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역사, 소식

난계

백삼/이한백 2014. 6. 16. 11:30

난계 박연 선생은 누구인가?




조선 초기의 문신·음악가. 호는 난계(蘭溪)이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세종 때 율관(동양에서 악률의 표준을 정하기 위해 만든 12개로 된 관)을 만들어 편경을 제작하는 등 조선 초기 음악 완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왕산악·우륵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악성으로 불린다.
1405년(태종 5년) 생원시에, 1411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 후 집현전 교리·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으로 있으면서 당시 세자였던 세종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세종 때는 고려 말 이래의 혼란?수습되고 정국이 안정되어 문물 제도의 정비 사업이 각 방면으로 전개되었는데 그는 음악면에서 세종을 보익하여 국악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426년(세종 8년) 봉상판관 겸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향악(우리 나라 음악을 당악에 대하여 이르는 말), 당악(신라 시대 이후에 전래된 중국 속악), 아악의 율조 등을 조사했으며, 악기의 그림과 악보를 실어서 한 권의 악서를 편찬하자고 상소했다. 그는 아악을 정비하는 데 있어서 먼저 편경과 편종을 조율하는 데 필요한 율관을 만들어 1427년에 편경 12매를 만들었다.
1430년 조정의 조회에 향악 대신에 아악을 쓸 것을 건의하는 등 궁중 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1433년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받고 아악에 종사, 공조 참의·중추원 첨지사를 거쳐 중추원 동지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중추원 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아들 계우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삼조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쳐 낙향하였다.
영동의 초강 서원에 제향되고, 지금도 고향인 이곳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국악축제’가 열려 민족 음악사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문집 <난계유고>, <가훈(家訓)>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