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이씨 족보

'이천장군의 온수대첩과 그 역사적 의의' 학술대회 개최되다 !!|

백삼/이한백 2020. 2. 5. 14:06

조선에 이순신이라면 고려엔 이천"

'이천장군의 온수대첩과 그 역사적 의의' 학술대회

 

 

 

↑↑ ▲학술대회 장면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소장 김기승)와 온양신문이 주최.주관하고 전의.예안이씨화수회본부와 아산시가 후원하는 ‘고려시대 이천 장군과 온수대첩’을 주제로 한 아산학연구소 제9차 학술대회가 5월 20일 오후 2시부터 온양문화원에서 개최되었다.

온양신문의 창간 27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김일환 아산학연구소 연구실장이 ‘몽골의 침입과 아산민의 대몽항쟁’, ▲윤용혁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이천장군의 온수대첩과 그 역사적 의의’를 발표하고 이어 김기승 소장의 사회로 윤훈표 역사실학회 회장과 홍영의 국민대학교 교수가 나서서 종합토론을 벌였다.

대다수 아산 시민들, 아니 온 국민들은 아산에서의 구국의 성웅하면 대개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연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왜(倭)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살신성인의 기개로 나라를 구하고 장렬히 산화하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조선시대에 있었던 국난극복의 역사였다면 그 보다 앞서 고려시대에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가 고난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을 때 바로 온양에서, 우리나라를 침입했던 몽고에 맞서 적극적으로 물리쳤던 사실과 그 승리를 이끌었던 주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그 당시 아산지역에서 있었던 대몽고 전투와 특히 1256년 이천(李阡) 장군의 온수대첩과 그 역사적 의의를 연구 발표한 학술대회로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것이다.

김일환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당시 고려의 상황에 대해 “13세기는 징기스칸의 몽고가 세계를 지배했던 시대로,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정부는 큰 위기에 빠졌던 시기”라고 밝혔다. 수십년간 끝없이 거듭되는 몽골의 침입에 대항해 고려는 긴 항쟁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동안 전 국토는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혀 황폐화 되었고 백성들은 전쟁에 내몰려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아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아산은 몽골군이 전라, 경상도로 남하할 때 그 길목이 되는 직산, 천안과 인접한 지역이었고 더구나 1232년 6월 대몽항쟁을 선언한 무인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는 직접적인 군사공격의 대상지가 됐던 것이다.

윤용혁 교수는 이 시기 아산 지역에서의 전투는 1236년(고종 23)과 1256년(고종 43) 2차에 걸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1236년은 온양의 향리 현려가 지역민을 지휘해 몽고군을 격퇴한 사례이고, 1256년은 고려의 중앙군이 직접 출정해 아산지역의 몽고군을 격퇴한 사례인데, 바로 이 전투가 이천 장군이 지휘한 전투였다는 것이다.

김일환 교수는 “이 두 차례의 대몽전투는 장소는 아산으로 동일하지만 1236년 전투는 지역민이 중심이 돼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외적으로부터 성공적으로 지켜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면, 1256년 전투는 국가가 파병한 관군이 상륙전을 통해 침략군을 성공적으로 제압해 승리를 거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난에 처해 있는 국가를 민관(民·官)을 불문하고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수호했다는 점에서는 공히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아산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대몽항전을 기념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그간의 아산지역 대몽항쟁은 학계에 많이 소개됐지만 지역사회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최근”이라면서 “따라서 중요한 승리가 두 차례나 있었는데도 변변한 기념비 하나 없는 실정”이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김 교수는 “아산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쟁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별로 없는 고장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민족의 침략에 항거하며 빛나는 승전을 얻어낸 자랑스러운 역사는 이 지역의 지역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아산시민들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지역사의 가치와 의미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사자원이 될 것”이라면서 이번 학술대회에서 발표되는 연구가 아산지역에서의 대몽항쟁 재조명과 이천 장군의 업적 확인 및 선양에 일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아산지역에서의 대몽항쟁에 대해 알아본다.

▲1236년 온양민의 몽골 격퇴

↑↑ ▲온수군 전투도

 


몽고 침입군이 아산만 연안에 침략을 해온 것은 1236년(고종 23년)으로 일대를 횡행하면서 이 지역을 장악하고자 했다. 당시 몽고군은 경기방면에서 남하하는 과정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부는 온양을 거쳐 공주 쪽으로 내려갔고, 다른 대부대는 아산만 연안 각처에 나누어 포진했다.

몽고군은 아산지역에 대해 △중부이남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육로교통의 중간 경유지 △해양과 접한 아산만 연안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에 입각해 침입을 시도했다. 이에 대해 온양의 향리인 현려(玄呂)가 지역민들을 이끌고 나가 적을 격파했다.

1236년 온양에서의 전투는 정규군사가 아닌, 아산 지역민들이 중심이 돼 적극적인 방어전을 펼친 사례로서 지역민들이 향리의 지휘 하에 적을 격파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전투이다.

이 전투의 경과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고종세가 23년 9월에 “9월 3일 몽고병이 온수군을 포위하므로 군리 현려 등이 문을 열고 나가 싸워 크게 이겼다. (이 싸움에서) 2급을 참수했고 시석(矢石)에 맞아 죽은 자가 200여인이었으며 노획한 무기도 심히 많았다. 온수군의 성황신이 은밀히 도운 공이 있다하여 왕이 신호(神號)를 더하고 현려를 군의 호장(戶長)으로 삼았다”고 적었다.

몽고와의 전투에서는 정부의 도움 없이 지역민들이 자율적으로 몽고군과 싸운 사례들이 적지 않다. 본래 고려의 대몽항전은 정부가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옮겨감으로써 침략군에 대한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방어전의 전개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전투의 현장에서는 지역주민들이 몽고군의 공격에 대하여 생존을 위한 자위 차원의 방어전을 치른 경우가 많았다.

향리 지휘에 의한 지역민의 항전은 순수한 향토 방위의 사례로서 그 의미가 매우 깊으며, 그 가운데 1236년 온양 전투는 기록상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1256년 아산지역에서의 전투

↑↑ ▲이천 장군

 


아산만 연안에 대한 몽고군의 공세가 다시 강화된 것은 1256년(고종43)이었다. 이 시기 아산지역에서는 충주도순문사 한취(韓就), 마별초(야별초) 정인경 등에 전투가 기록에서 확인된다. 강도(강화도)에서 수군을 거느리고 파견된 장군 이천(李阡)이 아산에 투입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한취가 아산만 연안에서 몽고군을 공격한 것으로부터 약 1개월 후인 6월 1일,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더 강력한 조치로 장군 이천을 아산지역에 급파, 수군 200 병력으로 몽고군을 막게 했다. 강도에서 출발한 이천의 수군은 서해 연안 해로를 경유해 아산만으로 진입했고, 이어 온양(온수)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고려사’에서는 고종세가 43년 6월 23일자 기록에 “장군 이천이 몽병과 온수현에서 싸워 수십 급을 베고 포로된 남녀 백 여 인을 빼앗았다”고 적었다.

당시 이천의 전투는 곡교천을 통해 상륙 후 온양 읍치 일대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추측된다. 온양 전투에서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 몽고군에 대한 강도 무인정권의 적극적 대처 양상이다. 강화 천도이후 강도정부는 몽고에 대해 시종 소극적이었다.

방호별감이나 수령을 통한 산성과 해도에의 입보가 중요한 대책이었고, 이 때문에 각 지역별 항전은 자위적 역량에 맡겨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1256년 아산지역에 대해서는 충주도순문사를 파견하여 입보민을 관리하고 몽고군을 해상에서 요격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1256년 6월 장군 이천에게 수군을 주어 직접 아산만에 진입하고, 온양에까지 중앙군을 투입한 사실, 무인집정자 최항이 은 6근으로 사졸들을 포상할 정도로 아산 지역에서 적을 공파한 이천의 공을 높게 평가됐다.

▲몽고군의 거듭된 아산 침입 이유

윤용혁 교수는 “몽고군의 아산만 연안에 대한 침입은 무엇보다 이 지역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아산만 일대가 강화도에 가까운 전략 거점이라는 점, 그리고 강화도에 연결되는 조운로의 안전 확보라는 이유 때문인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4월 충주도순문사 한취의 해상에서의 몽병 요격, 6월 강도정부로부터의 장군 이천의 아산만 파견과 온양전투, 7월 마별초(야별초) 정인경의 투입, 이천 군에 대한 최항의 포상 등 아산 일대에서 야기된 강도정부의 적극적 대응은 해상 및 강화도에 대한 몽고의 전반적 공세에 대한 대응책이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국산 최초 잠수합이 ‘이천함’인 이유

↑↑ ▲이천함

 


1992년 10월 11일에 진수한 한국 최초의 국산 잠수함 ‘이천함’은 바로 1256년 온양에서 적을 격파한 이천 장군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1천200톤 급으로, 30여 명 승무원에 2개월 동안 단독작전 수행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천함은 1994년 취역했다.

<두산백과> 

고려 건국공신 이도가 금강을 배경으로 해 뱃일에 종사한 인물이었던 것과 이천이 수군을 이끌고 전공을 세운 것은 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국산 잠수함 이름도 ‘이천함’이 된 듯하다.

 

한펀 이 날 오전 11시부터 온양시내에 있는 온양제일호텔에서 제73차 이사회 및 제48차 정기총회가  참석 83명 위임장 88명 합171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동 회의에서는 본부 준호 상무이사의 사회로 시작, 한웅 회장의 회의진행으로 제1호의안 2015년도 세입.세출 결산보고, 제2호의안 2016년도 세입.세출 예산(안), 제3호의안 화수회본부 이사장 및 상무이사 추인, 제4호의안 화수회본부 감사 교체 승인 건 등이 상정되어 원안대로 가결 통과 되었다.

 


 인천화수회이성빈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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