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장관이었던 무쓰 무네미쓰는 회고록 ‘건건록(蹇蹇錄)’의 첫머리에서 중국이 패권을 유지해 온 유라시아 동해안의 정치적 구도를 일변한 청일전쟁의 근본에는 동학(東學)이 있다고 서술한다. “일·청 양국이 해전과 육전을 치르게 되는 것도 우리 군이 연전연승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케 되어 종래 일·청 양국의 외교관계를 일변시켜 세계에서 일본을 동양의 우등국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도록 한 것도 그 근본 원인은 청·한(淸韓) 양국 정부가 이 동학당의 난에 대한 내치(內治)와 외교적 루트를 잘못 찾은 데 있었다. 앞으로도 일·청 양국 사이에 있어서 당시의 외교 역사를 쓰게 된다면 먼저 동학당의 난을 제1장에 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건건록’ 32쪽·범우사) 여기에서 동학의 교리와 역사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제노네 볼피첼리라는 외교관이 청일전쟁에 관한 자신의 저술 속에서 동학에 대해 흥미로운 논평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는 “경주에서 로마 가톨릭교에 큰 감명을 받은 최제우라는 인물이 몸져누웠다가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광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병을 고칠 치료법을 알려주는 환영과 함께 민중의 복지를 이루기 위한 새로운 교리를 열었다”고 주장한다.(‘청일전쟁’ 81쪽·살림) 비슷한 시기에 환각 속에서 야훼와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홍수전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것과 유사하게 동학농민운동을 이해하는 경향이 서구 사회의 일각에 있었던 것 같다. 볼피첼리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조선 정부도 동학을 가톨릭의 일파로 파악하여 1864년에 최제우를 처형시켰다. 그 후로 동학 교도들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정부는 오히려 이를 탄압했다. 여기에 고부군수 조병갑으로 대표되는 관료들의 학정에 대한 반발이 결합하면서 1894년 1월에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된다.
동학군이 빠른 속도로 세를 확장하자 자국군만으로는 이들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원군의 파병을 요청한다.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5월 말 조선이 중국에서 군대를 빌리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외무성에 통보했다. 실제로 그 후 원세개로부터 조선 정부가 청의 원병을 청했다는 통지가 조선의 일본공사관에 전해졌다. 조선의 유사시에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출병하면 다른 나라에 통고하기로 한 톈진조약에 따른 것이었다. 청은 어디까지나 속국을 지킨다는 종주국의 의무에 따라 파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올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의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운영이 곤란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중의원을 해산하고 일본군을 조선에 출병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5월 31일에 전주를 점령한 동학군은 외국군이 조선에 주둔하면 국가의 안녕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하였다. 그러자 청은 청·일 양국 군대의 출병 원인이 소멸되었으므로 양국 군을 모두 철수시키자고 일본 측에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미 칼을 뽑은 일본 측은 이번 기회에 청과 한판 붙어서 조선을 청에서 떼어내고 일본의 우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출병 이유를 만들고자 했다. 무쓰 무네미쓰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적고 있다. “당장에 급박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표면상 마땅한 구실도 없어서 교전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이러한 답보적인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일종의 외교적 정략을 통해 이런 정국을 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이었다.”(‘건건록’ 54쪽) 일본 측의 정략은 정부와 민간 양측에서 이루어졌다. 우선 민간에서는 이른바 ‘낭인(浪人)’들이 천우협(天佑俠)이라는 단체를 결성해서 동학군과 접촉, 전봉준과의 회견 자리에서 군사 원조를 제안했다. 이들은 동학군을 ‘조선 유일의 혁명세력’이라고 판단하여 이들이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면 참가하려 했다고 한다.(강창일·‘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38~101쪽) 그러나 반(反)정부적 성격을 띤 이들 천우협 세력의 조선 내정 개입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어떻게든 청과 충돌할 계기를 만들어야 했던 일본 측은 조선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명분을 만들도록 했다. 이에 따라 오토리는 7월 20일에 조선 정부에 대해 청과의 복속 관계를 해소하고 정치를 개혁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대한 조선 측의 대응을 문제 삼아 사흘 뒤인 23일 새벽에 경복궁을 침략했다. 당시 일본 조야에서는 이를 ‘전쟁’으로 칭했고, 일본 측의 선전포고문 초안에는 조선을 ‘적국’으로 칭하는 대목도 있었으나,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케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적국’ 운운 대목은 삭제되었다.(原田敬一·‘日淸·日露戰爭’ 66쪽) 그리하여 훗날 이 전쟁은 청과 일본이 한반도를 무대로 충돌한 ‘청일전쟁’이라는 타이틀로 기억되지만, 전쟁 당시 일본에서는 1894년 8월에 간행된 ‘일·청·한 전쟁기(日淸韓戰爭記)’와 같이 이 전쟁을 조선·청·일본 삼국이 충돌한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도 적지 않았다.
이리하여 전쟁을 일으킬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낸 일본은 명성황후 민씨와의 정치 투쟁에서 밀려나 있던 대원군을 입궐시킴으로써, 조선의 정치를 개혁한다는 명분을 더욱 그럴 듯하게 만들려 했다. 그리고 일본은 아산에 주둔하던 청국 군대를 소탕해 줄 것을 대원군이 일본 측에 요청한다는 형식을 취하여 개전(開戰) 명분을 성립시켰다.
이리하여 전쟁을 위한 명분을 만들어낸 일본군은 7월 25일에 아산 옆 풍도 앞바다에서, 그리고 29일에 아산·성환에서 청군과 충돌하여 모두 승리한다. 청·일 양국은 8월 1일에 상호 선전포고한다. 그리고 9월 15일에는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한다. 1593년 2월의 평양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에 패한 일본군이 근 300년 만에 복수를 한 셈이었다. 이 전투에서는 하라다 주키치(原田重吉)라는 병사가 청나라 군대가 견고히 지키는 현무문(玄武門)을 돌파하여 단신 돌격한 일이 유명하다. 그는 청일전쟁의 상징적인 존재로 일본 전국에서 숭앙받았으나, 전후에는 이 한때의 영광을 잊지 못하여 꿈속에 살다가 비참하게 삶을 마쳤다고 한다.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연극에 직접 출연하여, 자신이 실제로 한 행동보다 과장된 활약상을 연기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하기와라 사쿠타로·‘청일전쟁 이문(異聞)-하라다 주키치의 꿈’) 한편 ‘미야코신문(都新聞)’이라는 일간지는 청일전쟁 초기에 군부의 검열로 인해 전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자 무라이 겐사이(村井弦齋)라는 작가에게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조선 정벌(朝鮮征伐)’이라는 소설을 연재하게 했다.(井上泰至·김시덕·‘秀吉の對外戰爭’ 270~271쪽) 소설의 전개를 통해 청일전쟁의 전황을 은유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17~19세기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다루면 상업적 이익이 보장되었다는 사정도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9월 17일에는 서해에서 청·일 양국 수군의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황해 해전 또는 압록강 해전(Battle of the Yalu River)이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한다. 황해 해전에서는 일본이 보유한 영국·프랑스의 군함과 청이 보유한 영국·독일의 군함이 정면 충돌했으므로 서구의 군수업체들은 전투의 귀추를 주목했고, 이 전투에서 일본이 압승한 덕분에 제조사인 암스트롱사는 막대한 광고 효과를 얻었다.(‘日淸·日露戰爭’ 82~84쪽) 또한 이 전투에서 일본 해군이 구사한 전술은 그 후 세계 해군에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청일전쟁은 새로운 무기, 새로운 전략이 실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전쟁이기도 했다. 서양에서 개발된 불랑기포와 조총이라는 새로운 화약무기를 지닌 명과 일본이 정면 충돌한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이번에도 신무기의 시험장으로서 기능했다.
한편 청일전쟁 당시 일본은 서구 국가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해야 비로소 열강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유럽 문명의 결정체인 국제법, 현대적 군대, 입헌정체가 기독교 백인 이외에는 실현불가능하다는 당시 유럽인들의 편견을 깰 필요가 있었다. 무쓰 무네미쓰는 “황해 해전의 결과는 비로소 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 이외의 국가에서는 유럽식 문명이 생식될 수 없다는 비몽사몽에서 깨어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나아가 우리 군대의 혁혁한 무공을 표명함과 동시에, 우리 국민 모두가 유럽 문명을 채용했고 이것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건건록’ 177쪽)고 주장한다. 19세기 일본인들에게 ‘서구화’는 그만큼 절실한 과제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에 승리한 것은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의 충돌에서 ‘서양’이 승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일본은 전통시대 문명의 근원이었던 중국을 ‘야만’이라 부르고 서구 문명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여 ‘문명화’되었다고 자처했다. 청·일 양국의 선전포고 직전, 일본의 한 신문은 ‘청일 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이 전쟁에서 무고한 인민이 죽는 것은 불쌍하지만 청과 같이 부패한 국가에서 태어난 것은 그들의 불운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日淸·日露戰爭’ 68쪽) 미국 유학 후 상하이의 미션스쿨에서 강의하던 윤치호 역시 일본과 청을 문명과 야만으로 간주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 동양을 위해 일본이 승리하기를!’이라고 적었다.(‘개화파 열전’ 268쪽·푸른역사)
이후 일본의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육지로 진격하고, 제2군은 랴오둥 반도로 상륙한다. 11월 21일에 여순을 점령한 제2군은 수일간에 걸쳐 시민을 학살했다. 이는 국제법을 준수하는 문명국 일본이라는 일본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건으로, 일본 측은 이를 극력 축소 은폐하려 했다. 게이오의숙대학의 창립자이자 김옥균이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살 자체를 부정했다.(‘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246~253쪽·푸른역사) 이처럼 학살을 자행하고 은폐하는 선례를 수립한 일본군이 그 후 1945년의 패전 때까지 점점 더 대담하게 학살과 은폐를 되풀이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청일전쟁은 미래를 예견케 하는 전쟁이었다.
청측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청·일 양국 간에 종전 협상이 시작된다. 협상을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리홍장이 일본인에게 저격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서구 열강에서 청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일본은 애초의 요구를 누그러뜨려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핵심은 랴오둥반도·펑후제도·타이완의 할양이었다. 그러나 1895년 4월에 들어서면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청의 랴오둥반도 할양에 반대하고 나섰다.(삼국간섭) 만주에서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던 러시아가 주축이 되어 일본을 견제한 것이다. 승전 대가를 기대한 일본인들은 분노했다. 더욱이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할양받는 것을 방해한 러시아가 1898년에 청으로부터 뤼순·다롄을 조차받자 러시아에 대한 일본 측의 분노는 극치에 달했고 이 적개감은 이후 러일전쟁의 전초가 된다. 한편 타이완 등에 대한 할양은 유효했으므로 일본군은 5월에 타이완 북부에 상륙했다. 청으로부터 버림받은 일부 청의 관료들이 건국한 타이완 민주국이 단기간에 무너진 뒤 타이완 주민들이 11월까지 격렬한 저항을 전개하였음은 지난 회에 소개한 바 있다.
일본군의 타이완 정복 전쟁이 전개되던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발생한다. 삼국간섭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일본 정부는 이를 만회코자 명성황후 민씨를 제거했다. 조선이 혼란스러운 원인을 민씨 정권에서 찾은 우범선과 같은 조선인이 이에 가담했으며, 명성황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대원군이 그 배후에 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갑오개혁의 취지에 찬성했던 유길준이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가 당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왕비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 우리 국민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가을 개혁가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 있으나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 공사와 협의하여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이 문제를 일본 공사와 협의하고 공사에게 약간의 도움을 청한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정용화·‘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 한국’ 93쪽에서 재인용)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면담한 바 있는 I. B. 비숍은 이 사건 이후 고종을 다시 면담했을 때 그가 극도로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고 증언한다. 선교사들이 번갈아 고종을 지키고, 음식도 러시아인·미국인이 상자에 담아 열쇠로 잠가 그에게 전달했다고 한다.(‘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275~276쪽·집문당) 이처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기세가 올랐던 일본은 러시아의 견제로 기대만큼 이익을 얻지 못했고, 조급하게 이를 만회하려다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켰다. 을미사변과 갑오개혁에 반발한 조선 관민은 반일 의병투쟁을 일으켰고, 일본에 혐오와 공포를 느낀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리기 위해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다.(아관파천) 일본의 개입하에 성립한 김홍집 내각은 이에 무너지고, 도피할 것을 권유받은 김홍집은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오.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구출되는 것은 오히려 깨끗하지 못한 것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살해된다. 그가 살해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개화할 사람이 없다”며 한탄했다.(‘개화파 열전’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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