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구 국방대 교수는 갈아입을 양복을 학교에 두고 다닌다. 외부 강연 요청이 부쩍 늘어서다. 가장 잦은 강연 요청 내용은 ‘이순신의 리더십’에 대한 것. 노영구 교수의 주요 전공이 한국사, 그것도 전쟁사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에 대해 강연하면서도 노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 무(武)와 병(兵)의 역할과 중요성이 많이 간과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는 닌자처럼 조선 후기 협객 문화를 바로 알자는 내용으로 지난 ‘닌자학술대회’에서 한·중·일 3국의 학자들 앞에서 강연했다.
지난 9월 16일 경기도 고양시 국방대 건물에서 만난 노 교수는 먼저 숫자를 나열했다. “17세기 당시 한양의 인구가 15만~20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군대 조직이었던 훈련도감의 군인이 5500명이었어요. 어영청, 금군 등의 다른 군인까지 다 합하면 8000~9000명이었을 겁니다.” 모두 직업군인이었다. “4인 가족으로 간단하게 계산해도 최소한 4만명이 군인 가족이었다는 계산이 나와요. 여기에 군에 식량을 납품하는 사람, 군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다 합하면 최소한 한양 인구 4분의 1에서 3분의 1까지는 군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한양은 군사도시였다. 의외의 일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은 근대 도시 발달을 설명할 때 기근으로 인해서 몰린 유민들로 인해 인구가 늘어났다고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이 생산과 소비 활동을 시작하면서 도시가 성장했다고 합니다.” 노 교수의 의문은 여기서 생략된 한 가지에서 출발했다. “왜 도시로 왔던 사람들은 기근이 해결됐는데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일까요?” 노 교수는 많은 유민이 도시의 직업군인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우리나라 도시뿐 아니라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비군의 형성입니다. 군인들이 어디에 머무를까요? 도시가 군사도시화되면서 근대화된 겁니다.”
그러니까 한양은 화려한 도시였다. “지금이야 군인들은 소박하고 정해진 규율을 따라야 하지만, 당시 무인들은 굉장히 화려한 편이었습니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 그런 장면이 많은데,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이 기방에 들락날락하고 군 출신 ‘왈짜’들이 길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입니다.” 현종실록에도 병자년(병자호란)에 비해 도성에 군인이 너무 많아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군인들이 증가하고 유흥문화가 발달하고 도시문화가 급격히 변하면서 기존의 제도나 법규가 이를 따라잡지 못했을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군 출신 혹은 군인인 협객들이 가족과 마을을 지키고,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적하면서 자치(自治)를 펼쳤을 것입니다. 이 당시 한양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보려면 협객들의 이야기를 발굴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 교수는 조선의 협객을 일본의 닌자 문화에 연관시켜 베이징에서 발표했다.
노 교수가 처음 제안한 한양의 군사도시화는 역사학계에서 인정을 받는 추세다. 각종 기록에서 노 교수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정쟁만 일삼았을 것 같은 유약한 이미지의 우리 중세시대가 사실은 화려한 무인들의 세상이었다는 사실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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