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3척에서 5척 건조…실전용 단 두척
|
|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수군이 임진왜란때 패배한 이후 일본에서 만든 ‘짝퉁 거북선’ 의 모습 (일본해군 중좌자작, 일본제국 해상권력사강의 1904) |
임란후 일본 황당한 ‘짝퉁 거북선’ 등장해
영화 <명량>의 열풍이 태풍이 되어 온 나라를 휘몰아치고 있다. 본받을 만한 리더 부재의 시대가 만든 결과이기도 하고, 세월호의 비극을 비롯해 각종 사건과 사고 속에서 우리 자신의 좌표에 대한 고민이 만든 결과인 듯하다. 그 <명량>에는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이 거북선을 건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전투를 두려워해 회피하려는 경상 우수사 배설에 의해 불태워지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명량해전과 관련된 기록 중에서 거북선을 언급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분이 지은 최초의 이순신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이충무공행록>과 이항복 선생이 남긴 기록이 있다. 이분과 이항복의 기록은 모두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을 거북선으로 위장케 했다는 내용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만든 거북선 혹은 그 이후에 추가로 제작한 거북선과 다르다. 가짜일 뿐이다.
진짜 킬러 앱, 거북선
거북선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대히트했다. 오늘날의 경영학 용어로 말하자면, 등장하자마자 경쟁 상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완전히 뒤바꾸는 혁신적 제품 혹은 서비스를 의미하는 킬러 앱(killer app)과 같았다. 킬러 앱(killer app)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래리 다운스 교수가 금속활자, 도르래, 증기기관, 백열전구, 엘리베이터, 원자탄 등을 ‘킬러 애플리케이션(killer application)’이라고 명명하면서 생긴 용어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일본군에게 킬러 앱 그 자체였다.
다음은 임진왜란 직전 거북선에 관한 일기들이다.
▲ 1592년 2월 8일. 이날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 1592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 1592년 4월 11일. 비로소 (거북선의) 베돛을 만들었다.
▲ 1592년 4월 12일.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 현자포를 쏘았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거북선은 그렇게 기적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순신은 자신이 창제한 거북선에 대해 <제2차 당포ㆍ당항포 해전 승첩 장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신(臣)이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龜船)’을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여,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해 포를 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자신의 기록을 보면 개략적인 거북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보다 더 상세한 기록은 이분이 남긴 기록에 나온다.
▲ 전선(戰船)을 창작하니 크기는 판옥선만하며 위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올라가 다닐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온통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데 입에는 총구멍이 있고 뒤는 거북의 꽁지처럼 되어 있는데 그 꽁지 밑에도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는 각각 여섯 개씩의 총구멍이 있다. 그 모양이 거북의 모습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름을 거북선(龜船)이라 했다. 뒷날 전투를 할 때에는 거적으로 송곳 위를 덮고 선봉으로 보냈는데 적이 배 위로 기어오르려다 칼날과 송곳 끝에 찔려서 죽었다. 또 적선이 포위해서 공격하려고 하다가 거북선의 좌우 앞뒤에서 한꺼번에 총알이 터지므로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공격했기에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다. 때문에 크고 작은 전투에 이것으로써 항상 승리했다.
이순신의 서녀를 작은 어머니로 두었던 백호 윤휴가 지은 전기인 <통제사 이충무공 유사>에도 거북선이 언급된다.
▲ 큰 군함을 마치 엎드린 거북의 모습처럼 제작하여 큰 판을 위에 덮었고, 화살촉과 칼날을 밖으로 향하게 해 놓았다. 창과 대포는 그 안에 넣었다. 이를 거북선(龜船)이라 부르고 선봉으로 삼아 적이 침략할 것에 대비했다.
공통적인 것은 불과 몇 년 전까지 신화처럼 이야기 되던 철갑선 혹은 잠수함과 같은 거북선으로는 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에 모두 3척에서 최대 5척까지 건조되었고, 1592년 가을의 부산포 해전까지는 전라 좌수영 소속 거북선과 방답진 소속 거북선, 그 두 척만이 실전에 참여했다. 거북선의 활약을 이순신의 해전 보고서를 통해서 개략적으로라도 살펴보면, 판옥선 24척의 사상자가 141명인 것에 비해 거북선 사상자는 24명으로 상대적으로 피해가 큰 것으로 나타난다. 이순신과 이분의 기록처럼 거북선은 선봉 돌격선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거북선은 선봉 돌격선
이순신은 어떻게 거북선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거북선 건조자로 알려진 나대용 등 부하들의 고안으로 만들었을까? 이순신이 간혹 기록한 꿈의 내용처럼 꿈속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아니면 책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나대용 등이 제안을 했더라도 필요성이나 실현성에 있어 이순신이 확신을 갖지 않았다면 실현될 수 없는 일이었다. 거북선은 대장 이순신이 거북선과 같은 그런 전무후무한 배가 필요하다는 확신,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영감과 확신을 이순신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순신의 폭넓은 독서에 있었다. 고대 육상 전투에서 활용된 병법서 속에 소개된 전차인 편상거(偏箱車)와 녹각거영진(鹿角車營陣), 혹은 융거(戎車), 그리고 수전(水戰)에서 활용된 전함인 몽충(蒙衝)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순신은 독서를 통해 역사 속의 전자와 몽충을 거북선을 만들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삼았고, 자신만의 거북선을 실현시켰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조선 태종 때 이순신의 거북선과 같은 이름의 거북선(龜船)이 존재했었다. 게다가 이순신이 존경했던 송나라의 명장 악비의 수전(水戰) 이야기에도 거북선과 같은 전선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사례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주로 보는 거북선은 1795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속의 두 종류의 거북선이다. 그러나 이는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전쟁 후 200년이 지나면서 변형되고 발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기록에서도 우리가 상상하는 거북선, 혹은 《이충무공전서》속의 거북선과 다른 거북선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도 그렇다. 그 거북선은 마치 악비가 수전을 하면서 개발한 소가죽 뚜껑을 덮은 듯한 뗏목배와 같은 모습의 거북선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짝퉁 거북선의 모습도 있지만, 그것은 황당무계한 모습의 일본 짝퉁 거북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