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중섭

백삼/이한백 2016. 7. 15. 08:31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의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할아버지의 위세는 대단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희주는 정신분열증으로 30살에 일찍 세상을 뜨고....

이중섭의 형은 당시 12살이었고 당시 이중섭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뱃속에 있었다.

 

 

이렇게 부자집 늦둥이로 태어나게된 이중섭은 사랑을 독차지하며 남부러울것없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후에 ...오산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민족 대표 33인 중 한명인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는 함석헌 선생이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학교 였다.

 

오산학교 재학당시 사물을 보고 관찰하고 표현하는 눈이 남달랐던 이중섭은 그림에 눈을 뜨게 되고...

 

이중섭 인생을 미술로 인도한 임용련,백남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중섭 최초의 미술교사이던 임용련,백남순은...

3.1운동에 참여하다 조선을 탈출,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임용련은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중 백남순을 만나 결혼하고 귀국하여 오산 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하게 되고....

이후...

임용련은한국전쟁때 납북되었고

백남순은 1964년 미국으로 떠나게된다...

 

이중섭의 형 이중식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간다.

덕분에 이중섭은 아무런 불편없이 그림 공부를 할수 있었고....

1935년....일본유학을 떠날수도 있었고...

 

물론 이런 점이 나중에 북한정권에 의해 악덕지주 부르조아로 몰리게 되어 힘든 삶의시작의 단서가 되기도 하지만...

 

일본 동경문화학원에서 미술 공부할 시절 벌써 그의 실력은 인정을 받을 정도로 대단했다.

 

흔히 생활고에 재료가 없어 담배은박지에 그림을 그린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학당시에 이미 은지화를 그려서 그 특별함과 창의성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뾰족한 침으로 그려서 상감기법으로 색을 밀어넣는 방식으로.....

 

 

 

 

 

 

1938년 운명적인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됩니다만...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한국전쟁으로 이들의 시련은 시작된다.

 

 

재산도 몰수 당하고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 내려와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가족들이 피난민 수용소에 갇힌후 이중섭은 부둣가에서 날품을 팔고 부산 시내를 헤매고 돌아다니며 어떤 힘든일도 마다않고 일을 해야만 했다..

 

근데 그것이 만만찮았다...

 

이중섭은 부자집에서 태어나 그림만 그리고 돈벌이 또한 해본적이 없었으며 할수 있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중섭의 경제 관념은 거의 없다고 봐야할 정도로 무지했으니....

 

당연히 5살3살 아이들과 프랑스 유학을 꿈꾸던 엘리트여인 마사코(남덕)도 거지꼴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

전쟁의 상흔이 없는 따뜻한 남쪽으로 가자~~!

(한묵과 부산 남포동에서...)

서귀포풍경

 

해와 아이들

 

 

도원

흰소

 

 

 

고된 삶에 지친 이중섭 일가는 제주도로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부부의 배려로 헛간을 얻어 지낼 수 있었으나 제주도로 왔다고 해서 삶이 나아진것도 아니었다.

 

 

제주도에 와서도 이중섭은 주인집에서 보리밥을 얻어 끼니를 해결했고, 양파 밭에서 날품을 팔고, 밭에 버려진 야채나 보리 이삭을 주워 생계를 이어나갔다.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서 게를 잡아다 삶아먹는 것이 전부 였다.

 

 

이중섭의 사업가 형 이중석의 아들 영진 은 부산에서 중섭과 헤어진 후 서귀포에서 오랜만에 만난 소감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귀포에서 내가 숙모를 처음 뵈었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숙모는 일본에서 건너올 때 입고 온 짙은 곤색 바지와 곤색 블라우스를 그때까지 입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해질 대로 해져서 누가 보아도 거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숙모의 팔을 붙들고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숙모님! 숙모님! 제가 꼭 옷 한 벌 해드릴게요!’라고 말하고 울었지요.”

 

 

게를 잡는 중에 군인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그림을 본 댓가로 쌀을 얻어먹을수도 있었고...

 

"게를 잡고 계시는군요..."

 

"살려고 태어난 것들을 잡고있습니다.헤에~~"

 

그래도 그들에게는 제주도에서의 7개월이 그나마 행복한 시절이었다.

제주도의 풍광을 실컷 그릴수 있었고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들과 시간을 같이 보낼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론 그림을 먹을것과 바꾸기도 하면서....

 

이 가족들은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들을 팔아 다시 부산으로 향한다...

그림값 80만환을 손에 쥐었으나 부인 남덕은 그중 50만환을 이중섭의 조카 영진의 대학등록금으로 떼어주고 남은돈을 가지고....

 

그남은 돈도 지인들에게 술값으로 다 날려버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신문 삽화를 기고해볼 것을 제안 받으나....

그릴수 없다하며 거절하기도 하면서 범일동 판자촌에 사는 친구 김종영에게 얹혀 살게 되었다.

 

 

 

 범일동의 풍경 1951

 문현동풍경

이중섭의 무능력과 생활고에 지친 아내 남덕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가 배를 얻어타고 일본으로 먼저 건너갈 것을 제안 하게 되고 이중섭은 이를 받아 들인다.

뒤에 이중섭도 따라가서 합류하기로 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보내고, 그날 밤 이중섭은 고향 후배인 김인호와 술을 마신다.

 

 

 

(아내 남덕과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직후의 이중섭)

 인호 형 나는 남덕이를 버린 죄인이야. …… 남덕이를 보내다니…… 남덕이는 이쁜데.”

 

“나는 죄인이야…… 그림을 그린다는 핑계로…… 마누라와 새끼를 굶겨 죽인 죄인이야…… 세상을 속인 죄인……이야. 나 같은 것을 누가 용서하겠어. 인호 형 안 그래.......”

 

“피난! 흑흑, 헤헤, 피난! 한이 너무 많아!”

 

-[이중섭평전] 고은 저-

 부부

 부부

 가족

 길떠나는 가족

 

 

 

까마귀

 

아내 남덕의 최근 모습과 평생 간직해온 이중섭의 파레트

 

그렇게...그렇게....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지만....

 

그의 불행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Forest Hymn / Bill Doug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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