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징비록 - 2회 - 우리의 국방태세와 이순신의 기용

백삼/이한백 2014. 1. 7. 09:49

우리 조정에서는 왜국의 동태를 걱정하여 변사(국방사무)에 밝은 재신을 뽑아 하삼도(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를 순찰하여 방비하도록 했다.

김수*를 경상 감사로 삼고, 이광*을 전라 감사로 삼으며, 윤선각*을 충청 감사로 삼아 병기(兵器)를 준비하고 성지를 수축하게 했는데, 그중에서도 경상도에서 성을 쌓은 것이 가장 많았으니 영천 · 청도 · 삼가 · 대구 · 성주 · 부산 · 동래 · 진주 · 안동 · 상주의 좌우 병영을 새로 쌓거나 더 늘려 수축하게 했다.

☞ 김수 : 임진란 때 왜병의 침입을 막지 못한 문책으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이광 : 임진왜란 때 전라도 관찰사로 충청 감사 윤선각, 경상감사 김수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수원에 진주해 용인의 왜적을 공격했으나 참패했다. 이 해 가을에 용인패전의 문책을 받아 의금부에 갇혔다가 벽동으로 유배되었고 선조27년(1594)에 특별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 윤선각 : 선조25년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왜병이 침공하자 이를 막아 싸웠으나 패전하여 삭직당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병조참판을 거쳐 광해군 원년(1609)에 공조판서를 지냈다.

이때 세상이 태평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중앙과 지방이 안일에 젖어 백성들은 노역을 꺼려 원망하는 소리가 길거리에 자자했다. 나의 동년 친구이며 전에 전적 벼슬을 지낸 합천 사람 이로*는 나에게 서신을 보내어 “성을 쌓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 이로 : 임진란 때 초유사 김성일의 막하로 있으면서 의병초모를 모획했다.

그리고 또 “삼가 고을은 정암진(낙동강 지류인 남강에 있는 나루로 함안군에서 의령군으로 건너가는 나루다)이 앞을 막고 있으니 왜적이 어찌 날아서 건너겠는가? 무엇 때문에 공연히 성을 쌓느라고 백성들을 괴롭히는가” 라고 했다. 도대체 만 리나 되는 큰 바다로도 왜적을 막아내지 못하는데 한 줄기 좁은 강물을 왜적이 쉽게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다니, 그 사람(이로)의 계획이 소루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 당시의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대체로 이와 같았다.

홍문관에서도 또한 차자를 올려 이 일을 논박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경상도와 전라도에 수축한 성은 모두 지세를 갖추지 못했고, 또 넓고 크게 만들어 많은 사람을 수용하도록 하는 데 힘썼다. 진주성과 같은 것은 본래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쉽게 수비할 수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이것을 작다고하여 동쪽으로 향해 있는 평지에 옮겨 쌓더니, 후에 왜적이 그곳을 통해 성으로 들어와서 마침내 성을 지키지 못하였다.

대체로 성은 튼튼하고 작은 것이 좋은 것인데, 오히려 그것이 넓지 않음을 걱정했으니 또한 그 당시의 의론이 그런 것이었다. 군정의 기본이라든지, 장수를 뽑는 요령이라든지, 군사를 훈련하는 방법 같은 것은 백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도 정돈되지 않아 결국 전쟁에 패하고 만 것이다.

정읍 현감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일찍이 조산 만호(조산은 함경북도에 있는 마을이고, 만호는 무관직의 하나로 조선시대 각 도의 여러 진에 딸린 종사품의 군직)로 있었는데 그 무렵 북쪽 변방에 사변이 많았다. 이순신이 배반한 오랑캐 우을기내를 꾀로 유인하여 잡아 묶어서 병영으로 보내어 베어 죽이니 이후로는 오랑캐로 인한 근심이 없어졌다.

☞ 이순신 : 조선조 최고의 명장. 자는 여해, 본관은 덕수다. 선조9년(1576) 식년무과에 급제했고, 조산 만호 · 정읍 현감을 거쳐 선조24년에 좌의정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했으며, 이때 거북선을 만들어 왜적의 침구에 대비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을 도와 거제도, 옥포, 고성, 사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특히 한산도해전에서는 적선 70여 척을 불사르는 대전과를 올려 전전국(全戰局)을 퇴세에서 승리로 만회시켜 국가 중흥의 터전을 마련했으니 이 싸움을 임란 삼대전첩 중의 으뜸이라고 한다. 이 공로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경상 · 전라 · 충청 삼도의 수군을 통괄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는 원균의 모함으로 한때 투옥되기도 했으나, 원균이 패전하자 다시 기용되어 통제사가 되었다. 전선 12척과 패잔병을 수습하여 적군의 대부대를 명량해협에서 무찔러 그 이름이 크게 떨쳤다. 다음 해 무술년 적군이 철퇴할 때 노량해협에서 그 퇴로를 막고 적군을 격멸하던 중 유탄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 선무공신 일등에 책정되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순찰사 정언신*이 이순신에게 녹둔도의 둔전(지방에 주둔하는 군대의 군량이나 관청의 경비로 쓰기 위해 경작하던 전지)을 지키도록 했는데, 어느 날 안개가 많이 낀 가운데 군사들이 모두 나가 벼를 거두었고 성채에는 10여 명만 남아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오랑캐 기병이 사면에서 모여들었는데 이순신이 성채 문을 닫고 안에서 유엽전(살촉이 버들잎처럼 생긴 화살)으로 적 수십 명을 잇달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자 오랑캐가 놀라서 도망쳤다. 이순신이 성채 문을 열고 혼자서 크게 고함치며 뒤쫓자, 오랑캐 무리가 크게 패하여 빼앗긴 것을 모두 되찾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 지 10여 년이 되도록 벼슬이 승진되지 않다가 비로소 정읍 현감이 되었다.

☞ 정언신 : 중종22년(1527)부터 선조24년(1591) 때의 문신으로 자는 입부, 호는 나암, 본관은 동래다. 명종21년(1566)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선조12년(1579)에는 우부승지에서 함경도 절제사로 되고, 선조16년에는 니탕개가 북변에 쳐들어오자 우찬성에서 함경도 순찰사로 임명되었다. 언신은 인재를 잘 알아서 이순신 · 신립 · 김시민 · 이억기 등이 모두 그 막하에 있었다. 선조17년(1584)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정여립의 옥사에 연좌되어 남해에 유배되고 다시 갑산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이때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나날이 급하게 전해지자, 임금께서 비변사(군국기무를 총괄하는 기구로 중종 때에 임시 군사보강기구로 창설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와 국정의 통합기구가 되었다)에 명하여 제각기 장수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했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했는데 정읍 현감에서 수사(水使)로, 차례를 뛰어넘어 임명되자 사람들은 혹시 그가 갑작스레 승진한 것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때 조정에 있는 무장 중에는 다만 신립*과 이일*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고, 경상 우병사 조대곤은 늙고 용맹도 없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그가 장수로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내가 경석(經席)에서 이일이 조대곤을 대신하도록 계청하니 병조판서 홍여순*이 “명장(名將)은 마땅히 서울에 있어야 하니 이일은 보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 “모든 일에는 예비하는 것이 중요한데, 하물며 군사를 정돈하여 적을 방어하는 일은, 더구나 창졸히 처리할 수 없습니다. 단시일에 변고가 생기면 결국 이일을 보내지 않을 수 없으니, 이왕 보내려면 차라리 하루라도 일찍 보내어 예비시킴으로써 변고에 대비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창졸간에 다른 곳의 자수를 빨리 내려 보낸다면 그 도(道)의 형세에도 밝지 못하고 또한 군사들의 용맹함과 비겁함의 실태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일이므로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라고 계창했으나 임금께서는 대답이 없었다.

☞ 신립 : 조선시대의 무장. 자는 입지, 본관은 평산이다. 선조 원년 무과에 급제했고, 선전관, 진주판관을 역임하고 선조 16년 온성부사로 있을 때 야인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적군을 막다가 대패하여 부하 장수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해 자결했다.

☞ 이일 : 조선시대의 무장. 자는 중경, 본관은 용인이다. 명종13년(1558) 무과에 급제했고, 선조16년 니탕개의 난 때 경원부사로 있으면서 적군을 물리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에 임명되어 상주 · 충주에서 적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전하고, 그 후에 임진강 · 평양 등지에서 싸웠으나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선조33년(1600) 함경남도병사가 되었으나 죄를 짓고 소환되어 상경 도중 정평에서 병사했다.

☞ 홍여순 :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사신, 본관은 남양이다. 선조 원년(1568) 증광문과에 급제했고, 병조판서를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북도순찰사를 지냈으나, 성품이 간악하여 대간의 탄핵으로 순천에 유배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유성룡을 몰아내고 이이담 등과 대북당을 영도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대간의 탄핵으로 진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나는 또 비변사로 나가 여러 사람들과 의론하여 조종 때의 진관의 법을 수복하고자 계청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는 각 도의 군병이 모두 진관에 나누어 소속되어서, 사변이 있으면 진관이 소속된 고을을 통솔하여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죽 늘어서서 정돈하여 주장(主將)의 호령을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경상도는 김해 · 대구 · 상주 · 경주 · 안동 · 진주의 여섯 진관으로 되어 있으니, 설사 적병이 쳐들어와서 한 진의 군사가 비록 실패했더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대를 엄중히 하여 굳게 지켰기 때문에, 한꺼번에 죽 따라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번 을묘년의 왜변 후에 김수문*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분군법(군대조직)을 개정하여 도내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순변사 · 방어사 · 조방장 · 도원수와 본도의 병사(병마절도사의 준말) · 수사(수군절도사의 준말)에게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명칭을 제승 방략이라 했습니다. 여러 도에서 모두 이를 본받았는데 이에 진관의 명칭은 비록 있으나 실상은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았으므로, 한 번 경보가 있으면 반드시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이 한꺼번에 움직이게 되고, 장수 없는 군사들은 먼저 들 가운데 모여 천리 밖에서 장수 오기를 기다리다가 장수는 제때에 오지 않고 적군의 선봉이 먼저 닥친다면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할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패전하는 법입니다. 많은 군졸이 한번 무너지면 다시는 수합하기가 어려우니, 이때는 비록 장수가 오더라도 누구와 함께 싸움을 하겠습니까? 다시 조종의 진관의 제도를 수복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제도는 평상시에는 훈련하기에 편리하고 사변이 있을 때는 병사를 징발, 집합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전후가 서로 호응하고 안팎이 서로 의지하여 갑자기 무너져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지경이 되지 않을 것이니, 일을 처리하는 데 좋을 것입니다.”

이일을 본도(경상도)로 내려보냈더니 경상 감사 김수는 “제승 방략은 시행해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여 이 의론은 마침내 중지되고 말았다.

임진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나누어 보내서 지방의 군비를 순시하도록 했다. 이일은 충청도 · 전라도로 가고, 신립은 경기도 · 황해도로 가서 모두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돌아왔는데 점검한 것은 활 · 화살 · 창 · 칼 같은 것뿐이요, 군읍에서는 모두 문서의 형식만 갖추고는 법을 회피하려 들기만 하고 방어에 관해 별달리 좋은 계책이 없었다.

신립은 평소부터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신의 위엄을 세우니 수령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백성을 동원해 길을 닦게 하고 그에게 지나칠 정도로 대접하니 비록 대신들의 행차라도 이것만 못하였다.

임금께 복명한 후인 4월 초하루에 신립이 나를 사제로 찾아왔기에 내가 그에게 “멀지 않아 변고가 있으면 공이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의 어렵고 쉬움이 어떠하겠소” 하고 묻자, 신립은 대단히 가볍게 여겨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했다.

내가 “그렇지 않소. 그전에는 왜적이 다만 칼 · 창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鳥銃)과 같은 장기까지도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오” 하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

나는 “나라가 태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사졸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과연 급변이 생긴다면 이것을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오. 내 생각으로는 몇 해 뒤에 사람들이 자못 군사 일에 익숙해진다면, 난(亂)을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서는 매우 걱정이 되오” 라고 했으나, 신립은 도무지 반성하거나 깨닫지 않고 가버렸다.

대개 신립이 계미년(선조16년, 1583)에 온성 부사로 있을 때 배반한 오랑캐들이 종성을 포위하자 신립이 달려가서 이를 구원했는데, 겨우 10명 남짓한 기병만으로 돌진해 쳐들어가니 오랑캐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조정에서는 신립이 대장이 될 만한 재주가 있다 하여 북 병사, 평안 병사로 승진시키고, 얼마 안 되어 자헌대부로까지 승진시켜 병조판서로 삼고자 하니, 의기가 한창 날카로워져서 마치 옛날의 조괄*이 진나라를 업신여기던 것과 같이, 조금도 일에 당면하여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당시에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걱정했다.

☞ 조괄 :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장수. 아버지 조사에게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우기는 했으나, 변통성이 없어 장수다운 실력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 된 품이 자신감이 지나치고 경망하여, 강성한 진나라를 얕잡아보고 싸우다 결국 대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