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조선시대 인천이씨 족보이야기

백삼/이한백 2018. 3. 23. 13:49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은

'아유타국 공주'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과 결혼.

10 아들을 낳았는데, 차남과 막내에게 허씨 성을 내렸다.

 

2딸 중 장녀 영안공주는 태사 배열문에게 출가
둘째 공주는 신라 석 태자비가 되었다고 전한다.

허황후가 임종할 무렵에 김수로왕에게 남긴 유언.

.

“머나 먼 동쪽 나라로 시집와서 대왕을 모시다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니 더 바랄 것이 없사오나

아쉬운 일이 있다면 저의 성을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수로왕은 그 유언을 받아들여.,'한 아들보다

두 아들에게 성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되어

둘째와 막내인 열째 아들에게 모성을 따르도록 한 것.

 

홍천군 내촌면.,김해 허씨 재실에 보관된 문서 기록.

'막내아들은 왜로 건너가 세계를 이었다.'고 전한다.

 

삼국시대 지도

 
“김수로왕의 10세손이던가,

구해왕이 신라에 나라를 넘겨

가락국은 망하고 그 자손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지요."

 

그때 김해에 그냥 눌러 살게된 후손들은

본관을 김해로 삼아 김해 허씨가 되었고요.

하주(경북 하양)로 옮겨 세거한 후손은 하양 허씨,

 

양천에 터를 잡은 허씨들은 양천 허씨,

태인으로 거처를 옮긴 후손들은 태인 허씨.

모두 다 '가락종친회' 김수로왕의 후손이지요."

 

조선시대 김해허씨 과거급제자.,121명.

오늘날 김해허씨 저명인사는 기라성 같다.

 

▲허정(전 국무총리)

▲허형구(변호사, 전 대검차장)

▲허종현(전 부산대총장, 동의대학장)

 

▲허검(순천향대학장)

▲허균(전 적십자병원장)

▲허문도(전 문공부차관)

 

▲허만호(전 대검검사)

▲허만훈(전 강원도의회의장)

▲허민(전 연합철강회장)

 

▲허정구(삼양통상회장) ▲허준구(럭키금성 부회장)

▲허택도(허씨장학회장) ▲허흡(전 대구시장) ▲허갑도.

▲허경구(국회의원) ▲허만일(국립중앙박물관 사무국장)

 

▲허명(사학가, 한국학연구원교수) ▲허문택(동아대교수)

▲허석구(농수산부 공무원교육원장) ▲허선도(국민대교수)

▲허성호(중앙대교수) ▲허신구((주)금성사대표이사사장)

 

▲허정호(신한병원장) ▲허천택(동국대교수)▲허창운(서울대교수)

▲허훈도(대종회장) ▲허완구(프로씨름협회회장) ▲허맹구(신일산업(주)

▲허동수(호남정유(주)전무이사) ▲허동섭(공학박사) ▲허남훈(동력자원부)

 

▲허남진(금강금속회장) ▲허복선(제일기계사장)

▲허상영(중소기업중앙회감사) ▲허신행(농학박사)

▲허재구(구로구청장) ▲허용원(정광섬유회장)

 

▲허필은(풍림산업회장) ▲허학구(정호금속회장)

▲허형택(해양연구소장, 이학박사) ▲허흠(전 주택은행전무)

▲허후(서예가, 전 경기상업고등학교장) ▲허기(안전기획부 기획관리관)

▲허종성(KBS사업단감사) ▲허화평(전 청와대수석비서관) ▲허정훈(부장판사)

 

구형왕이 가락국을 신라에 양위 할 무렵에

김해는 '동생 구해에게 통치를 맡겼다고 전한다.

그후, 김해 지역이 신라에 흡수되자.,인천으로 이주.

 

인천이씨(仁川 李氏)는 "경원이씨" 또는 "인주이씨"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 후손들이

언제 진해에 들어와 세거하였는지 경위는 불분명하다.

'창원시 진해구'에 위치한 망산도는 허황후가 입도한 곳.

.

..........................이허겸(李許謙, ? - ?)

고려의 외척으로 고려 문종의 장인 이자연의 할아버지이다.

현종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

외할아버지이며 인예태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의 증조부이다.

 

김수로왕· 허황옥의 후손이다.

비는 경순왕의 아들인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딸이다.

이자연(李子淵)과 이자상(李子祥), 이자겸(李資謙) 등의 선조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또는 경원(慶源,仁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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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대는 본래 허씨(許氏)였으나

그의 선조 중에 허기(許奇)는 경덕왕

병마사대광(兵馬使大匡)을 지내다가 에 입조.

 

관료생활을 하면서 당나라 현종 천보 14년 겨울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이듬해 2월에 使臣의 명을 받들고

파촉(巴蜀)을 수행하자 당 현종은 그 노고(勞苦)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오언절구 고시(古詩) 1편을 선물로 주고, 다음해 정유년에

당 현종을 따라 환도하자 현종은 그에게 자신의 성인 이씨(李氏) 성을 하사

 

그 후손 중 일부는 이허(李許)의 복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가계가 실전되었으며 이허기 이후, 이검, 이파,이귀(李貴),

이준(李浚)으로 이어지나, 이들과의 관계는 실전되어 미상이다.

 

부모에 대한 기록 역시 미상이며

그는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 손녀이자

대안군 김은열의 딸 경주 김씨와 결혼하였다.

 

아들은 이한으로 이자연의 아버지이고,

딸은 김은부에게 출가했는데, 3외손녀가 현종 비.

그 뒤 그의 증손녀 세명 역시 문종 비로 입궐하게 된다.

 

손자 이자연은 문하시중을 지냈고 문종의 장인이 되었으며,

손자 이자상(李子祥)의 아들 이예는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이예의 딸' 정신현비 이씨선종의 비가 되었다.

 

고손자 이자겸의 둘째 딸은 예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연덕궁주가 되었다가 아들 인종을 낳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뒤에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들이기도 하였다.

 

1022년 세 명의 외손녀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元平王后)가

모두 고려 현종의 후비로 들어가면서 특별히

상서좌복야 겸 상주국(上柱國)에 추증되었다.

 

하여,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 봉작 &

인천 식읍(食邑) 1,500호(戶)가 추서되었다.

 

19세기 초에 인천에 그의 사당이 마련되었다.

사당 원인재는 처음 연수동 신지마을에 건립.

 

연수동 택지개발로 1994년 시공과 동시에 해체.

이허겸의 묘역 옆으로 옮겨져 복원 증축되었다.

<원인재>는 후일 인천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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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남부 세거 성씨.

고려 시대부터 인천광역시 지역에 세거하던 성씨이다.

원래, '인천이씨는 양천허씨에서 분리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시대 문종(文宗)에서 인종(仁宗)까지

7대에 걸쳐 5 태후(太后)와 5 왕후를 배출하여

인천 읍호(邑號) 승강(昇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 세조(世祖) 비의 외향(外鄕),

즉, 어머니의 고향이 인천이라는 이유로

군(郡)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인천 이씨의 본거지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일대이나,

인천광역시 전 지역에 걸쳐 세거.

 

인천 이씨의 기원은 김해 허씨(金海 許氏)와 연결된다.

가락국 수로왕의 아들 중 허황후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

인천이씨 후손으로 알려진 인물.,아찬(阿湌) & 허기(許奇).

 

허기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을 때

'안록산의 난'때 현종(玄宗)을 호위해  이씨 성을 사성 받았다.

그러므로, '인천이씨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허기'의 10세손.

인천 이씨가 인천에 정착하게 되었던  그 과정은

인천 이씨 문중 문집 '소성세덕 & 고려사'에 있다.

소성세덕(邵城世德) 기록에는

“공의 이름은 허겸(許謙)이니

김씨(金氏)에서 허씨가 되었고,

허씨로서 이씨의 후손이 되었다.

 

그 선조는 가락국 수로왕의 왕자였는데,

가락국 수로왕이 왕비의 말에 감동되어

허황후 성을 따라 김씨로서 허씨가 된 것.

 

그 후에 사명을 받들고 당 현종조에 입조했는데,

황제가 그를 가상히 여겨 황성(皇姓)을 하사했으니,

허겸은 허씨로서 황성을 사성받은 이씨가 되어.,이허겸.

 

 공이 세신(世臣)의 주손(冑孫:맏손자)으로서

신라 말엽에 탄생하여 고려조에 벼슬하였으며,

관작이 '상서 좌복야 상주국 개국후'에 이르렀다.

 

관작 '尙書左僕射上柱國開國侯'

하여, 소성백(邵城伯)을 봉하여

식읍(食邑) 1,500호를 하사하였다.

 

"자손이 이로 인해 소성부 동쪽 소래산(蘇來山) 아래 거주.

소성에서 이씨가 그 터를 잡은 것은 이에서 시작되었으며,

드디어 전국에 번창하였다.” - 소성세덕(邵城世德).,기록-


'고려사-이자연전(李子淵傳)' 

 

이자연인주(仁州) 사람이다.

그 조상은 신라 대관으로 당나라 사신,

천자가 가상히 여겨.,이씨 성을 하사한 것.

 

그후, 그의 자손이 소성현,

 즉, 인주(현재 인천)로 이주.

 

이허겸 대에 와서 소성백의 봉작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이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 이한(李翰)

이한의 아들이 이자연(李子淵), 이자상(李子祥)인 바

이자상은 죽은 뒤에 상서 우복야 벼슬을 추증 받았다.”

인주 이씨는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

그 세력의 형성에는 가야계인 선대가 신라 하대에

가야계의 몰락과 함께 인천 지역으로 출거하였던 것.

 

이를 전후하여 서해안을 중심으로

당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였던 것 같다.

 

당의 황제로부터 이씨를 사성 받은 후

그 자손들이 인천에 정착하였다는 것은

호족 이씨가 당과 관련이 깊은.,해상 세력.

인주 이씨가 고려 왕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안산 김씨 가문의 김은부(金殷傅)와의 혼인에서 기인.

 

이허겸의 딸, 안효국대부인이 낳은 3딸이 현종 비가 되며

이허겸덕종 정종· 문종의 외증조할아버지가 되었던 것.

 

 

'상서 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

현종때 받았던 작위와 1,500호의 식읍.

 

이로써 인천을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을 통해

기반을 다진 인주 이씨는 고려 왕실과의 외척으로

고려시대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이 식읍 1,500호를 하사받은.,인천

이후 그 후손들이 인천에 세거하며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인천이씨를 권문세가로 발전시킨.,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

 

이자연은 1052년(문종 6) 2월 큰딸을 문종 왕비로 들인 후,

나머지 두 딸도 차례로 문종에게 출가하였는데, 인예 태후가

문종과의 사이에서 10명의 왕자와 2명의 궁주(宮主)를 낳았다.

 

그리고 둘째 딸, 셋째 딸까지 포함하여

문종과 사이에서 13왕자 6공주를 낳았다.

 

이에 왕위에 오른 숙종(肅宗)은 관례에 따라

인예 태후의 내향(內鄕 : 왕비의 친정 고장)인

인천을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다.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李資謙)

둘째 딸을 '예종(睿宗)의 비'로서,

즉, 순덕 태후(順德太后)로 들였다.

 

순덕 태후는 사저에서 인종(仁宗)을 낳았는데,

인종 즉위후,  어머니 순덕 태후의 내향.,경원군.

그곳을 인주로 승격후 지주사(知州事)를 파견하였다.

 

이는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에 위치한

인천도호부 관아의 시원(始原)이 되는 곳.

 

이자겸의 난으로 인주 이씨 위세가 한풀 꺾이지만

고려 말까지 명문거족으로서의 위치는 계속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인천은 경원부(慶原府)로 승격.

 

이는 인천이 ‘칠대 어향(七代御鄕)’이기 때문이었다.

문종부터 시작하여 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을 거쳐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 동안 인천 이씨가 왕실과 혼인.

 

순종·선종·헌종·숙종·인종 5대의 모후가 인천 이씨였으며,

문종·순종·선종·예종·인종 5대 왕의 왕후가 인천 이씨였다.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고려 때로서 

그 시조로 알려진 이허겸으로부터 

고려 말 이인로에 이르기까지.,전성기.

 

이허겸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그의 사돈 안산김씨와 깊은 관련을 지닌다.

 

..............해설................

'이허겸의 사위' 김은부는

거란 침입때 개경을 떠나서

남으로 몽진한 현종을 도운 인물.

 

원성 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는 김은부의 딸로서 

덕종, 정종,·인평 왕후, 경숙 공주(景肅公主)를 낳았다.

 

그녀를 왕비로 삼자 외조(外祖) 이허겸(李許謙)은

'소성현개국후' 관직 및 식읍 1,500호를 하사받았다.

인천에서 세력을 떨친 안산김씨는 경주김씨에서 유래.

 

인천이씨의 기원은.,김해허씨(金海許氏)이고

양천허씨 역시.,허황후 성씨를 따른.,김해허씨.

인천이씨는 '김해허씨 후손' 양천허씨의 한 갈래.

 

이들 족보를 분석하면.

'허기 & 이허겸' 사이에 

허선문 & 허사문., 형제.

 

형 허선문은 양천허씨의 시조이고 

아우 허사문은 태인허씨 시조이다.

허사문은 인천이씨 족보에서.,'허준.'

 

허사문은 수로왕비 보주태후의 30세손이고

고려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허즙, 허도를 낳았다.

 

형 허즙은 태인허씨 가문를 이었고

동생 허도(이허겸)은 '인천이씨' 시조.

....................................................

 

고려시대 인천이씨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명멸.

조선 시대에도 인천 이씨와 왕실과의 관계는 계속된다.

인천은 1459년(세조 5)에 군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이는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과 왕비의 친가와 외가

고을 등급을 올려주는.,관례.

 

세조는 파주에 기반을 둔 윤번(尹璠)의 딸과 혼인.

윤번은 인천 이씨 이문화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즉, '세조비' 자성 왕비 외향이 인천이라 도호부로 승격.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李全粹(이전수) :文科 世宗21年(1439) 親試 丙科.
李若采(이약채) (1727 丁未生) : 文科英祖37年(1761) 庭試 丙科
李尙運(이상운) (1734 甲寅生) : 文科 英祖32年(1756) 式年試 丙科
李成童(이성동) (1734 甲寅生) : 文科 燕山君1年(1495) 別試 丙科
李灌(이관) (1734 甲寅生) : 文科 太祖2年(1393) 式年試 同進士
李活(이활) (1734 甲寅生) : 文科 世宗5年(1423) 式年試 同進士
李孝信(이효신) (1734 甲寅生) : 文科 世宗20年(1438) 式年試 丁科
李忠範(이충범) (1520 庚辰生) : 文科 明宗13年(1558) 式年試 丙科
李時立(이시립) (1548 戊申生) : 文科 宣祖38年(1605) 別試 丙科
李孝禮(이효례) (1548 戊申生) : 文科 世宗1年(1419) 式年試 同進

 

等 모두 60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11名, 武科13名, 司馬試35名, 醫科1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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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구 통계에 따르면, 인천 이씨는

전국에 21,448가구 68,628명이 살고 있다.

인천광역시에는 844가구, 2,786명이 거주.


'인천 이씨 시조' 이허겸의 묘와 묘려(墓閭)인

.원인재'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 584번지.

 

 

............

청평사.

............. 

 

 

소양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0분쯤 가면,

아름다운 오봉산(779m) 기슭에 안긴 청평사

고려 광종(973년)때 영현선사가 처음 세웠다.

 

고려 선종 6년(1089) 과거에 급제했던 이자현은

관직을 버리고 청평산에 들어와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청평사 주변에 대규모의 정원을 가꾸며 즐겼다. 

 

이자현은 28세에 벼슬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사(오봉산)에 들어가

승려가 아닌 자연인으로 평생 살았다.

 

"'물고기가 물을 좋아한다.'고 하여

새까지 깊은 못으로 가서는 안된다."

 

"새는 새로서 새를 길러

숲속의 즐거움에 내맡겨 두고

물고기는 물고기를 보고 물고기를 알아

강호의 즐거움을 제멋대로 즐기게 놓아두자."

 

"한물건이라도 있어야 할 곳을 잃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제각기 마땅함을 얻도록 해야 한다."

 

"새의 즐거움은 깊은 숲속에 있고

물고기의 즐거움은 깊은 물속에 있다."

 

 - 이자현(1061~1125) -

 

'이자겸(?~1126)의 난'을 일으킨.,사촌 형.

이자겸은 당대에 막강한 외척을 형성하였던

인주(인천)이씨 가문의 한때 중심인물이었다.

 

이자겸과 이자현은

'사촌형제' 사이지만

각각 가는 길이 달랐다.

 

 .............이자겸...........

'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은

딸 셋을 문종에게 시집보냈다.

 

첫째딸 인예왕후는 순종, 선종, 숙종의 어머니.

고려 12대왕, 13대왕 14대왕을 생산한 국모였다.

 

이자겸의 누이동생 장경궁주는 순종(제 12대왕)의 부인.

이자겸은 '숙종의 아들' 예종(제 15대왕)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사위 예종과 딸 문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제 17대왕 인종.

 

이자겸은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냈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다.

이자겸이 권력을 좇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그 결과, 이자겸은 인종 위에 군림할 수 있었으나,

그 권세가 지나쳐 정적들에게 쫓겨나 영광에 유배되고

두 딸은 폐비가 되고 말았다. 이자겸이 영광에서 맛본 조기.

 

머리에 돌처럼 딱딱한게 있어

석수어(石首魚)라 부르던 조기.

 

이자겸은 말린 석수어 맛에 반해,

이를 굴비라 이름짓고 왕에게 진상.

 

굴비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말.

이자겸은 유배당한 1126년 그해 겨울

유배지 영광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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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부귀영화를 쫓았던.,이자겸.

그래서, 상반된 삶은 살았던.,이자현.

 

사각형 연못에 계곡물을 끌어들여
연못 위에 오봉산이 비치도록 했다.
조선 명종 때 보우가 중창 복원한 청평사.

.

아홉가지 소리를 낸다는 높이 9m 구성폭포.

주위 경관이 빼어난 청평사계곡을 끼고 있다.   

보물 164호인 회전문과 3층석탑 등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정원 - 청평사.,문수원(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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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원.

........... 


 

 

청평사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전통정원'., 문수원. 

이자현은 베옷 입고 나물밥 먹으며 선(禪)을 하였고,
평생 수도생활로 일관하다가 청평사 에서.,생을 마감.

 

우리나라의 전통정원 - 청평사.,문수원(고려시대). 


청평사에 37년 간 머물며

문수원과 8 암자를 만든다.


권세욕과 속세의 탐욕을 버리고 평생 마음을 닦는다.
왕의 부름을 받고도 부귀권세를 포기한 지조가 놀랍다. 
청평사는 회전문에 얽힌 상사뱀의 전설 또한 백미이다.


1089 ~ 1125년에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정원.
청평사 입구 구성폭포에서 오봉산 식암까지 3km의 계획된 정원.
지금은 자연에 묻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일부분만 남았다.

문수원은 동서남북 네 구간으로 나뉘어 조성.

 

청평사(문수원) 답사 - 설명

구성폭포 서쪽의 축석, 연못. 석실. 정자터., 중원(中苑),
복희암 연못, 동굴, 좌선대, 수만식(水滿式)의., 남원(南苑)
동쪽 작은 계곡의 정자와 소규모 축석한 지역이., 동원(東苑).
왼쪽 계곡 위쪽의 해탈문을 지나 적멸보궁까지가., 북원(北苑).

이자현이 주야로 선도(仙道)를 닦았던 장소는 북원(北苑).
선동(仙洞), 석산(石山), 석실(石室), '淸平息庵'(청평식암),
그 주변의 좌선대와 돌계단 등등 선경(仙景)을 이루는 정원.

이자현은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계곡에 수로를 만들고,
정원 안 영지에 오봉산이 비치게 만들고 물레방아를 돌렸다.
오봉산 정상까지 가파른 계곡을 돌로 쌓아 숲과 절묘한 조화.

 

일본 교토 사이호사(西芳寺) 정원보다 200년 앞선., 문수원.
우리나라 고산수식(古山水式)이 일본보다 앞선 또 다른 증거.

현재, 이자현의 부도 오른쪽에 있는 연못이 영지(影池, 南池)
영지의 밑바닥에서 고려말 청자편과 조선시대 백자편이 발견
규모는 남북19.5m, 북쪽 호수 안이 16m, 남쪽 호수 안이 11.7m

뒤쪽이 넓은 사다리꼴인 이유는 사각형으로 보이게 하기 위함.
연못 속에 큰 돌 셋을 놓아둔 것은 삼신산의 봉우리를 상징한다.
영지는 물이 맑고 깨끗해 오봉산 부용봉(芙蓉峰)이 비치기 때문.

이자현은 영지를 중심으로 정원을 꾸민 것.
누석식(壘石式)정원을 중심으로 영지와 정자,
청각적인 효과를 위한 수구식(水溝式)정원양식.

평지의 정원(平庭)과 계곡에 자리한 정원(溪庭),
산속 정원(山庭)은 지형에 따라 여러 형태의 정원
<청평사 문수원기비> 기록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중국 황산의 문수원...............
중국 황산(黃山)은 '운해가 아름다운 곳’
중국 10대 관광지 가운데 하나 황산(黃山).
인천 국제공항 - 황산 간 직항로 2시간 거리.

황산은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
중국 남부 안휘성 동쪽에 있는 중국의 5대 명산
황산의 옥병루(1,680m)는 원래 문수원의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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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청평사.,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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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 북산면과 화천군 간동면 경계.,오봉산(五峰山).

백치고개를 사이에 두고 부용산과 마주보고 있는 오봉산.

봉화산·수리봉이 주위에 있고 5 암봉이 줄지어 있어 오봉산
 
남쪽 사면 계류는 청평사 계곡을 이루며 소양호로 흘러든다.
청평사에 회전문, ·3층석탑, 구성폭포, 공주탕, 공주굴이 있다.
또 고려시대 정원터는 옛 정원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선착장 - 구성폭포 - 청평사 - 정상,
배후령-정상-청평사 등산로가 있다.

 가을빛 속으로...춘천 청평사 (1) 


 소양호를 끼고 있어 산행 뒤에 배를 타고 유람할 수 있으며,
5월 민속 축제 소양제가 열리며 송어 향어 춘천막국수가 유명
춘천- 소양강 댐 시내버스 운행,  소양호 - 청평나루 선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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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3년(고려 광종) 승현선사가 백암선원 명칭으로 창건한 청평사.
1068년(고려 문종 22년) 이개가 절을 중창해 보현원이라 불렀다.

고려 불교의 선구자 '이자현'(1079~1125. 4. 21 )

"평소에 그대 보기를 원하여 그리움이 날로 더하는 도다.
어진 이 뜻을 빼앗기 어렵지만 내 그리운 마음은 어이할꼬"

1117년 예종이 시를 지어 수차례에 걸친 부름에도 불구하고
청평사에서 은거하며 참선을 닦았던 그의 부도는 구성폭포 위.
이자현이 관직을 버리고 36년간 참선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는 곳.

아버지 이의가 20년 전 암자를 차린 보현원에 들어간 이자현.
이인로의 파한집에도 이자현이 이곳에 문수원을 꾸몄다는 기록
현재 문수원에는 암(唵), 당(堂), 정(亭), 헌(軒) 등 십여 채의 건물.

 
순종때 진사과 급제 29세때 청평사에 은거한 이자현
날마다 유유하게 거닐거나 홀로 앉아 밤새도록 명상
견성암에서 입정에 들어가 7일 만에야 나오기도 했다.

이자현은 과거에 급제, 재상이 되고도 남았을 명문 가문의 선비.
부귀영화를 버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만 전념해 존경받았다.

이자현은 고려건국 초기에 왕가와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의 학자.
이자연은 불심 깊은 가문이고 그 딸 셋은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다.
"과욕을 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 이자현이 한 말.

'나옹화상, 매월당 김시습이 거주했던 유서깊은 사찰.'

1557년(이조 명종 12년) 보우스님이 사찰을 다시 중건하고 청평사.
뱃길에서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30 분 정도 걸으면 나타나는 청평사
고찰다운 전설들을 간직한 곳인데 <회전문>에 얽힌 전설이 애틋하다.

보물 164 호, <회전문> 아래층은 3층, 위층 축대는 7단.
건물정면 3칸, 측면 1칸, 기둥 8개, 문짝 매다는 기둥 2개.
가운데 한칸은 통로, 양쪽의 좁은 벽 공간에 사천왕상 안치.

'하필이면 좁은 벽 공간에 사천왕을 안치했을까?'

안쪽 측면에 마루를 놓아 매우 소박하게 꾸민 맞배지붕 건물.
특히, 절에서 보기드문 홍살을 천장에 가로로 배열한 <회전문>
'청평사 탐방의 하일 라이트는 회전문에 얽힌 상사뱀의 전설이다.

'회전문에는 어떤 전설이 얽혀있는 것일까?'

당 태종의 딸 평양공주가 민속경연에서 묘기를 보인 청년과 첫만남.
두 사람은 신분 차이를 초월하여 깊은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청년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밤마다 남모르게 공주궁으로 찾아갔다.

공주가 청년과 사랑에 빠진 사실을 뒤늦게 안 당 태종은 분노했다.
태종은 신분이 낮은 청년을 못마땅히 여겨 죽이자 상사뱀으로 환생.
밤마다 찾던 공주궁으로 들어가 공주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오봉산-청평사-소양강댐

 

'밤낮도 없이 공주의 몸 속으로

 은밀한 곳까지 파고드는 상사뱀.' 
 

이것이 꿈결인가? 생시인가? 무지개 위를 걷는 것일까?
비몽사몽 구름타고 하늘을 나르는 듯한 혼미함 속의 나날.
사랑하는 청년이 다시 살아 돌아온듯 하다가도 징그러운 뱀.

공주는 상사뱀이 몸안으로 들어온 후 날이 갈수록 병색이 짙어갔다.
전국의 사찰을 돌며 불공을 드리고 치성을 쏟아도 아무 소용 없었다,
병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공주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찰은 '청평사'.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청평사 가는 길

청평사 입구에 있는 구성폭포 부근에 여장을 푼 공주.
몹시도 힘들었기에 상사뱀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한다.

“내가 절에서 밥을 얻어 올테니

잠시만 몸에서 떨어져 줄 수 없나요?”

.

"몸이 너무 피로해 걷기 힘드니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어요"

 

우리나라의 전통정원 - 청평사.,문수원(고려시대).

'어찌된 영문일까? '

 

공주의 몸에서

내려오는 상사뱀.'

 

춘천 청평사

지금까지 한번도 공주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상사뱀.
공주는 목욕재계한 후 법당에 들어가서 불공을 시작했다.
동굴에 남았던 상사뱀은 기다리다 못해 공주를 찾아 나섰다.

상사뱀이 절문에 들어서려 하자 먹구름이 몰려오며 뇌성벽력.
어둠속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며 벼락이 개울을 훤히 비추었다.
상사뱀은 개울 물속에 거울처럼 떠오른 공주의 환영을 보았다.

'잠시도 그리움을 참을 수 없었던 탓일까?'

그 순간 개울속 공주를 향해 몸을 던진 상사뱀.
애처롭게도 개울 속 바위에 온 몸을 부딪쳤다.
온몸을 다친 상사뱀은 급류에 떠내려가고 만다.

'하여, 훗날 그 절문이 이름이 <회전문>.'

 

춘천 청평사 회전문

공주는 그런 줄도 모르고 법회가 끝난 후 동굴로 갔다.
상사뱀은 그곳에 없고 폭포 아래에서 죽은채, 떠 있었다.
공주는 그 광경이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 가련하기도 했다.

'자신을 죽도록 사랑하다가 두번 씩이나 죽게 된 그 운명.'
공주는 그 시신을 정성껏 묻어주고 그 소식을 궁궐에 알렸다.
당 태종은 기뻐 금덩이 3개를 청평사에 보내 법당을 세우게 했다.

 

춘천 소양호

공주는 청평사에 머물며 부처님께 아침 저녁으로 불공을 드렸다.
그리고, 폭포 앞의 굴에서 상사뱀의 혼을 위로하며 명복을 빌었다.
하여, 그 동굴을 공주굴이라 하고 인근의 폭포를 구성폭포라고 한다.

 

'9 가지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7m 높이의 구성폭포.'

공주는 청평사를 떠날 때 구성폭포 위에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청평사의 3층 석탑을 '공주탑'이라고 부른다.

 

춘천 청평사 삼층석탑


상사뱀 전설 속 회전문은

중생에게 윤회설을 깨우치기

위한 '마음의 문'이라 전해온다. 

제79차 춘천 오봉산 산행신청
기암괴석, 암릉이 많은.,오봉산.

청솔바위 & 그 위에 있는.,표지석.

 

춘천 오봉산 산행기(2007. 7. 8)

 

암릉지대 홈통바위

비좁은 굴 속.,남근석.

 

<5월 산행 추천지>소양강의 봄... 춘천 오봉산 (779m) 인기명산 52위

 

멀리 소양호를 바라보며

서있는.,망부석(공주)바위.

 

춘천 청평사, 오봉산

 

오봉산 벼랑 끝.,'수도승' 형상의 바위.

청평사에서 평생 수도생활로 일관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이자현을 떠오르게 한다.

 

제68차 정기산행 춘천 오봉산,청평사 (숨겨진50대명산)

 

청평 호반을 달리는 배 & 청평사.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들

아름다운 낭만적인 데이트 코스이다.

 

오봉산-청평사-소양강댐


깊은 산속 밤하늘의 은하수와 이른 새벽에 들려오는 범종 소리.
아련하게 피어 오르는 소양강 물안개도 청평사에서의 추억거리.
돌아오는 길에 춘천 명물 닭갈비와 막국수를 맛보는 것도 좋을 듯.

 

춘천 소양호와 오봉산...


.....................<청평사 찾아가는 길.>...................................
춘천 시내에서 소양강댐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선착장 하차.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배를 타고 15분 정도 달리면 청평사
승용차로 갈 경우 46번 경춘도로를 따라 가면 소양강댐에 이른다.

소양강댐 입구에 도착하기 2Km 전에
양구 방향으로 좌회전 차로 10분 거리.

남부지방은 중앙 고속도로를 타고
춘천에 도착해 청평사 행 시외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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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 오봉산 2012.05.12(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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