권의 어느 시기를 갖고 따지느냐가 논란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어느 시기에 낸 통계인지에 따라 우리나라 통계는 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하여튼 2007년에 나온 자료로 따지면 전두환이 집권하고 있던 1983∼1987년 사이에 연평균 9.5퍼센트 성장률을 기록해 1968∼1972년, 그러니까 박정희 집권기 중 성장률이 가장 좋은 편에 들어가는 시기에 기록한 연평균 9.3퍼센트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아무도 전두환이 잘나서, 훌륭해서 이렇게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전두환 집권 초기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유산 때문에도 굉장히 고생하지 않았나. 1980∼1981년에 참 어려웠다. 1982년부터 경제가 다시 살아나는 건데, 어쨌든 아무도 전두환이 잘났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도 박정희와 형평성을 따질 때 너무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더군다나 1986∼1988년에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 발전을 했다고 이야기하지 않나. 의식주 생활 전반이 엄청난 변화를 하는 건 오히려 이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고기를 많이 먹게 된 것이라든가 아파트가 보편화하고 좋아진다든가 가정용 연료가 가스 같은 걸로 일반화돼 간다든가 하는 것이 다 이 무렵에 일어난다. 승용차도 1970년대까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르며 전 세계에 한국이 많이 알려지는 1986∼1988년을 거쳐 1990년대에 가서야 한국이 190만 대 정도의 승용차를 가진 나라로 변한 것으로 돼 있다. 그 후 승용차가 엄청나게 늘어나지 않나. 다시 말하면, 한국에서 또 하나의 급격한 변화는 1986∼1988년에 일어난다. 이와 관련해 <전두환 육성 증언>이라는 책에서 전두환은 이렇게 경제 발전을 많이 했으니 거대한 시위가 안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도 하고 그러는데, 1987년 6월항쟁은 일어났다. 거듭 말하지만, 1986∼1988년 그 호경기에 대해서도 전두환 공로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적으로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현상이 일어나는데, 전 세계에서 3저 현상으로 제일 덕을 많이 본 나라가 한국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한국은 에너지의 거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차관 망국론이라는 게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등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차관 때문에 망할 것이다. 빚을 너무 많이 얻어 쓰고 있다'는 우려가 많았는데, 상환해야 할 차관이 저이자하고 저달러 때문에 확 줄어버렸다. 한두 해만 그런 게 아니라 수년간 그랬다. 누가 잘하고 잘못한 것과 상관없이 이런 것들 때문에 한국 경제가 새롭게 엄청난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전두환 공로라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점도 생각하면서 박정희 시기를 들여다보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는가.
자본주의 황금기와 박정희, 3저 호황과 전두환
프레시안 : 1960∼1970년대 세계 경제 상황도 한국에 유리했다.
서중석 : 구해근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1960년대경부터 1970년대 초반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상승 주기를 탔다. 중심부의 자본가들이 투자에 열정적이었고 유럽 자본을 쉽게 다른 지역에서 공여 받을 수 있었고 이자율도 이 시기에는 낮았다. 그뿐만 아니라 제3세계 공산품에 대한 무역 장벽도 별로 없었고 한국을 추격하는 태국 같은 개발도상국이 이 당시에는 추격할 힘이 없어 별로 추격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만, 한국 등 네 마리 용만 앞장서가는 유리한 점을 이 시기에 갖고 있었다."
박정희 집권 18년 시기는 인류 역사상 세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부터 전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생산력 증강 시대를 맞이한다. 앙드레 모루아가 쓴 <미국사>를 보면, 난 믿기지 않는데 참 놀라운 기술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1940년대 4∼5년 동안 이뤄진 생산력 발전이 그 이전 100년간 미국이 발전한 것과 맞먹을 정도라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세계 경제의 3분의 1 이상을 미국이 장악했다고 할 정도이지 않았나.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이, 또 프랑스가, 조금 있으면 유럽의 다른 몇 나라가 무서운 속도로 경제 발전을 한다. 일본은 한국전쟁이 나면서 순식간에 경제 발전으로 들어간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이런 데에서 경제 발전이 참 무섭게 일어난다. 이런 지역에서는 인류 역사상 찾기 어려운 대단한 경제 번영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국내에도 있었다.
서중석 : 원래 한국, 일본, 대만, 중국은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때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전철환 교수가 그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전 교수는 근면하고 노력하는 민족성,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두뇌 활동, 그리고 축적과 성취욕이 강한 상향 의식 등을 한국의 잠재력으로 지적했다. 그런 것에 더해 나는 한국인이 아주 진취적이고 저돌적인 순발력도 대단하다고 본다. 이런 면이 강한데, 이것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잘 먹혀들 수 있었던 여건에 한국이 놓여 있었다는 점을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축적된, 역사의 힘이라고 해도 좋고 역사적 역량이라고 해도 좋은데 바로 그것을 한국은 갖고 있었다. 한국만큼 독립 운동, 민주화 운동을 장기간에 걸쳐 진행한 나라가 지구상에 없다. 1910년 나라를 뺏긴 그 순간부터 1945년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한 해도 쉬지 않고 국내에서건 이역만리에서건 독립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나. 민주화 운동도 1960년 4월혁명 때부터 30여 년이나 계속된다. 이런 것도 그런 역사적 역량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유럽이라든가 북미권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듯이 한국, 일본, 대만, 중국도 역사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역사적 역량, 역사의 힘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국내외의 좋은 여건을 맞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아주 중시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해방 후 근면하고 성취욕이 강한 그리고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한글세대가 방대하게 축적됐다. 그야말로 엄청난 산업예비군이 1945년부터 1950∼1960년대에 걸쳐 형성됐다.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런 방대한 산업예비군이 해외 자본과 결합한 것이 한국 경제 발전의 기본적인 힘으로 작용했고, 그것에 여러 요인이 작용하면서 1960년대 후반기부터 경제 발전이 이뤄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참 운이 좋은 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앞으로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에 경제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던 국내외 조건을 두루 살펴봄과 동시에 박정희의 경제 정책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가를 다각도로 살펴보려 한다. 그와 함께 박정희 집권 시기의 경제 발전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대만과 한국의 경제 발전의 성격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대만과 한국은 역사, 문화면에서 유사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또 두 나라 다 1950년대에 지독하게 못살았다. 물론 차이점도 있었다. 대만은 1차 산업에서 수출할 게 많았다. 그 반면에 미국 원조는 우리가 대만보다 월등 많이 받았다. 또 대만은 베트남전쟁 특수라는 게 약했다. 그 점에서 한국이 매우 유리한 면도 있었다. 두 나라를 비교해보면 왜 이 시기에 한국과 대만이 그렇게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가, 그러면서도 왜 다른 길을 갔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일흔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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