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용감한 우파 변호사, 태윤기를 아십니까

백삼/이한백 2014. 3. 24. 10:48

③ 축복받은 간첩들

간첩 조작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재심에서 무죄를 받는 '간첩'들이 많지만 그 엄혹했던 독재정권 시절에도 간첩 사건에서 무죄를 받는 일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비록 상급심에서 뒤집혀 결국 사형이 집행되었지만 조봉암도 1심(1958년 7월, 유병진 판사)에서 간첩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조봉암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나오기 직전은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간첩죄에 대해 가장 높은 무죄 비율이 나온 시기였을 것이다. 1958년 1월부터 5월까지 서울지방법원에서 간첩죄로 재판받은 50명 중 34%에 해당하는 17명이 1심에서 무죄를 받았고, 집행유예가 나온 사람도 2명이었다. 조봉암뿐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온 박정호 사건, 장건상·김성숙 사건, 류근일(<조선일보>의 그 류근일!) 사건 등이 모두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1960년대에 화제가 된 조작간첩 사건으로는 1962년 11월 무기징역을 받은 지 11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로 판명된 김성구 사건을 들 수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문전걸식을 하던 15살 소년 김성구는 시민증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렸다. 혹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간첩이 되어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11년이 흐른 뒤, 그 어머니가 보관하던 시민증이 재심에서 증거로 제출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고문에 의한 자백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이 사건의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한 이는 뒤에 1971년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로 사법파동(현직 판사들의 집단사표제출 사건) 당시 중요한 구실을 했던 유태흥 판사였다. 가슴 아픈 일은 그가 대법원장으로 있었던 1980년대 전반은 가장 추악한 간첩 조작이 빈번하게 일어난 시기였다는 점이다.


재일동포 사건 도맡은 태윤기
웬만한 인권변호사들이 무색
예비역 대령에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결국 안기부에 끌려갔고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1990년대 거치며 고문 의하거나
변호인 조력 받지 않은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게 된 법원
그 법원의 상식이 회복되면서
조작 간첩들에게 희망 생겼다


송씨 일가 무죄, 발칵 뒤집힌 안기부

사법파동과 유신을 거친 1970년대에는 사법부가 완전히 평정된 탓인지 간첩 사건에서 무죄가 난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1980년대에도 드물게 간첩 사건에서 무죄가 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대법원에서 두 번이나 무죄 판결이 나왔던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이다. 1심과 2심 재판은 대체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원했던 대로 진행되었지만 사건이 대법원으로 올라가자 안기부는 긴장했다. 사건의 주심을 맡은 이일규 대법원 판사가 그 직전 재미교포 홍선길 간첩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이일규 판사는 엄혹했던 시절 송씨 일가 조작간첩 사건에 무죄 판결을 내린 덕에 민주화 초기에 대법원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기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송씨 일가 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안기부는 앞으로 간첩 수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발칵 뒤집어졌다. 안기부는 이일규에게 보복하기 위해 한 달 가까이 그를 미행했지만, 고지식한 이일규는 집과 대법원만 오갔을 뿐이고, 밥도 구내식당에서 먹거나 밖에서 먹어도 대법원 판사끼리만 먹었고, 두 번 골프 친 것도 대법원 판사끼리만 쳐서 아무런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다.

송씨 일가의 중심인물인 송기복 선생과 나눈 이야기이지만, 송씨 일가는 간첩으로 조작되는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 중에서는 '축복받은 간첩'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황인철, 홍성우, 조준희, 박재승, 이범열 등 당대 최고의 인권변호사들을 만났고, 함세웅 신부 등 일부이지만 사회운동 세력과 종교계의 관심과 지원을 받았고, 좋은 판사를 만나 대법원에서 무죄도 받았다.

1980년대의 조작간첩 사건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김헌무 판사이다. 진도 간첩 사건의 1심 재판장이었던 김헌무는 아무 증거도 없는 박동운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려 지탄을 받았다. 석 달 뒤 김헌무는 살인 혐의를 쓴 고숙종 여인 사건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의 증거능력을 배척하는 획기적인 판결을 내렸다. 김헌무는 1987년 2월 재일동포 심한식에 대한 간첩사건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때 전두환은 '간첩이 무슨 증거가 있다고 무죄 판결을 하느냐. 아직도 이런 판사가 있느냐. 이런 판사가 어떻게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되었느냐.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은 뭐 하느냐'고 짜증을 내 사법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헌무는 한 달 뒤 납북 어부 강종배에게, 영장 없이 87일간의 장기 불법구금 상태에서 이루어진 피고인의 자백을 인정할 수 없다며 간첩죄 부분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일한 김헌무는 원래 티케이(TK) 본류에 속한 극히 보수적인 인물로, 선관위가 "노무현 발언은 선거법 위반"이라고 결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바 있다. 김준보 간첩 사건에서 장기간의 불법구금과 고문 상태에서 이루어진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무죄 판결을 내린 이용우 판사도 뒤에 대법관이 된 뒤 2004년 9월 대법원 판결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정면 비판했다. 조작간첩에 대한 판단은 진보·보수의 이념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조작간첩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보수적인 인사들이 양심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조작간첩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은 태윤기 변호사이다. 태윤기는 "일본 거점 우회침투 간첩만 총 14건을 수임"했다고 안기부 보고서에 나올 정도로 억울한 재일동포 사건을 도맡아왔다. 태윤기가 웬만한 인권변호사들도 꺼리던 간첩 사건을 이렇게 많이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장준하와 마찬가지로 일제 말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투신한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군법무관 출신 예비역 육군대령이었기 때문이다. 흠잡을 수 없는 보수 우파 경력의 태윤기는 용감하게 조작간첩들을 위해 일하다가 안기부에 끌려가고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태윤기는 안기부가 수사한 재미동포 홍선길의 무죄 판결을 끌어낸 데 이어, 또다시 안기부가 수사하여 1심과 2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재일동포 손유형 사건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판결을 받아냈다. 안기부는 이 사건을 고등법원에서 다시 사형을 선고받게 만들었는데, 대법원 재상고심이 벌어지는 가운데 태윤기는 일주일간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태윤기가 안기부에 잡혀간 이유는 태윤기가 일본에 있는 손유형의 가족에게 1, 2, 3심과 파기환송심 판결문과 공판조서 등을 복사해 주었다는 것이다!

변호인이 일주일간 안기부에서 감금조사를 받는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손유형은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안기부는 공판기록 해외유출을 문제 삼아 태윤기를 잡아왔지만, 변호인이 기록을 피고인 가족에게 주었다고 문제 삼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태윤기가 법원에서 공판기록을 복사할 때, 방대한 공판기록을 복사하느라 고생한 법원 직원에게 고맙다고 저녁이나 하라고 인사한 것이었다. 안기부는 이를 최고 징역 15년에 처할 수 있는 뇌물공여죄로 몰고 갔다.

따뜻한 손 내밀었던 그들을 기억하자

태윤기는 형사처벌은 면했지만 존경받는 판사와 변호사들도 참여한 징계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변호사 제명 결정을 받았다. 태윤기가 대법원에 제명처분과 관련하여 재항고했을 때 안기부는 대법원 판사 정태균에게 '조정'하여 기각 결정을 내리게 했다. 태윤기는 6월항쟁 후 징계위원들과 징계위의 조사담당검사 최병국(부림사건의 그 최병국)을 서울지검에 고발했는데 최병국이 공안2부장으로 있던 서울지검은 피고소인 조사도 하지 않고 이들을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고검과 대검을 거쳐 태윤기는 마지막으로 헌법재판소를 찾았으나 징계위원회의 한 명이었던 조규광이 소장으로 있던 헌법재판소는 태윤기의 헌법소원에 기각 결정을 내렸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법원의 변화를 가져왔고, 법원이 바로 선 것은 억울한 조작간첩 사건이 거의 사라지게 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를 거쳐 가면서 법원은 고문에 의한 자백이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않은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고, 모호하기 짝이 없던 '반국가단체 구성원과의 지령수수 관계'에 대해 상대방이 북한 공작원임을 알아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법원이 정말 사람들이 모르고 접근할 수 없는 것만을 국가 기밀로 인정하는 상식을 회복하면서 조작간첩은 조금씩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조작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에게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돌을 던지고 침을 뱉은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의 억울함에 손잡아 주었던 이웃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차풍길이 간첩이 되었을 때 안기부나 경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탄원서를 써준 수백명의 이웃들이 있었고, 엄마가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 가 있을 때 아이들을 잘 돌보아 전교 학생회장까지 만들어준 담임선생님과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억울한 조작간첩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고 자기 일처럼 열심히 뛰어준 인권운동가와 인권변호사들이 있었고,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과거의 선배들이 범한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한 재심 판사들도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조금씩 조금씩 분단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동안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국가정보원이 우리들 가슴을 예리한 칼로 북북 찢어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