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사무라이 혼과 총

백삼/이한백 2014. 7. 11. 19:23

사무라이

사무라이층은 인구의 7~10%를 차지할 정도로 컸다. 그런데 소총 사격은 농민이나 도
시 하층민에서 충원된 보병인 아시가루(足輕)의 일이었다. 이들이 강해지면 전통적
귀족집단인 사무라이층의 존재이유가 없어지고 만다.


일본은 총포류의 역사 혹은 더 일반적으로 군사사(軍事史)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사례에 속한다. 1543년에 포르투갈 인에게서 총기 제작을 배운 이후 불과 수십 년 안에 총기의 품질과 양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으며, 소위 '연속발사'를 통해 총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유럽보다 오히려 30년 정도 앞서갔다. 임진왜란 중에 일본을 방문한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라는 피렌체출신 모험가는 거대한 수의 사람들이 전쟁에 차출되어 떠난 뒤에도 이 나라에는 여전히 많은 무사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개 총을 소지하고 있으며 또 이 무기를 아주 좋아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일본은 총기의 제작과 사용 면에서 이대로 계속 발전했을까? 총기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실전에서 충분히 경험한 이상 마땅히 이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들어서자 총포류를 스스로 폐기하고 다시 칼 중심의 군대로 되돌아갔다. 이것은 정말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보인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우선 사무라이들이 소지한 일본도는 분명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일본도로 현대에 만들어진 칼을 내리치는 실험을 한 결과 16세기 칼이 20세기의 칼을 두 동강으로 잘라버리면서도 칼날이 상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일본도의 비밀은 성질이 다른 두 금속을 겹쳐서 만드는 데에 있다. 단단한 철판과 무른 철판을 겹쳐서 두드린 다음 그것을 반으로 접어서 다시 두드려 펴는 것이다.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해서 만든 도신은 우리 눈에는 하나의 철판으로 보이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단단한 철과 무른 철의 층이 무려 400만 번이나 겹쳐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성질을 고루 갖춘 도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무라이들이 칼을 쓰는 데에는 또한 그들만의 특이한 귀족 문화가 배경에 놓여 있다. 충성과 자기희생, 예의 등을 강조하는 무사도가 그것이다. 사무라이들이 대결할 때에는 서로 자신의 출신과 이름을 알리는 인사를 교환하고 나서 영웅적으로 싸우며, 설령 지더라도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 칼은 단지 무기의 한 종류가 아니라 지배계급 문화의 핵심 요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총이 발달한 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변질될 위험이 커졌다. 소총 사격은 농민이나 도시 하층민에서 충원된 보병인 아시가루(足輕)의 일이었다. 이들의 무력이 강해지다 보면 결국 전통적 귀족집단인 사무라이 층의 존재이유가 없어지고 만다. 총포류가 위력을 발하면서 전투 양태도 완전히 달라졌다. 사무라이들이 비장하게 수인사를 나누는 일 따위는 사라지고 다만 가장 효율적으로 화력을 집중해서 적을 섬멸하는 일만 중요해졌다. 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는 총기를 사용하는 보병부대가 기마부대를 눌러 이긴 전투로서 일본의 전술을 크게 변화시킨 중요한 계기였는데, 이 전투 이후 군인들은 총알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고 땅속에 들어가 앉게 되었다. 장렬한 죽음의 미학 운운하는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총기류가 발달하면서 오히려 총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이미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탈리아의 잔 파올로 비텔리라는 장군은 소총 사수들이 안전한 곳에 숨어서 귀족 전사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 자리에서 모든 소총 사수들의 손목을 잘랐다고 한다. 총은 악마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루터가 말한 데에도 이 비슷한 감정이 작용했다. 그러므로 유럽 귀족이나 일본 사무라이나 총에 대한 반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계속 총이 발달한 데 비해 일본에서는 결국 총을 스스로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선 민간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전국의 모든 총과 칼을 수거해서 자유의 여신상의 두 배 크기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모든 총기 생산을 나가하마와 사카이 두 곳으로만 제한하고 총기 제작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월급을 주되 실제로는 아주 소수의 총만 주문함으로써 총기 제작을 고사시켜 갔다.

일본의 총기 포기 현상을 연구한 페랭(N. Perrin)이라는 연구자는 이에 대해 다음 다섯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일본의 사무라이 층은 전체 인구의 7~10%를 차지할 정도로 컸다. 유럽에서보다 귀족층의 수가 워낙 많아서 신기술에 대한 이들의 저항이 훨씬 강했다는 것이다.

둘째, 일본은 섬나라라서 외적에 대한 방어가 용이하다. 적의 침입을 받는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혐오감이 크다 해도 총을 사용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셋째, 일본에서 칼은 '사무라이의 혼'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상징이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칼이 귀족의 상징물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에서는 칼이 사무라이의 명예에 대한 거의 '유일한' 상징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쉽게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넷째, 총에 대한 혐오에 외국인 혐오의 감정까지 덧씌워졌다. 총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고 '기독교도'들이 사용하던 물건이다. 기독교를 철저하게 배척하던 시대에 총은 더욱 기피할 물건으로 여겨졌다.

다섯째, 칼은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도(道)의 경지에서 사용되는 것이지만 총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일본에서 출판된 총기 사용법 지침서를 보면<사진 참조> 총이 결코 아름답지는 않은 무기라는 점에 대해 저자 스스로 여러 차례 변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력 혹은 군사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술적 혹은 기계적인 일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선진적인 요소라고 해도 그것이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에 한 미국 선원이 일본 근해에서 침몰 사고를 당해 일본 땅에 상륙했을 때 그가 본 일본 성에는 실제 대포는 없고 대포를 그린 큰 걸개그림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설사 아주 유용하고 효율적인 기술이라고 해도 그것은 해당 사회의 문화적 맥락에서 용인을 받아야만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은 유럽식 총을 필요에 의해 받아들였다가 문화의 이름으로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