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단숨에 쓴 '王'.. 세살배기 사도세자 글씨 발견

백삼/이한백 2017. 8. 25. 10:12

"글자 몇개 써서 장인에게 드려라"
영조, 자식의 영특함 자랑하려 시켜.. 石-下-春-王-'士혹은 吉' 다섯글자
어환 성대 교수, 서첩 동아일보에 공개.. 서예가 김병기 "힘 느껴지는 글씨"

[동아일보] “글자 몇개 써서 장인에게 드려라”
영조, 자식의 영특함 자랑하려 시켜… 石-下-春-王-‘士혹은 吉’ 다섯글자
어환 성대 교수, 서첩 동아일보에 공개… 서예가 김병기 “힘 느껴지는 글씨”

어환 성균관대 교수가 18일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사도세자의 글씨를 들어 보이고 있다. 어 교수는 “서고에 뒀던 서첩에 이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줄 전혀 몰랐다”며 “소중히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이 아이를 보세요, 영특하기 짝이 없답니다. 글씨도 곧잘 쓰지요. 너는 글자 몇 개를 써서 국구(國舅·임금의 장인)에게 드리거라.”

영조는 1735년 마흔두 살에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 7년 전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열 살로 세상을 뜨고 얻은 늦둥이다. 어릴 적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사도세자가 3세 때 쓴 글씨가 발견됐다. 어환 성균관대 의대 교수(의무부총장)는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서첩을 최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글씨가 쓰인 사연을 담은 후기(後記)에는 다가올 비극 ‘임오화변’(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일)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품 안의 자식 자랑에 바쁜 평범한 아버지 영조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도세자 서첩 표지(왼쪽) 및 후기.
사도세자가 3세 때인 1738년의 어느 날 경종의 장인 어유구(魚有龜·1675∼1740)가 입궐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안고 있었다. 두 해 전 생후 13개월 만에 전례 없이 세자로 책봉하면서 영조는 이렇게 썼다. “너(사도세자)는 내가 늦게 얻었지만 하늘이 특이한 자질을 부여했다. …똑똑하고 침착하기가 남달라서 자라서 총명하고 어질며 효성스러울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사도세자 이선’·수원화성박물관 엮음)
영조실록 등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불과 돌 무렵에 병풍의 ‘왕(王)’자를 보고 영조를, ‘세자(世子)’라는 글씨를 보고 자신을 가리켰다. 세자에게 ‘팔괘(八卦) 떡’을 주자 “팔괘를 어떻게 먹느냐”며 먹지 않았다.

어유구 앞에서 세자가 붓을 잡는다. ‘석(石)’ ‘하(下)’ ‘춘(春)’ ‘왕(王)’…. ‘왕’과 ‘춘’은 세자가 한 해 전에도 썼던 글자다. 세자는 2세 때 큰 붓을 잡더니 ‘온 세상이 임금의 은택을 입은 봄이라는 뜻’의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고 썼다. 신하들이 앞다퉈 글씨를 하사해 달라고 청했다.

나머지 한 자는 ‘사(士)’를 쓰고 실수로 한 획을 더했거나 ‘길(吉)’자를 쓰다 미처 마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슨 자를 쓰려 했든지 간에 영조는 세자의 운명이 길(吉)하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이렇게 쓴 글씨를 어유구에게 줬다. 어유구의 아들 어석정(魚錫定·1731∼1793)이 글씨를 표구하고, 후기와 함께 서첩으로 만들어 집안 대대로 간직하도록 했다. 사도세자가 7세 때 쓴 서첩 ‘동국보묵’ 등이 전해지지만 이렇게 어릴 적 글씨는 이 서첩이 유일하다. 어유구의 8대 후손인 어환 교수는 한국고전번역원장을 지낸 이명학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등의 도움을 받아 최근 서첩의 내용과 사연을 알게 됐다.

본보는 사도세자의 글씨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서예가인 김병기 전북대 교수에게 글씨를 보였다. “이게 세 살짜리 글씨라고요? 붓을 들고 단숨에 글자를 완성했습니다. 붓을 누르는 힘(필압·筆壓) 조절이나 획이 꺾이는 부분 등을 자세히 보면 모양만 따라 그린 게 아니라 서예 교육을 아주 제대로 받은 글씨입니다. 글 쓴 아이의 성격은 진중하다기보다 활달할 것 같습니다.”(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