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1592년 임진왜란 : 한반도, 지정학적 요충지가 되다

백삼/이한백 2014. 3. 19. 19:13

16세기 중기까지의 일본은 간헐적으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국가들을 괴롭히는 처치 곤란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이 이 국가들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당시 한반도와 중국 지역 국가들의 존망을 결정한 외부 세력은 주로 북아시아의 민족들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중기에 이르러 유라시아 동해안의 일본열도가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게 된다. 분열되어 있던 일본열도(오늘날의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제외)를 통일하려 한 오다 노부나가의 이질적이고도 이단적인 야망이 시작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을 통일한 뒤에 대륙을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가졌다고도 하는데, 그의 이러한 꿈은 부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는, 김일성의 생전 지시사항을 실현하는 것을 통치의 대의명분으로 삼는 김정일·김정은의 ‘유훈통치(遺訓通治)’ 체제와 비교할 수 있다. 권력을 장악한 뒤부터 사망까지의 도요토미를 보면, 그가 능란한 통치술을 구사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그의 권력의지가 어디를 향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들 대신 손자를 정권의 계승자로 내세우고 섭정을 한 이유는 무엇인지? 1592년에 이 세계의 어디까지를 정복할 심산으로 대한해협 너머 대규모 군대를 보냈는지? 자신의 권력 일부를 양도해 주었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뒤를 이을 아들이 태어난 직후에 할복으로 몰아간 것은 과연 그의 정상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아니, 마치 1941년에 하바롭스크 근처에서 태어난 김정일을 1942년에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북한과 같이, 애초에 그가 몇 년 며칠에 태어났는지부터가 불확실하다. 그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잘 알 수 없다. 여러 문헌에서는 도요토미의 아버지를 기노시타 야에몬(木下 右衛門)이라고 하며 이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노시타는 원래 농민이었다는 설, 하급 병사였다는 설, 아주 천한 신분의 사람이었다는 설 등, 도요토미의 아버지를 둘러싼 정보는 매우 혼란스럽다. 도요토미가 생전부터 이미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아버지의 존재를 말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기도 했기에, 태양의 아들을 낳은 것이 되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마치 성모 마리아와 같이 성스러운 존재로서 무한한 애정을 표현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어머니가 교토의 덴노(天皇)를 모시던 궁녀였는데, 어떤 귀족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얻은 뒤에 고향에 돌아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이미지 참조>
   
   이렇듯 도요토미가 과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어디에 속한 사람이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일본에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는 과정에서 작용했을 권력의지의 지향점, 일본 바깥세계에 대한 관념, 자신의 사후에 도요토미 정권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할지에 대한 구상 등등 그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통일된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는 해가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에혼히요시마루’. 19세기 중기. 개인 소장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학설이 그렇듯이, 이들 다양한 의견은 그 자체로 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 서 있는 곳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알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도요토미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궁극적’ 목적이 조선의 정복이었다는 한국 일각의 주장은, 한국을 ‘선량한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일본을 그 선한 중심에 적대하는 ‘악의 축’으로 설정하는 기독교적 관점에 기반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를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해석하고 빛이 최후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믿은 조로아스터교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그 이원론(二元論) 말이다.
   
   모든 집단이 자기 집단을 이 세계에서 가장 유의미하고 선량한 존재로 간주하고 집단 바깥에 사악한 적대 세력을 설정하는 것은, 자기 집단의 존속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행위이다. 다만 그러한 관점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기 집단의 그러한 세계관에 대해 바깥세계로부터 동조를 구하고자 할 때이다. 2014년 현재 한국은 조선어 탄압, 731부대의 생체실험, 종군위안부 문제 등을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인에 대해 저지른 범죄’로서 세계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안은 한·일 간에 국한되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이 인류의 존엄성을 훼손한 보편적 문제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여러 세력은 이들 사안을 한·일 간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데에서 벗어나 20세기 전반에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마찬가지의 피해를 입은 중국 및 2차대전 당시의 연합국 시민들, 나아가 인류 보편의 문제로서 일본국을 비판하는 일본계 미국인 마이클 마코토 혼다(Michael Makoto Honda) 의원 등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일본’을 한 덩어리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기존의 방식을 폐기하고, 조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언어를 쓰는 것을 금지당하고 학살당한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 묵묵히 징용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양심적 일본인’들과의 연대를 본격화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성숙해졌다는 증거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의 궁극적 목적이 조선에 국한된다고 보는 것은 전쟁 전후로 도요토미가 발급한 여러 문서와 충돌할 뿐 아니라 일본의 궁극적 목표가 자국임을 안 명나라가 20여만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해 전선(戰線)을 한반도에서 교착시킨 것이라는 당시 조선과 명의 해석과도 엇갈린다.
   
   한편 이 처리 곤란한 난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의견은 “나이가 들어서 판단력이 흐려져 과대망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유라시아 동부를 뒤흔들고 한반도를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시킨 장기간의 국제전을 지나치게 도요토미 개인적인 이유로 환원시키는 인상을 준다. 역사가 필연보다 우연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주도할 수 있는 일개인의 사적인 사정이 결과적으로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움직임은, 역사 지리적 상황이 특정한 국면에 이르렀기 때문에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국수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A급 전범 용의자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에 대한 특별한 감정에서 비롯된 신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개인적 감정이 일본 국가의 정책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경제 불황 속에 자신감을 잃고 2011년의 도쿄전력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생존의 위기를 느낀 일본 사회의 피해의식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다. 나아가 명백한 우경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100여년 전처럼 세계에 위협을 줄 수 없으며 또한 임진왜란이라는 대형 사고를 친 뒤에 ‘쇄국(鎖國)’ 체제로 숨어버린 400여년 전처럼 할 수 없는 것은, 세계의 정치·경제적 구조가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해석할 때 지나치게 개인적 이유를 강조하고 그 사회적 배경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센세이셔널한 영웅주의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을 살펴보면, 한족(漢族)과 여러 비(非)한족 집단은 현재의 중국 동부 지역의 황하와 양쯔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을 거듭하였다. 물론 북아시아 지역의 집단들은 한족의 영역뿐 아니라 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 등으로도 세력을 팽창하였기 때문에, 이들 집단이 한족의 영역만을 절대시하여 정복을 시도했다고 말하는 것은 중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아무튼 중국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비한족 집단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면 그 집단의 거주지만큼 ‘중국’의 영역이 확장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최근세에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만주, 즉 현재의 동북삼성(東北三省) 지역을 비롯하여 몽골·티베트·위구르 등이 현재의 중국이라는 국가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예일대학의 피터 퍼듀(Peter C. Perdue) 교수는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이라는 책에서, 한족이 지배하는 현대 중국은 ‘이민족’ 정권이었던 청나라를 증오하면서도 그 이민족 정권이 만들어준 유산은 모두 계승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렇듯 중국사의 중심을 한족으로 두고 ‘이민족’이 한족에 흡수된 것으로 보아온 기존의 중화주의(中華主義) 관점을 비판하는 학설을 신청사(新淸史·New Qing History)라고 하며, 아시아·태평양 세력으로서 중국의 지나친 팽창을 억제하고 유라시아 동부의 여러 국가들을 후원하는 미국의 국책 학문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 피터 퍼듀의 책 ‘중국의 서진’

이렇듯 서로 밀고 밀리던 경쟁관계를 갖던 한족과 비한족 집단들이었으나 이른바 중국 ‘주변’ 지역의 집단들 가운데 이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집단이 둘 있었으니, 그 하나가 한반도의 한국인이고 또 하나가 일본열도의 일본인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되는 집단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부여·고구려·발해 등은 동북삼성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한반도까지 영역을 확대하였으나 끝내 황하 유역으로 서진(西進)하지 않았다. 한민족의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해 16세기 조선의 임제(林悌)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전했음을,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전한다. 즉 “자신의 죽음에 임하여 아들들이 슬퍼하자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황제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추한 나라에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라며 곡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만약 오대(五代)나 육조(六朝)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천자(天子)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농담 삼아 말하고는 했다고 한다.(권9 ‘인사문’. 한국고전종합DB에 의함) 실제로는 신라나 발해, 고려 등이 한때 연호(年號)를 세우고 황제국을 선언한 적이 있지만, 임제가 했다고 전하는 말을 음미하면, 그는 한반도에 있던 여러 국가들이 한족의 영역을 정복하지 않은 채로 ‘좁은’ 한반도에서 칭제건원(稱帝建元)한 것은 명실상부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이익은 임제가 농담을 잘했다고도 적고 있으니, 임제가 정말로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일종의 농담이라고 생각되지만 촌철살인(寸鐵殺人)임에는 틀림없다.
   
   한편 일본열도의 세력들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백제 지원군이 당나라 군대와 충돌하고 왜구가 명나라의 해안 지역을 약탈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세력과 충돌하였다. 그러나 원양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서 해외로 보낼 만큼의 정치적 통일성이나 원동력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비한족 집단들과는 달리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족의 국가들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일은 없었다. 임진왜란은 이러한 상황에 근본적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 전쟁이었다.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거치며 풍부한 실전(實戰) 경험을 지닌 대규모 병력이 생기고 유럽 해양 세력들과의 접촉을 통해 해외 정보를 확보하게 되면서, 16세기 후기의 일본은 여타 비한족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명나라를 정복할 뿐 아니라 인도까지 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도요토미는 자신의 목표가 명나라임을 선언하고 조선이 그 선봉에 설 것을 요구했다. 물론 전쟁 발발 후 1년도 안 되어 중국 정복이 불가능함이 명백해지면서 도요토미의 야망은 꺾였고, 애당초 자신의 심복들인 서일본 세력을 주력 부대로 동원한 바람에 일본 국내의 정치 군사적 기반이 약화되어 도요토미 정권은 2대로 단명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가 ‘늙음에서 기인한 오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족의 영역을 지배하고자 한 모든 비한족 세력들의 시도가 성공한 것이 아니고 만주족과 같이 우연이 겹치며 명나라의 정복에 성공한 사례도 있다. 따라서 도요토미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명나라의 정복을 시도한 것은 한족과 비한족 세력들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합한 수천 년의 패턴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은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로 세계사에 등장하였음을 알린 사건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한반도가 북아시아 평원과 황하·양쯔강 지역의 외곽에 위치했기 때문에 한족과 비한족 세력 간의 충돌로부터 입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족의 중국을 정복하려 하자, 한반도는 험난한 동중국해를 항해하는 대신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교두보로서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원양 항해 기술이 오늘날과 같이 발달되어 있지 않던 당시에 일본이라는 유라시아 동해안의 신흥 세력이 자국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주요 루트인 한반도를 자국의 바깥 방패(번병·藩屛)로 삼아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16세기 후기에 한반도가 갖게 된 이러한 지정학적 동력(動力)은 120년 전에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여,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한 끝에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은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세력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몽골·러시아 등의 대륙 제국에 대하여 에스파니아·포르투갈·영국·미국 등의 해양 제국 모델이 세계사의 헤게모니를 잡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 육지보다 바다에서 움직이는 것이 더욱 편리해진 현재, 이러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2014년 현재 중국과 일본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동중국해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이다. 또한 남중국해의 영해권을 두고 베트남·타이완·필리핀·브루나이·말레이시아·미국과 중국이 전개하고 있는 새로운 전국시대는,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위기를 상대적으로 완화시켜 주는 효과를 낳고 있다. 한국의 일부 세력은 여전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노리며 북한에 접근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이 북한을 번병으로 거느리고 있다고 해석한다. 필자는 이를 ‘역사가 반복된다’는 가설을 지나치게 기계론적으로 해석한 데에서 비롯된 오류이자, 일본을 세계사 속의 불변하는 절대 악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적 종교관이며, 기술 문명의 발달이 이끌어낸 인류사의 비가역적(irreversible)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부의 변경이었던 16세기 중기 이전, 일본열도 세력의 대두로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해안의 지정학적 요충지가 된 임진왜란부터 20세기 전기에 이어,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세 번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인류 문명이 현재의 교통과 통신 기술을 폐기하지 않는 한, 한반도의 주민들은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험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상상력으로 미래 전략을 구상해야 할 것이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