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불면의 밤을 보낸 불멸의 이순신 장군

백삼/이한백 2014. 11. 4. 12:11

백번 생각하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함께 의논하고 홀로 고뇌하라!”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이충무공행록』에는 이순신이 진중에 있을 때의 생활을 이렇게 기록했다.

“진중에 있는 동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매일 밤 잠잘 때도 띠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한두 잠을 자고 나서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날이 샐 때까지 의논했다. 또 먹는 것은 아침과 저녁 오륙 합뿐이었다. 때문에 보는 이들이 공(이순신)이 먹는 것 없이 일에 분주한 것을 깊이 걱정했다. 공의 정신은 보통 사람보다 갑절이나 더 강한 분이어서 이따금 손님과 밤중까지 술을 마시고도 닭이 울면 반드시 촛불을 밝히고 혼자 일어나 앉아 혹은 문서를 보기도 하며 혹은 전술을 강론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함께 의논하라

이순신은 진중에 있을 때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의논을 하거나, 홀로 있거나, 책을 보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자주 의논했다는 대표적인 기록들이다.

▲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ㆍ이순신ㆍ어영담ㆍ배흥립ㆍ정운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同論畵計).” (「정운을 이대원 사당에 배향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 1592년 9월 11일)

▲“적들이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보면 서쪽으로 침범할 뜻이 현저하므로 이 억기 및 원균 등과 함께 온갖 방책을 의논(百爾籌策)한 끝에 적의 길목인 견내량과 한산도 바다 가운데를 가로막아 진을 쳤습니다.”(「왜선을 구축한 일을 아뢰는 장계(逐倭船狀)」, 1593년 7월 1일)

홀로 고뇌하라

또한 『난중일기』의 기록에는 홀로 밤새워 고뇌하는 이순신의 모습도 많이 나온다. ‘홀로(獨) 잠을 이루지 못했다(寢不能寐)’는 것이다.

▲1594년 7월 12일. 이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寢不能寐).

▲1595년 10월 20일. 차가운 달빛은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는데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寒月如晝 寢不能寐 轉展終夜 百憂攻中).

▲1596년 2월 15일. 이날 밤 달빛은 대낮과 같고 물빛은 비단결 같아서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랫사람들은 밤새도록 술에 취하며 노래했다.

▲1596년 8월 10일. 어두울 무렵 달빛은 비단 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 갈래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경에 방으로 들어갔다.

고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도 다양하다. 이순신도 때로는 평범한 우리와 같이 가족 때문에 고뇌했고 때로는 직장인으로 고민했다. 그러나 그의 고뇌의 깊이는 평범한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그의 고뇌는 죽음의 비릿한 냄새가 늘 진동하는 전쟁터에 있는 장수의 고뇌였고, 죽어 가는 백성들의 아픔 때문이었다. 그는 또 많이 울기도 했다.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울었고 침략자에 분노하면서 울었다.

이순신은 고독과 번뇌, 울음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늘 백성과 군사, 전쟁을 대비할 계획을 세웠다. 고독이라는 명목으로 넋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략을 개발하고 대안을 만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간이었다. 어떻게 전투를 해야 승리하고,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필요한 무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면 밤을 지새웠다.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다 하라

1593년(선조 26) 9월 15일 일기 이후에 쓰인 메모와 『임진장초』에 나오는 조총 제작에 관한 이야기에도 고뇌하는 이순신,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순신의 모습이 나온다.

▲ 정철 총통은 전쟁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작하는 묘법을 잘 알지 못한다. 이제야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 내어(今者百爾思得) 조총을 만들어 내니 왜군의 총통과 비교해도 가장 기묘하다.

그가 최신 무기였던 일본군 조총의 위력을 경험하면서 일본군의 조총 원리를 파악하고 더 낳은 제품을만들기 위해 고민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야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 냈다(百爾思得)”고 했다. 그가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 내 조총을 개발했음은 조정에 보고한 장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이 여러 번 큰 싸움을 겪으면서 왜인의 조총을 얻은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항상 눈앞에 두고 그 묘리를 실험한 결과, 즉 총신이 길기 때문에 그 총구멍이 깊숙하고, 깊숙하기 때문에 나가는 힘이 맹렬하여 맞기만 하면 반드시 부서집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승자’나 ‘쌍혈’ 등의 총통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그 맹렬한 힘이 왜의 조총 같지 못하고 그 소리도 웅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조총을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의 군관 훈련 주부 정사준이 묘법을 생각해 내어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ㆍ순천 사삿집 종 안성ㆍ김해 절종 동지ㆍ거제 절종 언복 등과 함께 정철을 두들겨 만들었습니다. 총신도 잘 되었고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꼭 같습니다. (「화포를 올려 보내는 일을 아뢰는 계본」, 1593년 8월)

이순신은 조총을 만들기 위해 노획한 일본의 조총을 항상 눈앞에 두고 우리나라 총통과 비교하고 실험하면서 차이점과 만들 수 있는 방법 등을 연구했다. 정사준이 그 방법을 찾아냈다고 보고했지만 이순신 스스로 “이제야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 내어 만들었다”고 했다. 이순신은 조총을 밤새워 바라보고 만져 보면서 그 원리를 연구했고 그렇게 연구해 터득한 원리를 이용해 정사준을 시켜 조총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자신의 연구와 관계없이 실제 제작을 지휘한 정사준과 참여한 대장장이, 노비들의 이름까지 한 명 한 명 기록해 보고했다. 이순신이 조총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고 또 성공하자 얼마나 기뻐했는지, 부하들의 노력을 얼마나 존중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순신의 ‘백이사득(百爾思得)’ 즉 ‘온갖 방법을 생각해 얻었다’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집요함과 그 과정에서의 고독한 불면의 밤의 결과이다. 이순신처럼 온갖 방법을 다 생각해 보고, 발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평상시 자신과 관련된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순신처럼 자신의 성공을 돕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순신처럼 백이사득(百爾思得)하라! 문제를 해결할 답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