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오년인 올해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육십갑자로 두번째 지난 해(120년)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가적인 기념행사나 언론의 집중 조명은 특별한 게 없었습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을 가능한 한 쉽고 대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았습니다. 전봉준 장군의 영혼을 불러내어 그와 인터뷰를 시도해보았습니다. 그가 살아 있다면 우리 사회를 지켜보며 어떤 의견을 밝힐까요. 11월 초는 120년 전 2차 농민 봉기가 막 시작되던 시기입니다.
7일 자정을 두어시간 넘긴 새벽 충남 공주 주미산 자락 우금티 고개.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은 풍요로웠고,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은 휘이이 소리를 내며 억새잎을 비벼대고 있었다. 이곳에서 120년 전 농민군은 ‘외세를 타도하고 부정부패 관리들을 몰아내자’고 외치며 정부와 일본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스러져갔다. 우거진 나무 대신 수북이 쌓인 농민군의 주검으로 산을 이뤘을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시렸다.
그때였다. 먼발치에서 한 사내가 억새밭을 헤치며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인 남성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의 이 사내는 인기척을 느낀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 누구시오?” 사내가 소리치자 내가 답했다. “저는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답사하고 있는 기자입니다.”
사내는 성큼성큼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허름한 흰 저고리를 걸친 사내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는 상투를 틀어 단정했고 부릅뜬 눈은 달빛처럼 밝았다. “잠깐 앉으시오.” 사내와 나는 억새밭 옆 작은 바위에 마주보며 앉았다. 사내가 말을 이어갔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전봉준이라고 하오. 놀라지 마시오. 그냥 영혼일 뿐이오. 해마다 이맘때면 옛 동지들의 모습이 떠올라 이곳을 다녀가곤 한다오. 서로 진심이 통했는지 내 모습이 당신에게 보인 모양이오.”
사내의 말투는 인자한 시골 서당 훈장님처럼 부드러웠다. 오싹했던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사내는 손사래를 쳤다. “지금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이미 후손들이 연구도 많이 해왔으니 동학농민군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오. 같이 산책이나 하다 날 밝으면 헤어지는 게 어떻소?” 나는 계속 설득했다. “학자들은 잘 알지 모르나 일반 사람들은 올해가 갑오년인지도 잘 모르고 삽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좋소. 생각해보니 우리 후손들께서 두꺼운 책을 보지 않으면 동학농민혁명을 접할 기회가 없는 현실인 것 같소. 한번쯤은 쉽게 설명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네. 어려운 얘기는 가급적 빼고 뭇 대중이 궁금해하는 것 위주로 물어보면 답해주겠소.” 그렇게 인터뷰가 성사됐다. 다음은 전봉준 장군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부정부패를 감시하라, 빛나는 혁명의 역사를 기억하라
-올해가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육십갑자를 두번째 지나는 갑오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소? 우리 농민들의 의거를 잊지 않고 이렇게 기억해주다니 고맙소. 그동안 갑오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많은 왜곡이 있어왔다오. 일제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후손들이 농민들의 의거를 ‘동학란’으로 부르는 게 참으로 마음이 허했지. 이제 일제가 만든 역사관 좀 버리고 선조들이 품었던 사회개혁의 열망을 온전히 헤아려줬으면 좋겠소.” -아, 그런데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봉준 장군과 전봉준 선생 중 뭘로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방자치단체가 조성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이곳저곳 가봤는데 장군이라고 표현한 곳도 있고 선생이라고 한 곳도 있어요.
“사람들이 나를 ‘녹두 장군’으로 부른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렇게 불러도 좋고, 내가 고부군(현 정읍시 일대) 조소마을에서 훈장을 하였으니 선생이라고 불리어도 괜찮소. 다만 내가 임금이 제수한 장군이 아니라서 장군으로 부르기를 주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감일세. 백성은 하늘이라고 했소. 부패한 민씨 정권(고종이 세력으로 의지한 중전 민씨와 그 일가친척인 여흥 민씨 일가)의 뜻보다 더 높은 것이 바로 백성의 뜻 아니겠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전봉준 장군’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편한 대로 하시게.” 100만원 벌어 80만원 세금 내면 좋겠소? 갑오동학농민혁명은 120년 전 부정부패한 관료와 외세침탈에 저항하고자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1894년 1월10일(이하 음력 기준) 전라북도 고부군의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탐관오리 조병갑을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3월20일 무장에서 다시 봉기한다(1차 봉기). (▶학자에 따라서는 1월 고부봉기를 1차 봉기로, 3월 봉기를 2차, 9월 봉기를 3차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때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여 5월8일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폐정개혁안 실현을 약속받았다. 민중봉기가 감영(각 도의 관찰사가 집무하는 관청) 점령에까지 이른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농민군은 사실상 전라도 전역에서 최소 3개월 이상 민중 자치를 실현하기도 했다.
전주화약 뒤 잠잠하던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 의도가 본격화하자 ‘척왜 척양’의 구호를 내걸고 9월부터 2차 봉기를 하게 된다. 공주성 점령을 목표로 북상하던 농민군은 관·일본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했다. 12월2일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고 이어 김개남·손화중 등 농민군 지도부가 잇달아 관군에 체포되면서 농민군 세력은 급격히 쇠락해 갔다. 1895년 3월30일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 5명은 한꺼번에 교수형을 당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농민들이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때 농민들이 생업까지 접고 봉기한 연유가 궁금합니다. 당시 조선 사회가 어떤 수준이었나요?
“조선 농민의 칠팔할이 소작농이었소. 수확의 절반 이상을 지주와 관아에 바치고 나면 남는 게 없었지. 한해 노동의 대가가 전 수확량의 이삼할에도 미치지 못했소. 복지제도도 없이 한달 100만원 벌어서 70만~80만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면 당신 같으면 살 수 있겠소?” -아니요. 그러면 미래가 없지요.
“조정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고 늘 유생들끼리 싸움질이었지.” -왜 하필 전라북도 고부에서 시작한 건가요?
“조병갑 고부군수 탓이 크다네. 고부는 비옥한 농토가 많아 백성들이 풍요로워야 하는데 관리들이 수탈하기에만 좋은 고장이었소. 조병갑은 토지를 개간하면 3년간 면세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어겼소. 제 아비의 비각을 세운다며 1천냥까지 거둬들인 자요.” -그래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요?
“기자답게 따지시는구려. 좋소. 우리가 사전에 할 것은 다 해봤소. 나의 부친(전창혁)께서 고부 백성들과 함께 관아에 등소(민원)도 해보았지만 돌아온 건 매질이외다. 아버지는 끝내 옥에 갇혀 돌아가셨소.” (▶동학사, 오지영, 서울: 영창서관, 1940, 103~104쪽. 전봉준의 아버지가 고부 관아에 대항한 것은 맞으나 죽음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고부봉기로 조병갑이 쫓겨나고 신임 군수 박원명이 부임했다. 그는 유화책을 폈다. 들고일어났던 농민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2월15일 안핵사로 임명된 장흥 부사 이용태는 농민들의 해산을 틈타 동학교도들을 매질하고 탄압했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 등은 농민들을 추슬러 3월 재봉기했다. 이 봉기는 고부에만 머물지 않고 전라도 전역을 휩쓸게 된다. 학계에서는 3월 봉기를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라고 부른다. -왜 전봉준 장군께서 봉기를 주도하셨나요. 상민 가문도 아니었잖습니까?
“세상살이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데 출신성분이 무엇이 중요하겠소.” -전라도를 관할하던 전주성까지 함락한 건 정말 놀라웠습니다. 관군이 이렇게 쉽게 뚫릴 것을 예상하셨나요?
“예상 못했지. 하지만 부패와 나태에 찌든 관군은 위세만 대단했지 전투력은 죽창 정도로 버틴 우리를 당하지 못하더군. 비밀 하나 얘기해주려는데 관심 있소?” -뭔데요? 물론 관심 있지요.
“전주성에 사실 미리 농민군을 상인으로 위장시켜 들여보냈었다오. 그날(1894년 4월27일)이 마침 장날이었거든. 본대가 도착하면 성문을 열게 했다오. 그래서 좀 쉽게 뚫린 것도 있었지.” -하하하. 기지가 대단하군요.
임금이 제수한 장군 아니라고 날 2차봉기 때 1만여 농민군 이끌고
설마설마 청나라에 군사요청까지 할 줄이야 4월27일 전봉준과 농민 부대는 전주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관군과 농민군은 전주성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양쪽 모두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면서 둘은 협정을 맺고 전투를 중단했다. 그러면서 농민군은 폐정개혁안 폐정개혁안을 조정에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고 5월8일 전주성 점령 10여일 만에 스스로 성을 나왔다. 7월6일 김학진 전라감사는 전주에서 전봉준과 회담을 하고 전라도 지역 집강소(농민자치기관) 통치를 용인했다. 행정권을 부여받은 농민군은 사회개혁에 착수했다.
-전주성을 점령한 뒤 한양으로 북진하지 않고 스스로 관군에 성을 내준 연유가 궁금합니다.
“전주성을 점령하긴 했지만 관군의 공격이 계속되어 농민군의 피해도 막심했다네. 마침 그때 조정이 청나라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고 일본군도 조선에 군대를 진주시킨 것을 알게 됐소. 이건 아니다 싶었지. 우리는 그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고 봉기한 것이지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네. 고종께서 농민군이 귀화해 생업에 종사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해 우리는 감격하여 일단 전주성을 나오기로 결정했소. 그때가 농번기라 전투가 지속되는 것에 농민들이 걱정도 많았고.” -그래도 아무 성과 없이 철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물론이오. 새로 전라감사로 김학진이 부임했는데 나중에 우리와 대화를 했소. 우리는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해 고을을 개혁하겠다고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소. 미약하나마 호남 일대를 근거지로 우리가 꿈꾸어온 새 세상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자 일본은 1885년 청·일 양국 군대의 철병을 약속한 톈진조약 위반이라며 반발했고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왔다. 전주화약이 성사되자 조선은 청과 일본군 모두에게 철군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엉뚱하게 조선에서 청과 일본 사이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고, 둘은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청일전쟁이다. -조정이 청나라에 군사 요청까지 할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까?
“(길게 한숨을 쉬며)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그런 일이 벌어지더군.”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파견 와 있던 원세개(위안스카이. 후에 중화민국 총통이 됨)에게 민영준(1894년 당시 통위영의 통위사. 통위영은 군사 관청의 하나. 통위사는 최고책임자)이 원군을 청하며 보낸 편지를 제가 읽었습니다. 농민군을 ‘습성이 사납고 성질이 교활하다’고 묘사했더군요.
“세도의 유지에 급급해 외세의 개입까지 불러온 민씨 정권이오. 판단력이 제대로 없었던 게지.” -일각에서는 농민들의 봉기 탓에 조선 땅에 청나라와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표정이 일그러지며) 헛소리들 하지 말라고 하시오! 위정자들의 오판으로 벌어진 일을 왜 우리 농민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거요! 얼마 전에 ‘일청전쟁 선전조칙 초안’이 발굴되었더구먼. 신문에도 나왔던걸. 이토 히로부미(1894년 당시 일본 총리)는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도 선전포고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가 나중에 뺐소. 청일전쟁은 조선 침략을 위해 일본이 치밀하게 계획한 전략이오.” (▶<한겨레21> 573호. ‘일본, 1894년 조선전쟁 계획했다’) -목소리가 커지시는 걸 보니 화가 많이 나시나 봅니다.
“결례했다면 미안하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됩니다. 집강소를 통해 전라도 일대의 자치와 개혁이 제법 자리잡아가고 있는데도 9월 2차 봉기를 일으킨 이유가 궁금합니다. “일본을 더 이상 가만둬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소. 일본은 군대를 도성까지 끌어들여 밤중에 고종을 위협한데다 그 의중이 의심스러운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소.”
조총으로 소총과 기관총에 맞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농민군은 2차 봉기 때 전투에서 이긴 적이 별로 없습니다. 농민군의 수가 관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는데도.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농민군의 수가 11만7500명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최대 3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관군이 일본군과 연합해 우리를 공격하니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더군. 우리도 군기고를 습격해 조총을 갖고 있긴 했소. 그런데 저들은 난생처음 보는 무기로 우리를 공격했소. 벼락이 치는 거 같았소.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군이 갖고 있던 게 소총(스나이더)이랑 기관총(크루프)이라고 부르는 무기였다고 하더군.”
-일본은 계속 농민군이 민씨 정권에 의해 실각한 흥선대원군과 모의를 해 봉기를 일으킨 것 아니냐고 의심했는데요.
“터무니없는 소리요. 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계속 우리와 소통하려고 한 건 맞소. 그러나 봉기는 농민군 스스로 결정한 것이오. 우리는 그와 협력할 의사도 없었고.”
-공주 우금티가 격전지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주는 산으로 막히고 강(금강)을 두르고 있어 지리가 좋은 편이오. 그 땅에 웅거하면 일본군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일본군이 먼저 들어와 있더군. 어쩔 수 없이 공주에서 일전을 치러야겠다고 생각했소. 1만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우금티(▶동학농민전쟁과 공주전투: 백제문화(23), 박맹수,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1994, 68쪽.)로 진격했는데 계속 전투에서 졌소. 퇴각할 때 보니 500여명만 남아있더군. 얘기를 하다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는구려. 내가 이래서 여기를 떠나지 못하오. 나 때문에 죽은 동지들의 원혼을 달래고 싶어서….” (▶동학농민전쟁과 공주전투: 백제문화(23), 박맹수,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1994, 68쪽.)
-하지만 죽으면서도 명예롭게 생각하셨을 거 같아요.
“내가 뭐라 말을 보태지 못하겠소.”
전봉준 장군은 일어서 달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기도하는 것처럼도 보였고, 혼잣말로 탄식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말없이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장군의 머리 너머 먼발치에 견준봉과 두리봉이 보이는 듯했다. 우금티 고개 인근의 해발 230m 정도의 산봉우리다. 그곳에 농민군의 지휘부가 있었다. 적막을 깨고 질문을 이어갔다.
-농민군은 일본군에 대항하고자 한 건데 조선 조정이 등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안타까운 게 바로 그거요. 내가 공주에서 패한 뒤 관군에게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왜놈들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편지도 띄워봤지만 반향이 없었소.”
-하지만 관군뿐 아니라 젊은 선비들도 농민군 편에 서진 않았는데요.
“유생들은 상놈들이 신분제도를 부정하니 불편했을 거요. 여러분이 극진히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도 젊은 시절 동학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는 걸 알고 있소?”
-아니요. 몰랐습니다.
“안중근 자서전을 읽어보시오. 거기에 다 나온다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저명한 진사 출신의 유학자이오. 유생의 눈에는 동학이 천박하게 비쳤을 수 있겠지. 당시로서는 그럴 수 있는 거네. 안중근도 나중에는 우리의 뜻을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오. 동학의 접주였던 김구 선생이 후에 독립운동을 이끄는 것을 보며 스스로 느낀 바가 있지 않겠소?”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이들 중 친일파가 된 이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장흥 부사 이용태는 이완용 친일 내각에서 학부대신을 지내고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도 받았소. 이두황(장위영영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던 관군 지휘관)은 나중에 민씨 시해 사건에도 가담하고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이토 히로부미한테 빌붙어서 전라북도 관찰사 자리까지 꿰차더군.”
-하늘에서 다 보고 계셨군요. 쫓겨났던 조병갑이 나중에 고등법원 판사로 복귀해 1898년 최시형 선생(동학 제2대 지도자)에게 사형 판결을 한 것도 보셨나요?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소.”
자결했다고 민영환의 과거가 바뀌진 않소
거듭된 전투에서 관·일본군 연합군에 패하여 전봉준은 농민 부대를 해산하고 도피하다 12월2일 순창군 쌍치면 계룡산 밑 피로리에 들렀다가 옛 부하 김경천을 만났다.
김경천은 관에 밀고했고 전봉준은 체포됐다.
-그런데 지금 다리를 좀 저시는 것 같은데, 맞나요?
“(바짓부리를 걷어올리며) 체포될 때 매를 많이 맞았다오. 그때 다리에 난 상처가 낫지를 않는구려.”
-아, 그러고 보니 전봉준 장군께서 유일하게 찍힌 사진을 보면 ‘들것’에 앉아 어딘가로 가는 장면이더군요. 그게 다리를 다쳐서 그러신 건가요?
“그렇소. 혹자는 조정이 내게 예우를 다하려고 들것에 앉혔다고 추정하던데 그게 아니라네. 그때가 아마 (1895년) 2월28일께인가 그럴 거요.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고 조선의 법무아문(사법과 경찰 업무를 담당한 행정기관)으로 이감될 때였는데 어떤 일본인 사진가가 갑자기 사진 좀 찍자고 하더군. 내가 처형되면 어디에도 얼굴 기록이 안 남으니 영사관에 미리 양해를 얻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오. 좋은 뜻으로 사진을 찍자고 하는 것이니 내 흔쾌히 응해주었소.”
-사진 찍고 나서 열흘쯤 뒤에 <오사카매일신문> 등에 사진이 소개되었습니다.
“알려주어 고맙소.”
-장군의 공초기록을 제가 구해서 읽어봤습니다.
“허허. 부지런하시구먼.”
-네. 거기에 보니까 봉기 이유에 대해 ‘매관매직한 자를 제거하려 했다’면서 민영환을 거론했더군요. 한데 민영환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위인인데 그런 분을 어찌….
“그가 조선 왕조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는지는 몰라도 민씨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관료이고 매관매직을 일삼던 부패한 민씨 척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소. 그의 공과는 고르게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소만.”
-네, 그렇지요. 좀 다른 질문입니다만, 집강소 통치를 저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후손들이 너무 역사적 가치를 모르는 것 같아 서운하오. 우리보다 20년 앞서(1871년) 프랑스 파리에서 민중자치(파리 코뮌)가 2개월간 벌어진 적 있더군. 우리의 집강소 통치도 그와 비교할 만한 민중사적 업적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하오. 전라도 거의 전역에서 농민 스스로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치안과 행정을 담당한 기간이 최대 10개월이오. 농민들이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 관리들보다 훨씬 고을을 잘 다스렸다네.”
-궁극적으로 전봉준 장군께서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이루려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일본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한 관리를 축출해 임금 곁을 깨끗이 한 뒤 몇 사람의 선비를 내세워 정치를 하게 하려 했소. 하지만 국사를 한 세력에만 맡기면 크게 폐해가 있을 것 아니오. 몇 사람의 명사들과 협력하고 화합하여 법을 만든 뒤에 정치하게 만들고 싶었소.” (▶1895년 3월6일 <동경아사히신문> 게재된 내용 참조. 1988년 9월호 <사회와 사상> 번역 게재.)
-폐정개혁안 중에 ‘청년과부의 개가를 허하라’는 요구사안도 있더군요. 여성 문제에도 관심이 있으셨던 건가요.
“요즘 자네들 말로 페미니스트 이런 건 아니라오. 그때는 조선시대에 개가한 여성의 자녀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소. 남편이 일찍 죽은 과부가 평생 혼자 사는 것도 큰 고통인데 개가한 과부의 아이들에게까지 고통이 대물림되니 어찌 부당하지 않겠나. 동학의 주요 지도자들 중에는 서출(庶出)이거나 천출(賤出)이 많았소.”
상놈들이 신분제를 부정하니
파리코뮌이 2개월이었다면
무슨 종교봉기로 오해하진 마시오
-‘척양척왜’라는 구호가 지금의 시대와는 좀 안 맞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반외세의 구호를 외친 건 무조건 외세를 배척하자는 게 아니오. 이 땅을 침탈하려는 외세를 배척하자는 의미일세. 120년 전 조선의 개항장에서는 일본 상인이 조선 상인을 상대로 사기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많았지만 강화도 조약의 치외법권, 영사 재판권 조항 때문에 우리가 손을 쓸 수가 없었소. 이런 것을 바로잡자는 것이었지.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그런 문제들이 많지 않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같은 것들 말이오. 그나저나 아직 멀었소? 자네, 묻는 게 많구먼.”
-죄송합니다.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라서 욕심이 많아지네요. 곧 끝내겠습니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군사정부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자처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
“동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사람이 한울이다’ 아니겠소. 그들 정부가 정말 사람을 귀하게 여겼다고 할 수 있소? 답은 거기서 찾는 게 좋을 거외다.”
-동학은 농민혁명 과정에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나는 동학을 상당히 좋아했소. 하늘을 공경하고 신분이 아닌 사람 그 자체를 우선하는 게 마음에 들었소. 그렇다고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오. 농민군에는 일반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 황톳재 제일 높은 봉우리에 후손들이 탑을 세우고 동학혁명기념탑이라고 세웠더군. 고맙기는 한데 후손들이 이걸 무슨 종교봉기로 이해할 수 있으니 명칭은 좀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싶소만.”
-120년이 지난 지금 동학혁명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농민들이 봉기를 하게 된 것은 조정이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감시를 등한시하고 농민들의 신음 소리를 외면한 탓이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제대로 감시되고 서민들이 일한 만큼 제대로 그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다고 보시오? 후손들이 새로 맞은 갑오년에 이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오.”
-알겠습니다. 혹시 박근혜 대통령께서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올해를 갑오경장의 해라고 표현한 것은 아십니까?
“갑오개혁은 농민들의 폐정개혁 요구가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 후손들께서 1987년에 6월항쟁을 벌인 결과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지 않았소? 1987년을 헌법 개정의 해가 아니라 6월항쟁의 해로 기억하듯 1894년을 동학농민혁명의 해로 기억해주었으면 하오.”
동이 서서히 트기 시작했다. 까맣게만 보이던 억새잎이 부드러운 갈색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온 것 같소.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오?”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교수형 당할 때가 마흔하나였는데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이 있었소. 다들 어떻게 됐는지, 후손들은 잘 지내는지 소식을 못 듣고 있소. 좀 알아봐주시게나.”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언젠가 또 만날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소.”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자 산속 어딘가에서 ‘가보세(갑오년을 비유) 가보세 을미(을미년)적 을미적 병신(병신년) 되면 못 가보리’ 하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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