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구 전의(全義) 이씨 집성촌
전의 이씨 문중은 세종대왕이 하사한 가훈(왼쪽·가전충효 세수인경)을 각 가정에 보급해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구로구 궁동 전의 이씨 집성촌에 살고 있는 이기세·근풍·경노·근설씨(왼쪽부터)가 종문회관에서 족보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성식 기자]
"대부(大父) 어르신, 한 수만 물러 주시죠~."
서울 서남쪽에 위치한 구로구 궁동. 지난달 31일 경로당에서 바둑을 두던 이영세(80)씨는 이근설(74)씨를 '대부'라 부르며 존대했다. 대부란 할아버지뻘의 어른을 높여 부르는 말. 여든 노인이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적은 노인에게 이처럼 깍듯한 이유는 뭘까. 두 사람은 18촌 간인 인척이다. 근설씨는 전의(全義) 이씨 27대, 영세씨는 29대 손이다. 영세씨는 "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어르신이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도 내겐 할아버지였다"고 말했다. 이런 장면이 서울의 마지막 집성촌 궁동에선 자주 목격된다.
4200여 가구 1만20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궁동이지만, 매봉산 아래 마을에는 같은 성의 문패가 자주 눈에 띈다.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棹)를 시조로 하는 전의 이씨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11대손 이문간(李文幹)이 1360년 왕으로부터 약 100만㎡(30만 평)를 하사받고 터를 잡은 이래 20대를 이어왔다. 지금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30여 가구가 촌수를 따지며 살고 있다. 주민 정성중(36)씨는 "지난해 이사온 뒤 동네 어른들이 너도나도 대부·아저씨·조카라고 불러 신기했다" 고 했다. 이근풍(84)씨의 맏며느리 박선옥(48)씨는 "20여 년 전 시집와 마을 곳곳을 돌며 시댁 인사 다니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고 했다.
도시화로 대부분의 집성촌이 해체됐지만 전의 이씨촌이 궁동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이 개발제한구역이었다는 것이다. 뛰어난 자연경관 때문에 2005년까지 시계경관지구로 묶여 있어 개발이 제한됐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집성촌 유지의 원동력이다. 이들은 세종대왕이 하사한 가훈을 소중하게 여긴다.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가정에서는 나라에 충성하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사회에서는 인자하고 어른을 공경하라)' . 이경노(72)씨는 "여든 노인이던 11대 이정간 어른이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 흉내를 내며 노모를 봉양하자 세종이 어필을 내렸다" 고 했다. 전의 이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78명, 대제학 1명, 청백리 6명을 배출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자결한 대한제국 외교관 이한응, 수필 '딸깍발이'의 저자 이희승 선생, 가수 이문세씨도 전의 이씨다.
궁동에는 안동 권씨도 집성촌을 이뤄 10년 전엔 30가구나 살았지만, 지금은 4가구만 남았다. 서울에서 알려진 집성촌은 강남구 세곡동(남양 홍씨), 서초구 신원동(경주 최씨), 강북구 우이동(원주 원씨), 도봉구 방학동(파평 윤씨) 등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재개발 등으로 해체되고 지금은 10가구 미만이 거주하고 있어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다.
최종혁 기자 < storist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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