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망받던 외교관, 보수적 분위기로 압박 받으며 적응장애로 오랫동안 두문불출.. 최근 정신건강 회복
나루히토 새 일왕(德仁·59)의 승계의식이 1일 개최되면서 마사코(雅子·55) 왕세자빈 역시 왕비가 됐다. 미국 하버드대 졸업생이자 '병아리 외교관'이던 그가 왕비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사는 다사다난했다.
1일 NHK 등에 따르면, 나루히토 일왕은 이날 오전 10시30분부터 도쿄 고쿄(皇居·일왕이 거처하는 궁) 내 접견실인 마쓰노마(松の間)에서 개최된 '검새(剣璽) 등 승계식'에서 일본 왕실의 상징물인 삼종신기(三種神器) 등을 넘겨 받았다.
나루히토 일왕은 연미복 차림으로 연단에 서서 삼종신기 중 검과 곡옥, 그리고 국가의 상징인 국새와 일왕의 도장인 옥새가 인계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이렇게 1989년 즉위한 제125대 아키히토 일왕이 물러났다. 30년 4개월간의 '헤이세이' 시대는 막을 내렸고, '레이와' 시대가 개막했다. 동시에 마사코 왕세자빈도 왕비가 됐다.
◇촉망받던 외교관, 왕세자빈 되다
마사코 왕비는 왕세자빈이 되기 전, 외교관을 아버지로 둔 엘리트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小和田 雅子)였다.
마사코 왕비는 외교관이자 국제사법재판소(ICJ) 재판관을 지낸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小和田 恒) 밑에서 장녀로 태어나 러시아, 스위스, 미국을 오가며 거주했다. 자연히 영어를 비롯 러시아어·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 등 다수의 제 2외국어를 구사하게 됐다.
1985년엔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법학부로 편입했다. 이후 마사코 왕비는 공부를 시작한지 1년 만에 일본 외무고시에 합격, 외무성에서 일을 시작했다.
마사코 왕비의 운명이 바뀐 건 1986년 10월, 갓 외교관이 됐을 때였다. 마사코 왕비는 엘레나 스페인 공주의 도쿄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리셉션에서 나루히토 일왕을 처음 만났다. 마사코 왕비는 외교관 자격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나루히토 일왕의 의전을 맡았다. 그는 영국 옥스포드대에서 사학을 공부하던 26세 청년이었다.
나루히토 일왕은 이 자리에서 마사코 왕비의 당당하고도 똑똑한 매력에 빠졌다. 나루히토 일왕은 당시 마사코 왕비에게 "어떤 외교관이 되고 싶으냐"고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나루히토 일왕은 첫만남을 회상하며 "그(마사코)는 겸손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명확하게 말했다.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 나루히토 일왕은 이후 마사코 왕비에게 무려 7년의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연락, "평생 최선을 다해 지켜주겠다"며 청혼했다. 나루히토 일왕의 노력이 통했던 것인지, 두 사람은 1993년 혼인했다. 외교관이었던 마사코가 꿈을 접고 왕세자빈이 된 것이다.
◇'아들' 낳지 못한 왕세자빈, 적응장애 앓다
마사코 왕비는 외교관 출신으로 일본 왕실외교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으며 왕세자비가 됐지만, 결혼 직후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비판은 특히 보수적이고 남존여비 사상이 심한 일본 왕실 내부와 왕실 지지층으로부터 쏟아졌다.
1993년 결혼 발표 기자회견에서부터 마사코 왕비는 입길에 올랐다. 예비신랑 보다 더 많이 말해서다. 이날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마사코 왕비는 9분37초, 나루히토 일왕은 9분9초 말했다. 나루히토 일왕이 어떤 말을 하면 마사코 왕비가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거나 "덧붙여 말씀드리면" 등으로 말을 이어갔는데, 이런 태도가 왕실여성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왕실가 여성이 남성 보다 더 많은 발언권을 가진 건 지지층에게는 문제적인 일이었다. 일본 여성 세븐(女性セブン)지는 "이때부터 마사코 왕비를 향한 일본 궁내청 관계자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마사코 왕비가 나루히토 일왕 보다 키가 크다는 것 역시 눈엣가시로 여겨졌다.
가장 큰 문제는 '아들' 문제였다. 일본 왕실에선 '남성'이 매우 중요시 여겨진다. 일본 왕실 규범에서는 남자만 일왕이 될 수 있다. 나루히토 이후 왕위 승계 순위가 후미히토, 그리고 후미히토의 아들인 히사히토 순인 것이나, 평민과 결혼할 경우 왕자는 그렇지 않지만 공주는 왕족 지위를 박탈당하는 것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같은 규범에 따라 마사코 왕비는 왕세자빈 시절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마사코 왕비는 2001년 딸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았지만 아들이 아니었다. 자연히 궁 내외로부터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마사코 왕비가 연이은 유산과 노산으로 산후우울증을 겪자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마사코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식의 보도가 쏟아졌다.
결국 마사코 왕비는 궁 안에 갇혔다. '금박 새장에 갇힌 왕세자빈' '일본 왕실의 죄수' '규격품이 되기를 거부한 미운 오리 새끼' 등 다양한 별명도 얻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2003년 대상포진이 발병해 요양생활에 들어갔지만 컨디션은 나빠져만 갔다. 2006년 궁내청은 그가 '적응장애'를 앓고 있다고 발표했다.
나루히토 일왕은 마사코 왕비가 적응장애 판정을 받은 해 5월 기자회견에서 "마사코의 커리어과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라며 폭탄발언을 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마사코 왕비는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를 향한 언론의 뭇매는 이어졌다. 2008년 아이코 공주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등교를 거부하고 섭식 장애를 겪자, 일본 언론은 마사코 왕비의 정신분열이 아이코 공주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 보도했다.
다행히 마사코 왕비는 정신건강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 아키히토 전 일왕이 2019년 4월30일 퇴위하겠다고 발표한 뒤부터는 눈에 띄게 공무 수행과 외부 일정 소화가 많아지며 왕실 업무 수행에 복귀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2017년 12월10일에는 성명을 발표해 한 해동안 일본 내에서 발생한 자연재해 피해와 이재민들에 대한 위로의 뜻을 전달했고, 지난해 12월9일에는 성명을 통해 앞으로 국민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체력 회복을 위해 노력한 결과, 예전보다 많은 공무를 할 수 있게 됐다"며 "힘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드러냈다. 마사코 왕비는 앞으로 교육과 빈곤, 환경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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