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이승만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

백삼/이한백 2014. 4. 10. 15:33

이승만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1. 이승만이 없었으면 해방직후 남한은 건국도 못된 채 공산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해방직후 남한에서는 좌우합작(左右合作)·남북협상·민족통일전선의 달성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해 보겠다는 감상적인 민족주의의 명분(名分)이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만이라도 공산체제를 굳히려는 소련의 계획에 비추어 볼 때, 통일정부 수립의 희망은 실현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현실(現實)을 가장 잘 간파한 지도자가 이승만(李承晩,1875-1965) 박사였다.

 

이승만이 볼 때,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은 남,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정부 수립을 지연(遲延)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설사 좌우합작의 연립정부가 세워진다 할지라도, 결국은 공산화로 끝날 것이었다. 왜냐하면 폴란드같은 동유럽국들과 중국의 경우처럼, 조직이 약한 우파 세력이 조직이 강한 좌파 세력과 손을 잡게 되면 패배당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없이 혼란만 계속되자, 이승만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자유선거(自由選擧)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자는 대담하면서도 현실주의적인 제안을 했다. 당시에 그것은 정말 대담한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주장할 경우에 분단론자로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방황하고 있던 대중이 그를 중심으로 단결해줌으로써 1948년의 건국(建國)이 가능하게 되었다. 남,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이승만을 극도로 미워하게 된 것은 그가 있음으로 해서 남한을 공산화하지 못한 데 대한 분노 때문인 것이다.

 

2. 이승만은 “동맹”이 약소국의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임을 아는 외교 전문가였다.

 

한말 청년 시절부터 이승만은 약소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맹국(同盟國)이 있어야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한 동맹국은 영토적 야심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는 유일한 강대국은 미국이었다.

 

미국을 동맹국으로 붙잡으려는 이승만의 오랜 꿈은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에 뒤이어 일어난 1950년의 6·25남침을 계기로 실현되었다. 즉, 1953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통해 한미동맹(韓美同盟)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은 국가안보(國家安保)의 수단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1960년대부터 경제성장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3.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중국중심의 대륙문명권에서 미국중심의 “해양문명권”으로 옮겨놓은 문명의 선각자였다.

 

미국과의 군사동맹(軍事同盟)은 수천년간 중국중심의 대륙문명권에 속해 있던 남한지역을 미국중심의 해양문명권(海洋文明圈)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대한민국이 새로운 생활방식인 해양문화(海洋文化)를 받아들임으로써 대륙문화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북한지역과 문명적으로 달라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의 통일정책은 북한을 자유주의(自由主義的)인 해양문명권으로 끌어 들이려는 데 중심을 두게 되었다.

 

4. 이승만은 새로운 “해양문화”에 알맞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를 보존하고 육성하려 했다.


한국인들이 해양문명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그 수준(水準)에 맞도록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이승만은 자신부터 그러한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배재학당, 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을 거치면서 최고수준(最高水準)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세계어인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대한민국 국민을 미국 국민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는 그의 원대한 꿈은 의무교육의 실시로 시작되었다. 특히 건국초기에 인재(人才)가 부족했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엘리트’를 보존하는 한편, 그것을 육성하기 위해 외국유학을 적극 권장했다. 그 때문에 경제적 여건이 어려웠던 그의 통치기에, 5천명 이상의 정규유학생과 1만 명 이상의 군인 연수생이 미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해서 길러진 새로운 ‘엘리트’는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5. 이승만은 ‘국가안보’와 ‘치안’이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새로운 해양문화(海洋文化)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집단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중국적 생활 방식”에 젖어 있던 한국인들에게는 자유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미국적 생활방식”은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시위와 폭동이 수없이 일어났다.

 

그러한 혼란 상태는 주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타도하려는 혁명운동(革命運動)에서 오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 직후에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혁명가(革命家)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그는 국내,외로부터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6. 많은 과오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깬 적이 없었다.

 

오랜 미국 생활에서 그는 “정치적 자유(自由)”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틀” 속에서 살았다.

 

그 때문에 그는 6·25전쟁의 극한 상황에서도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렀다. 국회를 해산하거나 헌법을 정지시키지도 않았다. 그가 주도해서 도입한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도 끝까지 유지했다. 야당의 존재를 당연하게 보았기 때문에 자유당과 민주당을 주축으로 하는 양당제도를 출현케 했다. 언론자유의 기본골격도 유지되었기 때문에, 한민당계의 동아일보와 흥사단계의 사상계가 그의 정부를 마음 놓고 비판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건국의 아버지”로서의 이승만을 결코 비켜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싫든 좋든 간에 그는 이미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의 뿌리와 토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