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일본산 은.구리 아시아 화페경제망

백삼/이한백 2014. 7. 14. 16:36

귀금속과 화폐의 세계적 흐름을 조망하는 역사가들은 대개 아메리카의 은 생산과 유통에 주목한다. 워낙 엄청난 양의 은이 전 세계를 돌면서 파장이 큰 사건들을 만들어냈으므로 여기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문제는 아메리카 산 은이 세계의 모든 중요한 화폐 현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처럼 서술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경우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아메리카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산출된 은 역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둘째, 귀금속(금과 은)이 아닌, 상대적으로 저급한 가치를 가진 다른 금속(구리가 대표적이다) 역시 원거리 교역의 대상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특히 주목해서 볼 사례가 일본의 은과 구리의 수출이다.

귀금속과 화폐의 흐름에서 아메리카만큼 일본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산 은과 구리는 중국·인도·동남아로 수출돼 화폐로 쓰였고, 일본은 금을 수입해 환차익을 얻었다. 조선은 일본에 '연은분리법'을 전수했으며 중국-일본간 은 중개인 역할도 했다

일본에서는 16세기 중반에 금광과 은광이 많이 개발되었다가 17세기 중엽부터 쇠퇴해 갔고, 그 이후 동광이 개발되어 구리 생산과 수출이 증가했다. 광산 개발은 원래 다이묘들의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곧 상업 목적이 더 중요해졌다. 특히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중국 비단을 수입하고 그 대금을 결제하는 데에 은이 많이 필요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역은 처음에 중국 푸젠성 상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담당하였다가, 기독교 전도 문제로 말썽을 빚어 포르투갈인들이 축출되고 난 다음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이 사업을 물려받았다.

일본 전체의 은 산출량과 수출량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통계 수치를 제시하기는 힘든 형편이다. 다만 16세기 말 이쿠노 은광에서 히데요시에게 보낸 은의 양이 1만㎏이라든지, 사도 광산의 연 생산량이 6만~9만㎏ 사이로 추정된다는 식의 부분적인 수치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자료들을 이용해 고바타라는 연구자는 17세기 초 일본의 은 수출량이 연 20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수치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한 세기 가까이 일본에서 다량의 은이 해외로 수출된 것은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근대 초 일본은 멕시코에 이어 세계 2위의 은 수출국으로 자리매김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은 생산 증대에서 중요한 핵심 기술이었던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 조선에서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대개 은 광석에는 납이 많이 들어 있어서 은과 납을 분리하는 제련기술 없이는 은 생산이 크게 늘어날 수 없다. 멕시코에서 쓰인 수은을 이용한 아말감법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례이다. 일본의 연은분리법은 원래 조선의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노비 검동(儉同)이 16세기 초에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술이 일본에 전해져서 일본의 은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데에 매우 큰 공헌을 한 데 비해 정작 '조선에서는 이 기술을 까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은 다음으로는 구리가 수출되었다. 사실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은 주로 고액 결제에 쓰일 수밖에 없으므로, 대개 소액거래를 하는 광범위한 사회 계층과 관련해서는 구리가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띈다. 예컨대 인도 내부의 농촌 경제와 연관된 화폐현상을 이해하려면 금이나 은보다는 구리가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일본에서 17세기 후반 새로운 동광이 개발되면서 구리의 생산과 수출이 급증했다. 생산량이 최고점에 달했던 1700년에는 연 5400톤이 생산되었다. 일본 구리는 일부가 중국에 수출되어 화폐 주조에 쓰이기도 했지만,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이 전체 수출의 약 80%를 차지하였다. 벵골, 실론, 말라바르, 구자라트 그리고 다른 어느 곳보다도 코로만델 해안(인도의 동해안) 지역이 중요한 수출 지역이었다. 동인도회사는 그 동안 이 지역에서 직물을 구입하고 그 대금을 금으로 지불해 왔으나 점차 금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대신 구리를 지불수단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은과 구리를 수출하는 대신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금을 수입하였다. 금과 은의 상대가치 면에서 일본의 금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1610년대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금을 가지고 오면 60%의 환차익이 가능했다. 동남아시아와 일본 사이에서도 사정이 비슷해서, 17세기 초에는 인도차이나수마트라, 시암 등지의 금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배로 일본에 들어왔다. 161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한 직원의 편지에는아유타야(오늘날의 타이)에서 일본으로 금을 보낸 결과 35~40%의 이익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자료들을 보면 동아시아 해상세계에서는 귀금속의 상대가치의 차이로 인해 다량의 귀금속이 오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점은 중국과 일본 간 혹은 동남아시아와 일본 간 귀금속 가치 차이가 시간이 가면서 점차 줄어들어 수십 년 뒤에는 거의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시아 내에 아주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귀금속 거래망이 형성되어 원격지 간 귀금속 가격의 조정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국제시장 체제가 등장하는 중요한 표식 중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네트워크에서 조선은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아시아의 거대한 귀금속·화폐 거래망에서 조선이 중요한 가지였다는 점을 밝히는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일본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자체의 은 수요가 증가하면서 은의 해외 수출이 금지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1688년부터 일본 막부가 은 수출을 금지하고 대신 구리를 수출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던 사실이다. 그런데, 다시로라는 연구자는 대마도의 중요 자료인 종가문서(宗家文書)를 이용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은이 수출되지 못했지만 '대마도-조선' 루트를 통해 일본에서 중국으로 약 60년 정도 더 은이 수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거래에서 조선은 세계 최대 은 수요자(중국)와 세계 2위의 은 공급자(일본) 사이에서 중개인 역할을 했다. 이때 조선은 단지 중국과 일본 사이에 길만 빌려준 것일까 아니면 아시아 화폐·상업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일까? 또 조선 자체의 교역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본에서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상상 외로 컸으며, 인삼 수입의 대가로 상당액의 은이 조선에도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지금까지 아메리카산 은 중심으로 서술했던 세계화폐사의 내용이 많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