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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이 혁신을 만든다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에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나온다. 예수를 따라온 사람들이 저녁때가 되자 먹을 것이 없어 고민할 때 한 어린이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내놓자 예수가 기적을 일으켜 5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적인 사건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신비로운 기적을 만들었지만, 현실에서 그와 비슷한 기적을 만든 사람이 있다.
바로 이순신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1597년 13척으로 133척을 격파한 명량대첩 후 이순신의 수군은 고금도로 진영을 옮겨 안착했다. 당시 군사는 8천명에 이르렀다. 전쟁중이었고, 섬에 진을 친 상태에서 군량을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군사들을 굶길 수도 없고, 어렵기 마찬가지인 백성들에게 식량을 강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때 이순신과 그의 참모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해로통행첩>이라는 제도였다. 바닷길을 다니는 배에 대해 통행증을 발급하고, 그 대신 곡식을 걷어 군사들을 먹여살리려고 한 것이다. 피난선 크기에 따라 큰 배는 곡식 3석,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의 곡식을 내고 통행첩을 얻고, 통행과 어업 행위를 보장받았다.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자신의 배에 재물과 곡식을 싣고 생명을 지켜줄 이순신의 수군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로통행첩과 같은 규제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거나 거부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가워했다. 그 결과 10일 동안 이순신의 수군은 무려 1만여 석의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순신과 수군들은 자신들을 따라온 피난민들을 고금도와 인근 섬에 안착시켰다. 섬이 안정될 수록 피난민들은 안전을 위해 더욱 몰려들었다. 이순신은 그들을 군사로 확보했고, 전선을 제조할 인력으로 활용했다.
혁신가는 의외로 완벽하게 보수적
▲ 어외도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300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1597년 9월 17일).
▲ 새벽에 출항해 곧장 위도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1597년 9월 20일).
1597년 2월,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때 이순신은 새로 부임한 원균에게 전함 200척, 화약 4,000근, 군량미 9,914석, 대포 300문을 인계해 주었다. 7월이 칠천량 해전의 결과, 이순신이 6년 동안 구축한 수군은 전투중 도망친 배설이 이끈 12척을 제외하고 전멸했고, 화약이나 군량미는 말할 것 없이 남은게 없었다.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저지했던 거점이었던 한산도는 물론, 남해안 전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그 상황에서 이순신이 이룬 13척의 기적은 수많은 백성들이 이순신 주변으로 몰려들게 만들었다. 이순신과 함께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순신과 그의 수군은 일본군과 대적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남해를 떠나 서해로 북상해야 했다. 몇 차례 진지를 옮겨가며 군사를 모으고 전선을 제조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인재가 모이는 이유가 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직후인 1597년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겼지만 수군 운영에 필요한 군사와 군량이 필요했다. 온갖 문제로 답답한 상황에서 해남 현감 류형이 피난민을 군사로 활용하자는 건의를 했다. 적을 피해서 여러 섬으로 피난해 있는 백성들 중에는 군복무를 할 만한 장정들이 많다는 사실에 기초해 그들을 활용하려고 했다. 그 첫 단계는 피난민의 가족을 정착시키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그 뒤 자연스럽게 그들의 일부를 군사로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류형은 고하도와 인근 섬에 피난민을 정착시키자고 이순신에게 건의했고, 이순신은 이를 시행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장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량은 여전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 때 이의온이라는 젊은 선비가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도 같은 ‘해로통행첩’을 제안했다. 해로통행첩을 실시하면서 이순신은 막대한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류형과 이의온의 혁신적 사고를 활용해 수군을 확보했고, 군량도 마련했다. 또 피난민을 정착시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었다.
수군과 군량 모두를 얻은 이순신은 고하도를 제2의 한산도처럼 만들었고, 서해안으로 북상하려는 일본군을 막았다.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서해에서 내려와 남해의 고금도로 본영을 옮겨 보다 적극적으로 남해안 제해권 장악을 시도했다. 고금도의 경우, 이순신이 정착한 이래 피난민이 1,500호(약 7~8,000명)나 거주할 정도로 커졌다. 1598년 여름, 명나라 수군이 고금도 진영에 도착했을 때, 조선 수군을 포함해 총 22,000명이 주둔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수군은 군량 문제를 겪지 않을 정도로 군비가 충실했고, 명나라 수군을 잘 대접해 명나라 군사들이 감동할 정도가 되었다. 만일 이순신이나 참모들이 피난민을 거추장스러운 집단으로 생각했다면, 이순신의 수군은 병력 확보는 물론 군량 부족으로 자멸했을 것이다. 이순신과 참모들은 그와 반대로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사고로 발상을 전환했고, 리더와 참모, 백성들이 모두 동참해 성공시켰다.
모두 긍정 혁신 진짜 혁신
류형과 이의온, 이순신은 드러커가 말한 혁신의 5원칙을 적용해 혁신했다. 첫째, 상황에 대한 철저한 분석으로 피난민들의 현황과 피난 지역, 안전이라는 그들의 욕구를 파악했다. 둘째, 피난민의 말을 경청하고 질문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안전을 보장하고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도록 땅을 제공했다. 셋째, 초점에 집중했다. 이순신과 참모들의 초점은 수군의 재건이었고, 왜군의 서해상 북상 저지였다.
그 결과 누구라도 책상을 칠 만큼 확실한 아이디어이며 동의를 얻을 수 있는 해로통행첩을 실시했다. 그들이 실시한 섬의 둔전이나 해로통행첩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서 시작했다. 고하도에서 시작해 검증했고, 고금도로 옮겨 확대했다. 고하도가 서해안에 한정된 소규모 사업장이라면, 고금도는 남해안까지 포괄하는 대규모 사업장이었다. 또한 그 사이에 왜군들의 침략을 저지했고, 주도권을 계속 확대했다.
해로통행첩의 목적은 아주 간단하다. 수군의 입장에서는 백성과 일본군 간첩을 구별하는 수단이었고, 백성들은 수군으로부터 생명을 보호받는 방법이었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피난하면서 배에 싣고 다니는 곡식의 일부를 수군에 제공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다. 게다가 수군이 지키는 안전한 곳에서 농사도 지을 수 있어 백성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순신의 수군이 되어도 불안한 선택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부하가 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고, 승리를 하면 공로로 표창 받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인 것이 불패의 영웅 이순신이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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