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징비록 - 3회 - 임진왜란의 발발과 서전의 붕괴

백삼/이한백 2014. 1. 7. 09:50

경상 우병사 조대곤을 경질하고 특지로 승지 김성일이 이를 대신하게 하니, 비변사에서 “김성일은 유신(儒臣)이므로 이러한 때 변방 장수의 임무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라고 아뢰었으나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므로, 김성일은 배사(拜辭)하고 임지로 떠났다.

4월 13일에 왜병이 국경을 침범하여 부산포를 함락시키니 첨사 정발*이 전사했다. 이보다 앞서 왜국의 평조신, 현소 등이 통신사와 함께 와서 동평관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비변사에서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사사로이 술자리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면서 조용히 그 나라의 사정을 묻고 정세를 살핀 다음 방비할 계책을 마련하자고 계청했더니, 임금께서 이를 허락하셨다.

☞ 정발 : 조선시대 무신으로 자는 자고, 호는 백운, 본관은 경주다. 선조12년(1579)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이 되고 내외관을 역임하여 선조25년에 부산진첨사가 되었다. 이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은 함락되고 전사했다.

김성일이 동평관에 가니 과연 현소가 “중국이 오랫동안 일본과 국교를 끊고 조공을 통하지 못하게 하여 평수길이 이 일을 마음속으로 분개하고 부끄럽게 여겨서 싸움을 일으키고자 하니, 조선에서 먼저 이 말을 중국에 알려 조공할 길이 통하게 된다면 조선에도 반드시 별일이 없을 것이오, 일본 66주의 백성 또한 전쟁의 고통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은밀하게 말했다.

이에 김성일 등이 대의로써 그들을 책망하고 타이르자, 현소가 “옛적에 고려가 원나라 군사를 인도해서 일본을 공격했으니, 일본이 이 일 때문에 조선에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은 형세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는 다시 물어보지도 않고 조신과 현소는 돌아가버렸다.

신묘년(선조24년, 1591) 여름에 평의지가 또 부산포로 와서 변장에게 “일본이 명나라와 국교를 맺고자 하는데 조선이 이 말을 전해주면 다행한 일이나, 그렇지 못하면 두 나라 사이가 장차 평화스러운 기운을 잃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곧 큰일이므로 와서 알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변장이 그대로 위에 알렸으나 이때 조정의론이 일본국과 통신한 것을 후회하고 또 그들의 거친 태도에 노하여 회답하지 않았다. 평의지는 10여 일 동안 배를 대고 머물러 있다가 불쾌한 마음으로 돌아가버렸다. 그 후로는 왜인이 다시 오지 않았고 부산포와 왜관에 상시 머물고 있던 왜인 수십 명도 점차 돌아가고, 한 관이 거의 텅 비게 되니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이 날(4월 13일) 왜적의 배가 대마도에서 바다를 덮어오는 것을 바라보니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 첨사 정발이 절영도에 나가서 사냥을 하다가 허둥지둥 성으로 돌아오자 왜병이 뒤따라와서 육지에 올라 사면에서 구름같이 모이니 삽시간에 성이 함락되었다.

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이 너무나 큰 것을 보고 감히 군사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왜군은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포 첨사 윤홍신*은 힘껏 싸우다가 적에게 피살되었다.

☞ 박홍 :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자는 청원, 본관은 울산이다. 명종11년(1556) 무과에 급제했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경상좌수사가 되어 적군의 형세가 강성한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서 도주했다. 평양으로 피난 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성천에서 우위대장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전사했다.

☞ 윤홍신 :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진천 현감을 거쳐 임진왜란 때 다대포 첨사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좌병사 이각은 이 소식을 듣고 병영에서 동래로 들어갔는데, 부산이 함락되자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더니 말로는 밖에 나가서 적을 견제하고자 한다고 핑계를 대고 성에서 나와 소산역으로 물러나 진을 치려고 했다. 이에 부사 송상현*이 자기와 남아서 같이 성을 지키자고 말했으나 이각은 듣지 않았다.

☞ 송상현 : 조선시대의 절신으로 자는 덕구, 호는 천곡 · 한천, 본관은 여산이다. 선조9년(1576)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호조 · 예조 · 공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선조24년(1591)에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군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성중의 군민을 이끌고 항전했으나, 성이 함락될 무렵 조복으로 갈아입고 단좌한 채 적병의 칼날을 맞고 사절(死節)했다.

15일에 왜병이 동래로 몰려오자 송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서 반나절 동안이나 싸움을 독려했으나, 성은 함락되었고 송상현은 꿋꿋하게 버티고 앉아 적의 칼날을 받고 죽었다. 왜인들도 그가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키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시체를 관에 넣어 성 밖에 매장하고 말뚝을 세워 표지했다.

이에 각지의 군(郡) · 현(縣)은 풍문만 듣고 달아나 무너지기 시작했다. 밀양 부사 박진*은 동래로부터 빨리 돌아와서 작원의 좁은 길을 막고 적을 방어하고자 했는데, 적이 양산을 함락시키고 작원으로 몰려와서 그곳에 수비하는 군사가 있는 것을 보자, 산 뒤로부터 높은 곳으로 개미떼처럼 붙어 흩어져서 올라오니 좁은 길을 지키던 우리 군사들은 바라만 보고서 모두 흩어져버렸다. 이에 박진은 밀양으로 서둘러 돌아와서 불을 놓아 병기와 창고를 태우고는 성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각은 병영으로 빨리 돌아와서 맨 먼저 제 첩을 피란시키니 성안의 인심이 흉흉해서 군사들은 하룻밤 동안에도 몇 번이나 놀랐다. 이각이 새벽녘에 몸을 빼내 도망치니 많은 군사들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 박진 :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자는 명보, 본관은 밀양이다. 선조22년(1589) 심수경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선조25년(1592)에 밀양 부사가 되었다.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한때 패전했으나 후에 경상좌도 병사가 되어 영천에서 왜적을 격파하여 공로를 세웠고, 특히 비격진천뢰라는 병기를 사용하여 경주성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시호는 의열이다.

적은 길을 나누어 휘몰아 와서 여러 고을을 잇달아 함락시켰으나, 우리는 한사람도 감히 막는 사람이 없었다. 김해 부사 서례원*은 성문을 닫고 성을 지켰는데, 적이 성 밖에 있는 보리를 베어 참호를 메우니 잠깐 동안에 높이가 성과 같아져 이내 성을 넘어 들어오니 초계 군수 이모는 먼저 도주해버렸으며, 서례원도 뒤따라 도망치니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 서례원 :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선조25년 김해 부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군과 싸웠으나 패전했고, 이듬해 진주 목사가 되었는데 적의 기세에 눌려 숲속에 숨었으며 성이 함락되자 도망치다가 적에게 살해되었다.

순찰사 김수는 맨 처음 진주에 있었는데 왜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동래로 달려오다가, 중로에서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우도로 도로 돌아와서는 어쩔 줄 모르고 다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효유하니, 이 일로 도내가 텅 비게 되어 더욱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용궁 현감 우복룡*은 그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으로 가다가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는데 하양 군사 수백 명이 방어사에 소속되어 상도로 가다가 그 앞을 지나가면서 군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자 이를 괘씸하게 여겨 붙잡아서 반란하고자 하는구나 하고 꾸짖었다. 이에 하양 군사들이 병사(兵使)의 공문을 내보이고 변명하려 들자, 우복룡은 자기 군사들에게 눈짓하여 그들을 에워싸고 모두 쳐 죽여서 시체가 들에 가득하게 되었다. 순찰사 김수는 이것을 공을 세운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우복룡은 통정대부로 승진되고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가 되었다. 그 후에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와 과부들이 사신이 올 때마다 말 머리를 가로막고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으나, 우복룡이 이때 명성이 있었으므로 아무도 원통한 사정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 우복룡 :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견길, 호는 구암 · 동계, 본관은 단양이다. 선조6년(1573) 사마시에 합격해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용궁 현감이 되어 그 고을을 끝까지 지켜 그 공으로 안동 부사로 승진되었다. 후에 벼슬이 홍주 목사, 충주 목사를 거쳐 성천 부사에 이르렀다.

☞ 정희적 :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사훈, 본관은 하동이다. 선조 원년(1568) 문과에 급제했고, 벼슬이 감사에 이르렀다.

17일 이른 아침에 변방의 보고가 처음 조정에 도착했으니 이것은 바로 좌수사 박홍의 장계였다. 대신들과 비변사에서는 빈청(조정의 대신이나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국사를 의논하던 곳)에 모여 임금에게 뵙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곧바로 글을올려 주청하여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로 내려 보내고,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로 내려 보내고, 조경*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로 내려 보내고, 유극량*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지키게 하며, 경주 부윤 윤인함*은 유신으로 겁이 많다 하여 전에 강계 부사로 있던 변응성을 기복(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나,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상제의 몸으로 출사함)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았는데, 모두 제각기 군관(장교)을 가려서 데리고 가도록 했다. 잠시 후에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또 이르렀다. 이때 부산은 적에게 포위되어 사람들이 통행할 수도 없었는데, 박홍이 올린 장계에는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안에 가득하므로 이것을 보고 성이 함락된 줄 알았습니다” 라고만 되어 있었다.

☞ 조경 : 조선시대의 무신. 무과에 급제한 후, 선조24년에 강계 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방어사가 되어 황간 · 추풍령에서 적군과 싸웠으나 패전했다. 이 해 겨울 수원 부사로서 적군에게 포위된 독산성의 권율을 응원, 이듬해 권율과 함께 행주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가선대부로 승진되었다. 이해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우영장을 겸임, 선조29년(1596)에 훈련대장이 되었다. 선무공신 삼등에 책정되고, 시호는 장의다.

☞ 유극량 : 조선시대의 무장. 선조 원년에 급제한 후, 위장을 거쳐 선조24년에 전라 수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 때 조방장으로서 죽령을 수비하였으나 패전했고, 이어서 수어사 신할의 휘하에 들어가 임진강에서 적군을 막다가 전사했다.

☞ 윤인함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0년(1555) 식년무과에 급제했고, 명종18년(1563)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경주 부윤으로서 적군을 방어하지 못한 죄로 좌천당했으나, 경주가 함락되자 의병을 모집해 적병을 많이 죽였다. 선조30년에 형조참판으로 명장영위사를 겸임하여 황주로 갔다가 평양에서 병사했다.

이일이 서울에 있는 날쌘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가고자 하여 병조에서 선병(選兵)한 문서를 가져와 보니, 모두 여염이나 시정에 있는 백도(군사의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며 서리와 유생이 반수나 되어, 임시로 점검하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과거 때 글을 지어 올리는 종이)을 들고 있으며 서리들은 평정건(각관사의 서리가 머리에 쓰던 두건)을 쓰고 있어서, 군사 뽑히기를 모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만 뜰에 가득할 뿐이었고 보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일이 명령을 받은 지 3일이 되도록 떠나지 못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이일을 혼자서 먼저 가게 하고 별장 유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가도록 했다.

내가 장계를 올리기를 “병조판서 홍여순은 임무를 다할 수 없으며 또 군사들의 원망이 많으니 바꾸어야 되겠습니다” 하자, 그를 대신하여 김응남을 병조판서로 삼고, 심충겸*을 병조참판으로 삼았다. 대간(사헌부와 사간원의 총칭)이 또 계청하기를 “마땅히 대신을 체찰사(지방에 병란이 있을 때 왕의 명령으로 그 지방에 나가서 일반 군무를 총찰하는 임시 벼슬)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검찰, 독려해야 되겠습니다” 하여 수상(이산해)이 나를 추천하여 이 일을 맡게 했으므로, 나는 임금에게 청하여 김응남을 부사(부체찰사)로 삼았다.

☞ 심충겸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5년(1572)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지평 · 헌납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판으로 비변사제조가 되어 선조를 호종하여 평양에 갔다. 선조27년에 병조판서로 승진되었으나 이해 겨울에 병사했다.

전에 의주 목사로 있던 김여물*은 무략이 있는 사람인데, 이때 어떠한 일에 연좌되어 옥에 갇혀 있었으므로, 임금께 계청하여 그 죄를 용서해주고 스스로 따라오도록 했으며, 무사 중에 비장(裨將) 될 만한 사람을 모집하여 80여 명을 얻게 되었다.

☞ 김여물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0년(1577) 알성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4년에 의주 목사로 있을 때 서인인 정철의 당으로 몰려 투옥되었으나,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으로 사면되어 신립과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서게 되었는데 조령의 지세를 이용, 왜적을 방어하도록 건의했으나 신립이 듣지 않았으므로, 충주 달천을 등지고 배수진을 쳐서 싸웠으나 적군을 막지 못하고, 탄금대 아래에서 신립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했다.

조금 후에 정세가 위급하다는 보고가 잇달아 들어와 적의 선봉이 벌써 밀양 · 대구를 지나서 장차 조령 아래까지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김응남과 신립에게 “적이 깊이 쳐들어왔으니 일이 이미 위급한데 장차 어떻게 하겠소?” 라고 하자, 신립은 “이일이 고립된 군대를 거느리고 앞에 나가 있으나 후원하는 군대가 없습니다. 비록 체찰사(유성룡)께서 내려가시더라도 싸우는 장수가 아닌데, 어찌 용맹한 장수에게 밤새 급히 달려 먼저 내려가게 해서 이일을 응원하지 않으십니까?” 했다.

신립의 의사는 자기가 가서 이일을 응원하겠다는 것이므로 내가 김응남과 함께 임금을 뵙고 신립의 말대로 아뢰니, 임금께서 곧 신립을 불러 사실을 물으시고 마침내 그를 도순변사(왕명으로 지방 군무를 총괄하는 특사)로 삼았다.

신립이 대궐 문 밖에 나가서 직접 무사를 모집했으나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때 나는 중추부(왕명의 출납 · 숙위 · 군기를 맡았는데 세조 때부터 현직을 떠난 문무당상관의 대기소가 되었다)에서 떠날 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신립이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뜰 안에 모집된 군사가 많이 모여 서 있는 것을 보고 얼굴에 매우 노한 빛을 띠고 김판서(김응남)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이런 분을 대감이 데리고 가서 무슨 일에 쓰겠습니까? 소인(신립)이 부사가 되어 가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무사들이 자기를 따라가지 않아 신립이 노여워하는 것을 알고 웃으면서 “다 같은 나라 일인데 어찌 이것저것을 구별하겠소? 공이 이미 가기가 급하니 내가 모아둔 군관들을 먼저 데리고 떠나시오. 나는 따로 모집해 따라가겠소” 라고 말했다. 이내 군관 이름이 쓰인 단자(남에게 보내는 물건의 수량과 보내는 이의 성명을 적은 종이)를 내어주니 신립은 뜰 안에 모여 선 무사들을 돌아보면서 “이리 오너라” 라고서 이끌고 나가는데, 여러 사람들이 실의에 찬 기색으로 따라갔으며, 김여물 또한 같이 갔으나 마음속으로는 매우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신립이 떠나려 하자 임금께서 불러 보시고 보검(寶劍)을 주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이일 이하의 장수들 중에 그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 칼로 목을 베어라.”

신립이 하직하고 물러나와 다시 빈청으로 와서 대신을 뵙고 막 섬돌을 내려설 무렵, 머리에 쓴 사모가 갑자기 땅에 떨어지자 보는 사람들이 놀라서 얼굴빛이 변했으며, 신립이 용인에 이르러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자기의 이름을 쓰지 않자 사람들은 혹시 그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경상 우병사 김성일을 잡아 옥에 가두려 했으나 서울에 이르기 전에 죄를 용서하고 도리어 초유사(병란이 났을 때 백성을 병졸로 모집하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로 삼았으며, 함안 군수 유숭인*을 병사(兵使)로 삼았다.

☞ 유숭인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함안 군수로서 곽재우의 의병에게 진로를 차단당한 왜군을 추격해 진해에 이르러 수군의 이순신과 합세하여 이를 크게 무찔렀다. 이 공로로 경상우도 병사로 특진했고, 이 해 12월 적군이 진주성을 공격하자 창원에서 이를 지원하려고 성 밖에 이르렀다가 전사했다.

이보다 전에 김성일이 상주에 이르러, 적군이 이미 국경을 침범했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달려서 본영으로 오던 중, 조대곤을 중로에서 만나 일절(조정에서 지방관에게 주는 인장과 병부)을 교환했다. 이때 적군은 벌써 김해를 함락시키고 우도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노략하고 있었는데, 김성일이 나아가서 적군과 만나니 부하인 장수와 병졸들이 달아나려고 하므로 김성일이 말에서 내려 호상(당상관 이상의 관원이 하인에게 들고 다니게 하다가 승마할 때 사용하는 걸상처럼 된 물건)에 걸터앉아 꼼짝도 않고 군관 이종인*을 불러 “너는 용사이니 적을 보고 먼저 물러서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적군 한 명이 금가면(쇠로 만든 탈)을 쓰고 칼을 휘두르면서 뛰어나오자 이종인이 말을 달려 나가서 화살 하나로 이를 쏘아 죽이니 여러 적들이 뒤로 물러나 달아나고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 이종인 : 조선시대의 무신. 무과에 급제한 후, 선조16년(1583) 군관으로 이제신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종군, 북방 수비에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에 김해 부사로서 진주성이 포위되자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했는데, 전쟁이 시작된 후 충청병사 황진과 함께 끝까지 역전하여 적병을 수없이 죽였으나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적병을 양팔에 한 명씩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했다.

김성일이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수습할 계책을 세우려 했는데, 임금께서 김성일이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왜적이 쉽게 올 것 같지 않다고 말해서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나라 일을 그르쳤다고 하여 의금부 도사(관원의 감찰과 규탄을 맡아보던 종오품의 벼슬)를 보내 잡아오도록 명했으므로, 일이 장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감사 김수가 김성일이 잡혀간다는 말을 듣고 길가로 나가 작별했는데, 김성일은 언사와 안색이 강개하여 한마디도 자기 자신의 일은 말하지 않고, 오직 김수에게 힘을 다하여 적을 치라고 격려하니 이것을 본 늙은 아전 하자용이 감탄하여 “자기가 죽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오직 나라 일만을 근심하니 참으로 충신이오” 라고 했다. 김성일이 직산에 이르자, 임금께서는 노여움이 풀리고 또 김성일이 본도(경상도) 사민(士民)의 인심을 얻은 것을 알고서, 그 죄를 용서하고 우도 초유사로 삼아, 도내 인민을 효유하여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때 유숭인이 싸움에서 세운 공로가 있었으므로 등급을 뛰어넘어 병사(兵使)로 임명되었다.

첨지 김늑*을 경상좌도 안집사(백성을 불러 모아 안정시키는 임시 벼슬)로 삼았다.

이때 감사 김수는 우도에 있었으나, 적병이 중로를 가로질러 꿰뚫어서 좌도와 소식이 서로 통하지 않았으므로 수령들이 모두 관직을 버리고 달아나서 민심이 풀려서 흩어졌다.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김늑이 영천 사람이므로 본도(경상좌도)의 민정을 잘 알 테니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임금께 아뢰어 보내도록 했다.

☞ 김늑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9년(1576)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5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안집사로 임명되고, 이듬해 계사년에 경상우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선조28년(1595)에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부사가 되어 영남지방에 가서 함께 체찰했다. 전쟁이 끝난 후 충청 감사, 안동 부사를 지냈다.

김늑이 임지에 이르니 좌도의 백성들이 비로소 조정의 영(令)을 듣고 차츰 모여들었는데, 영천(영주) · 풍기 두 고을에는 다행히 적군이 오지 않았으며, 의병들이 크게 일어났다고 한다.

적군이 상주를 함락시키니 순변사 이일이 패전하여 달아나 충주로 돌아왔다. 처음에 경상도 순찰사 김수가 적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제승방략의 분군법에 의거하여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서 각기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한 곳에 모여 주둔하고서 서울에서 오는 장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게 했다. 문경 이남의 고을 수령들은 모두 자기 소속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나아가서 냇가에서 노숙하며 순변사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며칠이 지나도 순변사는 오지 않고 적군은 점점 가까워지므로 여러 군사들이 저절로 서로 놀라 동요하게 되었다.

때마침 큰 비가 와서 옷이 젖고 양식까지 떨어지자 밤중에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며 수령들도 모두 단기(單騎)로 도망쳐버렸다. 이때 순변사(이일)가 문경에 들어갔는데 고을 안이 이미 텅 비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손수 창고의 곡식을 내어 거느리고 온 사람들에게 먹이고 함창을 거쳐 상주에 이르니, 상주 목사 김해*는 순변사를 출참(사신이나 감사를 맞이하여 전곡 · 역마 등 모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이들이 숙박하는 곳과 가까운 역에서 사람을 내보내는 일)에서 기다리겠다고 핑계하고는 산속으로 도주했고, 홀로 판관 권길*만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 김해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9년(1586)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상주 목사가 되었다. 선조26년에 왜적이 상주에 몰려오자 나가 싸웠으나 힘이 당하여 전사했다.

☞ 권길 : 조선시대의 문신. 음직으로 보관되어 선조25년에 상주 판관이 되었으며,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상주에 몰려오자 순변사 이일과 함께 적을 방어했는데, 우리 군사가 이미 패전했는데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힘껏 싸우다 깃발 아래서 전사했다.

이일이 군사가 없다는 이유로 권길을 책망하고 뜰에 끌어내어 목을 베려고 하자, 권길은 나가서 군사를 불러 모으겠다고 애원하여 밤새도록 촌락을 수색한 끝에 이튿날 아침에 수백 명을 데리고 왔으나 모두 농민들뿐이었다. 이일이 상주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달래어 모으니, 산골짜기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모여든 것이 또한 수백 명이 되었으므로, 창졸간에 대오를 짜서 군대를 만들었으나 전쟁을 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때 적군은 이미 선산에 이르렀는데 저녁 무렵에 개령현 사람이 와서 적군이 가까이 왔다고 보고했다. 이일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의혹시킨다 해서 목을 베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외쳐 말하기를 “원컨대 잠시 동안 나를 가두어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적군이 오지 않거든 나를 죽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적군이 장천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으니 상주와의 거리가 불과 20리인데도, 이일의 군중에는 척후병(적군의 상황을 엿보아 정찰하는 군사)이 없었으므로 적군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이일은 그래도 적군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개령 사람을 옥에서 끌어내 목을 베어 여러 사람 앞에 돌려 보였다. 이내 뽑아 온 민군(民軍)과 서울에서 온 장수와 군사를 합치니 겨우 8백~9백 명이 되어, 이들에게 북천 가에서 진(陣) 치는 법을 가르쳤는데, 산을 의지해 진을 치고 진 한가운데에 대장기(大將旗)를 세운 다음, 이일은 갑옷을 입고 큰 깃발 아래에서 말을 타고 섰으며, 종사관(군영에 딸린 종육품관) 윤섬* · 박지*와 판관 권길과 사근찰방 김종무* 등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섰다.

☞ 윤섬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6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교리 · 지평을 거쳐, 선조20년(1587)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이등에 녹훈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는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이 되어 상주성에서 적군을 맞아 분전하다가 교리 박지, 이경류와 함께 전사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세 사람을 삼종사라고 일컫는다.

☞ 박지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7년(1584)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교리로서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이 되어 윤섬, 이경류와 함께 상주에서 전사했다.

☞ 김종무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4년에 사근찰방이 되었으며, 이듬해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창졸히 몰려와 열읍이 모두 무너지자, 종무는 수백 리 길을 달려 순변사 이일의 휘하에 들어가 상주에서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전사했다.

조금 후에 몇 사람이 숲속에서 나와 이리저리 거닐면서 이편을 바라보다가 돌아가자, 여러 사람들이 적군의 척후인가 의심했으나 개령 사람의 일을 징계하여 감히 알리지 못했다. 또 성안을 바라보니 여러 곳에서 연기가 일어나므로 이일은 그제야 군관 한 사람을 보내 탐지하도록 했다. 군관은 말을 타고 역졸(驛卒) 두 사람에게 고삐를 잡히고 천천히 가는데, 왜병이 먼저 다리 아래 숨어 있다가 조총으로 군관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고 머리를 베어 달아나니, 우리 군사들이 이것을 바라보고 기가 꺾여버렸다.

잠시 후에 적군의 대부대가 몰려와서 조총 10여 개를 가지고 쏘아대니 총에 맞은 사람은 곧바로 쓰러져 죽었다. 이일이 급히 군사를 불러 활을 쏘게 했으나, 화살이 겨우 수십 보 밖에서 떨어지므로 적을 죽일 수가 없었다. 적군은 이미 좌익(왼편에 있는 군대), 우익(오른편에 있는 군대)으로 나뉘어 기치(旗幟)를 들고 우리 군대 뒤로 돌아 포위하며 몰려왔다.

이일은 일이 다급한 것을 알고 말을 급히 돌려서 북쪽으로 달아나니, 군사들은 크게 혼란해져서 각각 자기 목숨만 살리려고 도망쳤으나 살아간 사람은 몇몇에 지나지 않았고, 종사관 이하 미처 말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적군에게 살해되었다. 적군이 이일을 급하게 쫓으니, 이일은 말을 버리고 옷을 벗어버린 채로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알몸뚱이로 달아났다. 문경에 이르러 종이와 붓을 찾아 패전한 상황을 임금께 빨리 아뢰고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고자 하였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충주로 달려갔다.

우상 이양원*을 수성 대장으로 삼고, 이전과 변언수를 경성의 좌위장, 우위장으로 삼았으며, 상산군 박충간*을 경성 순검사로 삼아 도성을 경비하게 하고, 김명원*을 기복시켜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지키도록 했다.

☞ 이양원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1년(1556)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대제학 ·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선조23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삼등이 되고,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으로 한강을 지키다 양주로 철수, 분군의 부원수 신각과 함경 병사 이혼 등과 합세하여 해유령에서 적군을 맞아 싸워 이겼으며, 그 공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 의주에 피란중인 선조께서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에 내부했다는 와전된 소문을 듣고, 통분한 나머지 단식한 지 8일 만에 죽었다.

☞ 박충간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7년(1584)에 호조정랑이 되고, 선조22년에 재령군수로 부임해 정여립 사건을 알려 그 공으로 평난공신 일등이 되고 상산군에 봉해졌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순검사로서 도성 수비를 담당했으나 왜군과 싸우다 도망한 죄로 파면되었다. 선조30년(1597)에 순검사, 선공감제조를 역임했다.

☞ 김명원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6년(1561)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0년(1587)에 좌찬성이 되었다. 선조22년 정여립의 옥사를 수습해 평난공신 삼등에 책정되고 경림군에 봉해졌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로서 임진강을 방어했으나 실패하고 평양이 함락된 후 순안에 주둔해 행재소의 경비에 힘썼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로 유도대장을 겸임했으며, 선조33년에 우의정, 이듬해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때에 이미 이일이 패전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니 인심이 흉흉해져서, 궁중에서는 서울을 버리고 떠나자는 의견까지 있었으나 궁궐 밖에서는 알지 못했다. 이마(임금의 마필을 관리하는 직책) 김응수가 빈청에 이르러 수상(이산해)과 귀엣말을 수군거리고 갔다가 다시 오라고 하자, 이를 본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겼는데, 이것은 수상이 그때 사복시 제조(궁중의 승여 · 마필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승지 이항복*이 손바닥에 “영강문 안에 말을 세워라” 하는 여섯 글자를 써서 나에게 보였다. 대간이 “수상이 나라 일을 그르쳤으니 파면시키십시오” 하고 탄핵했으나 임금께서 듣지 않으셨다. 종친(임금이 친족으로 촌수가 가까운 사람)들이 합문(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편전의 앞문)밖에 모여들어 통곡하면서 “도성을 버리지 마십시오” 하고 애원했으며, 영부사(영중추부사) 김귀영*은 더욱 분개하여 여러 대신들과 함께 궁중으로 들어가 임금을 뵙고 경성을 굳게 지키자고 청하고, 또 “도성을 버리자는 의론을 주장하는 자는 곧 소인(小人)이다” 하고 했다. 임금께서 교지를 내리시기를 “종묘와 사직이 이곳에 있는데 내가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이냐?” 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마침내 물러 나갔으나 사세는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 이항복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3년(1580)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전한 · 부제학을 거쳐 선조23년(1590)에 호조참의가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도성에 박도하니 도승지로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란하였으며, 그 후 대사헌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자, 이덕형과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고 주장하는 한편, 전국에 걸쳐 근왕병을 모집했다. 임진왜란 중에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가 되어 병권을 잡고 전국 수습에 눈부신 활동을 했다. 선조32년(1599)에 영의정으로 승진, 선조35년에 오성부원군으로 진봉, 호성공신 일등에 책정되었다. 광해군9년(1617)에 인목대비를 폐출시키는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 김귀영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2년(1547) 알성문과에 급제해 부제학 · 대제학을 거쳐 선조14년(1581)에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중추부사로서 왕자 임해군을 모시고 함경도에 피란하였다가 회령에서 왕자와 함께 적군에게 잡혔다. 후에 적장 가등청정에 의해 석방되었는데, 그의 뜻을 받아 화친을 주장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으나 유성룡 등의 변호로 고문은 받지 않았고 희주에 유배되어 죽었다.

방리의 백성들과 공사천인 노복들, 서리와 삼의사(의료를 맡은 세 관사. 내의원 · 전의감 · 혜민서를 통틀어 일컫는 말)의 소속 인원들을 뽑아서 성가퀴(성 위에 쌓은 담)를 나누어 지키게 했는데, 지켜야 할 성가퀴는 3만이 넘었는데도 성을 지키는 인원은 겨우 7천 명뿐이었고, 더구나 대부분 오합지졸이어서 모두 모두 성벽을 넘어서 도주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상번(지방의 군사를 골라 뽑아서 차례로 서울의 군영으로 보내어 근무하도록 하는 일)하는 군사들도 비록 병조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이들도 하리와 더불어 서로 결탁, 농간하여 뇌물을 받고 사사로이 놓아 보내는 군사들이 매우 많았고, 관원들 역시 군사들이 가는가 남아 있는가를 묻지도 않았으므로, 급한 일에 다다라서는 모두가 쓸 데 없게 되었으니, 군정의 해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대신이 저군(왕세자)을 세워 인심을 수습하자고 청했으므로, 임금께서 그 계청에 따랐다.

동지사 이덕형*을 왜군에 사자(使者)로 보냈다. 상주에서 패전할 때 왜학 통사(통역관) 경응순이란 사람이 이일의 군중에 있다가 적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때 왜군의 장수 평행장이 평수길의 서신과 예조에 보내는 공문 한 통을 경응순에게 주고 내보내면서 “동래에 있을 때 울산 군수를 산 채로 잡아 서신(평수길의 편지)을 주어 보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회답이 없다. 당시 군수는 이언함인데 적의 진중에서 돌아왔으나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도망쳐 왔다고 말하고, 그 편지는 숨기고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런 일이 있는 줄 알지 못한 것이다. 조선에서 만약 우리와 강화할 의사가 있다면 이덕형이 오는 28일에 충주에서 만나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 이덕형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3년(1580)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 · 예조참판 · 대제학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로 일본의 현소, 유천조신 등과 강화를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선조를 호종, 정주에 이르러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구원군 파견을 요청하여 성공했다. 선조28년(1595)에 경기 · 황해 · 평안 · 함경 4도의 부체찰사를 지냈으며, 선조31년에 38세로 우의정에 승진, 선조34년(1601) 행판중추부사로 경상 · 전라 · 충청 · 강원 4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전란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진력했고,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되었다. 광해군5년에 영창대군의 처형과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했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에 내려가 죽었다. 인조 때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문익이다.

이는 이덕형이 지난해에 일찍이 선위사(임금의 명령으로 외국의 사신을 영접, 위로하는 임시 벼슬)가 되어 왜국의 사신을 접대한 일이 있어 평행장이 그를 보고자 한 것이다. 경응순이 서울에 이르렀으나 이때는 일이 급해서 아무런 좋은 계책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혹시 이 일로 왜군의 진격을 늦출 수 있을까 생각했으며, 이덕형 또한 자기가 가기를 청하니 조정에서는 예조에서 답서를 만들어 경응순을 데리고 가도록 했다. 이덕형이 가는 길에 충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경응순에게 먼저 가서 탐지하게 했으나, 경응순이 적의 장수 가등청정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이덕형은 마침내 중로에서 되돌아와 그때 임금이 계시던 평양으로 가서 복명했다.

형혹(화성=재화, 병란의 조짐이 보인다는 별 이름)이 남쪽 두성(남두=남방에 있는 여섯 별로 구성된 성수의 이름. 제왕의 수명을 맡는다고 함)의 성좌를 침범했다. 경기 · 강원 · 황해 · 평안 · 함경 등 각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서울에 들어와서 구원하도록 했다. 이조판서 이원익*을 평안도 도순찰사로 삼고, 지사(지중추부사) 최흥원*을 황해도 도순찰사로 삼아, 모두 그날로 떠나가도록 했다.

☞ 이원익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3년(1570)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0년에 안주 목사에 기용되고, 선조24년에 대사헌, 호조 ·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을 선도했고 군사를 모아 적군과 싸웠다. 선조26년 명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선조28년에 우의정에 승진, 제도 도체찰사를 겸무하여 작전 임무를 맡았다. 선조31년 전쟁이 끝난 후에 영의정이 되어 전후 국정의 처리에 진력했다. 선조37년(1604)에 호성공신 이등에 책정, 완평부원군으로 봉해졌다. 광해군7년(1615)에 인목대비의 폐출에 반대하여 홍천에 유배되었다가 광해군11년에 풀려나왔다. 인조 원년(1623) 인종반정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고, 인조5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서 전주로 세자를 시종했고, 이어 훈련도감 도제조를 지내고 치사했다.

☞ 최흥원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 원년(1568)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 사간 · 동래 부사를 역임했으며, 선조21년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황해도 도순찰사가 되고, 이어 우의정을 거처 좌의정에 승진, 이 해 영의정 유성룡이 파면되자 영의정에 기용되어 왕세자를 강계에 배종한 뒤 의주에 가서 왕을 시종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했고, 영돈령부사에 전임되어 영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장차 임금께서 서쪽으로 순행(피란)할 의론이 있었는데, 이원익은 전에 안주 목사로 있었고 최흥원은 황해 감사로 있을 때 모두 어진 정사를 베풀어 백성들의 환심을 얻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먼저 가서 군민을 어루만지고 타일러 임금의 순행에 대비하도록 한 것이다.

적병이 충주에 침입하니 신립이 맞아 싸우다 패전하여 죽고,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졌다. 신립이 충주에 이르니 충청도의 여러 고을에서 군사들이 모여들어 8천여 명이나 되었다. 신립이 조령을 지키려고 했으나, 이일이 패전했다는말을 듣고는 그만 간담이 떨어져서 충주로 돌아왔다. 또 이일, 변기 등을 불러 모두 충주로 오도록 했는데, 험준한 곳을 버리고서 지키지 않았으며 호령이 번거롭고 소란스러우니, 보는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패전할 거라 생각했다.

그와 친근한 군관 한 사람이 와서 적군이 벌써 조령을 넘었다고 은밀히 보고했는데, 이때가 27일 초저녁이었다. 이 말을 듣고 신립이 갑자기 성 밖으로 뛰어나가자 군중이 매우 요란해졌으며, 신립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밤이 깊은 뒤에야 몰래 객사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군관이 거짓말을 했다 하여 끌어내어 목을 베고 임금께 올리기를 “적군이 상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으나 적병이 이미 10리 안에 와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내 군사를 거느리고 탄금대 앞 두 강물 사이에 나가 진을 쳤는데, 이곳은 왼쪽에 논이 있고 물과 풀이 서로 얽히어 말과 사람이 달리기에 불편한 곳이었다. 조금 후에 적군이 단월역에서부터 길을 나누어 쳐들어오는데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한 길로는 산을 따라 동쪽으로 나오고, 또 한 길은 강을 따라 내려오니 총소리는 땅을 진동시키고 먼지가 하늘에 가득했다. 신립은 어쩔 줄 모르고 말을 채찍질해서 몸소 적진에 돌진하고자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쳐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와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여러 군사들도 모두 강물에 뛰어들어 시체가 강물을 덮고 떠내려갔다. 김여물도 혼란한 군사 속에서 죽었으나, 이일은 동쪽 산골짜기에서 빠져나와 도주했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적병이 매우 강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일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 염려했으나, 신립은 당대의 명장이므로 사졸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니 그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가게 해서 두 장수가 서로 세력을 합친다면 적군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 계책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불행히도 본도(경상도)의 수군과 육군의 장수들이 모두 겁쟁이였다.

수군에서는 좌수사 박홍은 군사를 한 사람도 출동시키지 않았고, 우수사 원균*은 비록 수로는 좀 멀지만 거느리고 있던 배가 많았으며, 또 적병이 단 하루 동안에 모두 몰려온 것이 아니므로, 우리 편에서 군대를 있는 대로 다 거느리고 앞으로 진출하여 군대의 위세를 보이며 서로 버티어 다행히 한 번만이라도 싸워 이겼더라면 적군은 마땅히 후방을 염려해 갑자기 깊이 쳐들어오지는 못했을 텐데 우리 편에서는 적군을 바라만 보고 멀리 피해가서 한 번도 서로 싸우려 들지 않았다. 적군이 육지에 오르자 좌병사 이각과 우병사 조대곤은 도망가거나 교체되었으므로, 적군은 북을 치면서 마음대로 행동하며 수백 리의, 지키는 이 없는 땅을 짓밟으면서 밤낮으로 북쪽을 향해 올라오는데, 한 곳에서도 감히 대항하여 적군이 진격하는 기세를 늦추려는 사람이 없었다.

☞ 원균 : 조선시대의 무신. 무과에 급제한 후, 조산 만호 · 부령 부사를 역임했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수사로서 왜군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전선과 무기를 바다에 가라앉히고 수천여 명의 수군을 해산시킨 다음 전선 3척으로 왜군을 피해 다녔다. 이때 옥포 만호 이운룡의 항의로 도망을 단념하고, 전라좌도 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거제도에서 양도 수군이 합세하여 옥포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선배로서 그 휘하에 있게 된 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이때부터 이순신을 헐뜯기 시작했다. 선조30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무함해 투옥시키고 대신 통제사가 되었으나, 주색에 빠져 군무를 돌보지 않아 부하들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이 해 7월에 적선의 진로를 저지하려고 전 병력을 이끌고 출격했는데 왜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칠천도에서 전멸당하고, 거제도에 내려 도주하다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10여 일이 채 안 되어 벌써 상주에까지 이르렀으나, 이일은 다른 곳에서 온 장수로 군사까지 없는 터에 졸지에 서로 싸우게 되니 형세가 진실로 당적할 수 없게 되어, 신립이 충주에 이르기 전에 이일이 먼저 패전하여 전군의 진퇴에 근거를 잃게 되고, 일이 이로써 크게 그르치게 되었으니 아아, 원통하다.

나중에 들으니 적군이 상주에 들어와서 오히려 험지를 지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문경현 남쪽 10여 리 밖에 옛 성이 있는데 이를 고모성이라 한다. 좌도와 우도의 경계에 있는데 양쪽 산협이 한데 묶인 듯이 싸여 있고 큰 내가 그 가운데에 둘러 있으며 그 아래에 길이 있다. 적군이 그곳을 지키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두 번, 세 번 탐지해본 뒤에야 지키는 군사가 없는 것을 알고는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그 후에 명나라 장수인 제독 이여송*이 적군을 추격하여 조령을 지나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험준한 곳이 있는데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 총병(신립)은 꾀가 없는 사람이다” 하였다.

☞ 이여송 : 명나라 장수이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제독으로 군대 4만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와서 왜군을 쳐부수고 평양을 수복했다. 그 공으로 본국에 돌아가서 요동총병에 임명되었는데, 토만을 토벌하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했다.

대체로 신립은 날쌔어서 그 당시에 이름은 얻었으나 군사 쓰는 계책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수가 군사 쓸 줄을 알지 못하면 그 나라를 적군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훗날의 경계가 되겠기에 상세히 기록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