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자유로의 대탈출

백삼/이한백 2014. 3. 31. 17:36

편집자 주] 한국사진기자협회는 1968년부터 매년 한 해 동안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을 엄선한 『보도사진연감』을 꾸준히 발간해왔습니다. 연감에 실린 보도사진은 사회 전반의 현상을 카메라를 통해 담은 것으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획시리즈 '한국의 보도사진'(1967-1979)은 역사의 현장을 발로 뛴 사진기자들의 혼신의 노력이 담긴, 그래서 그 자체로 역사가 된 보도사진을 소개하고자 마련된 코너로 매주 2회(월/목) 연재됩니다.

↑ ▲ 자유에의 대탈출 : 1967년 3월 22일 오후 5시 40분 판문점 군사정전위 242차 본회의가 끝나자 취재 나온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 씨가 회의장 앞에 서 있는 UN군측 대표인 준장 밴 클러프트의 세단에 뛰어올라 북한 경비병들의 제지를 뚫고 전속 남하, 극적인 탈출에 성공했다. 미8군 제공 사진.

↑ ▲ 자유 찾은 안도의 미소 : '러시!, 러시!' 적초소 차단기를 아슬히 돌파, 사선 넘은 필사의 25초. 이날 오후 7시 10분 서울 용산의 미 헬리포트에 도착한 이수근 씨는 긴장과 흥분에 창백한 낯빛이었다. 1967년 3월 22일. 김운영 기자

이수근은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다. 그는 1967년 3월 22일 오후 판문점에서 열린 제242차 군사정전회의를 취재하다가 회의가 끝나자 유엔군 측 대표인 준장 밴 클러프트의 승용차에 뛰어 올라 탈출에 성공했다. 정부는 그가 북한의 거물이며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해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이수근은 거액의 정착금과 국민 성금을 받았으며 이후 남한에서 반공 순회강연을 가졌다. 대학 교수와 결혼식도 올렸다. 그러나 그는 이후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해 북한으로 보냈다는 혐의를 받게 됐다.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못 견딘 이수근은 1969년 1월 위조 여권을 이용해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중정 요원에게 체포되고 중정은 이수근을 '위장 귀순한 이중간첩'이라고 발표했다. 이수근은 검거된 지 6개월 만에 사형을 당했다. 사형 39년 만인 2008년 12월 위장간첩이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이 내려졌다.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왔던 이수근에 가해진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한국의 보도사진』- 제3공화국과 유신의 추억(한국사진기자협회 엮음,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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