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응과 전의이씨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반년 전 나라 잃은 절망감에 영국 땅에서 유서 한 장을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다. 30대 초반의 젊은 외교관 이한응이 바로 그 사람이다. 국은(菊隱) 이한응(李漢應)은 영국에서 대일외교로 고군분투하다 32세의 나이에 끝내 자결했다.
이한응은 고종 11년 (1874)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화산리에서 아버지 이경호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철이 들자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16세가 되면서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서양 새 문물에 접하기로 마음먹은 뒤 서울로 올라가 정부에서 세운 영어학교에 들어갔다.
고종 34년(1897) 그는 처음으로 한성부주사라는 말단 벼슬에 올라 2년간 근무하다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모교의 영어교관이 되었다. 다시 2년 후인 고종 38년 민영돈이 영국과 이탈리아 겸임공사로 지명되자 영어에 능통한 이한응은 3등 참사관에 임명되어 함께 런던으로 부임했다. 그때 나이 28세였다.
3년만인 1904년 공사 민영돈이 귀국하고 대리공사의 직책을 맡은 그는 한국의 외교권을 반신불수로 만든 한. 일의정서의 강제성. 불법성을 각국 사신들을 상대로 호소한다. 그러나 약소국의 호소를 들어줄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1905년 이한응은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인 영국이 한국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일본에 동의한다는 것을 탐지한다. 그 뒤 피나는 호소와 항변을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조국은 망했다. 약소국 외교관의 무력, 갖은 굴욕,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그는 하나밖에 택할 길이 없었다. 1905년 5월12일 그는 형과 부인 강씨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조용히 음독자결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광성리 금원부락 뒷산에 있다. 전의이씨인 이희승 박사가 비문을 지었다.
한편 이한응은 전의이씨 후손이다. 전의이씨의 시조는 이 도(李棹)다. 처음 이름은 이 치(李齒)였으며 시호는 성절(聖節)이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공주 금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홍수로 더 나아 갈 수가 없었다. 이때 이 도가 묘책을 올려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그 뒤 왕건은 이 치가 <강을 건너게 했다>는 뜻으로 이름을 <도(棹.노저을도)>라고 개명해 주었다.
이 도는 말년에 군사 요충지인 전의현 운주산성을 쌓고 이곳에 영주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묘소는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다. 으며 향사일은 음력 3월3일과 10월2일이다.
전의는 연기군 전의면의 지명이다. 한편 전의이씨에서 예안이씨가 분관되어 나갔다. 그래서 흔히 <전의.예안이씨>라고 부른다.
전의이씨는 문의공 이언충과 효정공 이정간, 문장공 이 혼의 후손에서 큰 인물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룬다. 예안이씨는 문장공을 시조로 하는 분적종이다.
문의공 이언충은 고려 충렬왕 때 관직에 올라 지춘추관사를 지낼 때까지 충선. 충숙. 충혜왕의 4대를 거쳐 왕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1321년 정조사로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대원외교에 공이 컸다.
효정공 이정간은 시조의 11대손이다. 사헌부 요직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재임 중 노모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퇴한 효자였다. 그의 나이 80이었고 노모는 100세를 맞아서였다. 그는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여 노모를 즐겁게 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은 그를 정2품으로 올리고 궤장(고관이나 중신이 은퇴할 때 임금이 내리는 지팡이)을 하사했으며 친필로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 여덟자를 내렸다.
오늘날 전의이씨 문중 후손들은 이 문구를 가훈으로 전하면서 나무에 새겨 족보 첫머리에 찍어놓았다. 더욱이 세종은 이정간의 부인 낙안김씨를 정대부인으로 봉직하는 특전을 내렸다. 이 집안은 그 손이 번창하여 부인 생시에 내외 증손이 1208명, 현손이 90여 명이었다.
효정공 이정간의 둘째 아들 이사관 때에 와서 효정공의 후손들은 개화기를 맞는다. 문의공의 후손에서는 특히 증손인 이 구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영의정 이 탁과 우의정 이상진이 나왔다. 전의이씨는 2000년 현재 133,237명이며 예안이씨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반년 전 나라 잃은 절망감에 영국 땅에서 유서 한 장을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다. 30대 초반의 젊은 외교관 이한응이 바로 그 사람이다. 국은(菊隱) 이한응(李漢應)은 영국에서 대일외교로 고군분투하다 32세의 나이에 끝내 자결했다.
이한응은 고종 11년 (1874)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화산리에서 아버지 이경호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철이 들자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16세가 되면서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서양 새 문물에 접하기로 마음먹은 뒤 서울로 올라가 정부에서 세운 영어학교에 들어갔다.
고종 34년(1897) 그는 처음으로 한성부주사라는 말단 벼슬에 올라 2년간 근무하다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모교의 영어교관이 되었다. 다시 2년 후인 고종 38년 민영돈이 영국과 이탈리아 겸임공사로 지명되자 영어에 능통한 이한응은 3등 참사관에 임명되어 함께 런던으로 부임했다. 그때 나이 28세였다.
3년만인 1904년 공사 민영돈이 귀국하고 대리공사의 직책을 맡은 그는 한국의 외교권을 반신불수로 만든 한. 일의정서의 강제성. 불법성을 각국 사신들을 상대로 호소한다. 그러나 약소국의 호소를 들어줄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1905년 이한응은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인 영국이 한국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일본에 동의한다는 것을 탐지한다. 그 뒤 피나는 호소와 항변을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조국은 망했다. 약소국 외교관의 무력, 갖은 굴욕,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그는 하나밖에 택할 길이 없었다. 1905년 5월12일 그는 형과 부인 강씨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조용히 음독자결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광성리 금원부락 뒷산에 있다. 전의이씨인 이희승 박사가 비문을 지었다.
한편 이한응은 전의이씨 후손이다. 전의이씨의 시조는 이 도(李棹)다. 처음 이름은 이 치(李齒)였으며 시호는 성절(聖節)이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공주 금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홍수로 더 나아 갈 수가 없었다. 이때 이 도가 묘책을 올려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그 뒤 왕건은 이 치가 <강을 건너게 했다>는 뜻으로 이름을 <도(棹.노저을도)>라고 개명해 주었다.
이 도는 말년에 군사 요충지인 전의현 운주산성을 쌓고 이곳에 영주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묘소는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다. 으며 향사일은 음력 3월3일과 10월2일이다.
전의는 연기군 전의면의 지명이다. 한편 전의이씨에서 예안이씨가 분관되어 나갔다. 그래서 흔히 <전의.예안이씨>라고 부른다.
전의이씨는 문의공 이언충과 효정공 이정간, 문장공 이 혼의 후손에서 큰 인물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룬다. 예안이씨는 문장공을 시조로 하는 분적종이다.
문의공 이언충은 고려 충렬왕 때 관직에 올라 지춘추관사를 지낼 때까지 충선. 충숙. 충혜왕의 4대를 거쳐 왕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1321년 정조사로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대원외교에 공이 컸다.
효정공 이정간은 시조의 11대손이다. 사헌부 요직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재임 중 노모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퇴한 효자였다. 그의 나이 80이었고 노모는 100세를 맞아서였다. 그는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여 노모를 즐겁게 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은 그를 정2품으로 올리고 궤장(고관이나 중신이 은퇴할 때 임금이 내리는 지팡이)을 하사했으며 친필로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 여덟자를 내렸다.
오늘날 전의이씨 문중 후손들은 이 문구를 가훈으로 전하면서 나무에 새겨 족보 첫머리에 찍어놓았다. 더욱이 세종은 이정간의 부인 낙안김씨를 정대부인으로 봉직하는 특전을 내렸다. 이 집안은 그 손이 번창하여 부인 생시에 내외 증손이 1208명, 현손이 90여 명이었다.
효정공 이정간의 둘째 아들 이사관 때에 와서 효정공의 후손들은 개화기를 맞는다. 문의공의 후손에서는 특히 증손인 이 구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영의정 이 탁과 우의정 이상진이 나왔다. 전의이씨는 2000년 현재 133,237명이며 예안이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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