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이씨 족보

전의이씨 시조 이도 묘(100명당)

백삼/이한백 2013. 9. 17. 14:37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 (2010.1.23)

충북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 599 번지(묘앞의마을)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비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 전주작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좌청용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입수룔우츨에서본모습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입수룡 좌측에서본모습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 전주작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 좌측석물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 우측석물

 

 

전의 이씨(全義李氏) 시조 이도(李棹) 묘


전의 이씨(全義李氏) 시조 이도(李棹)의 묘는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다. 천안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행정 삼거리에서 공주와 대전 가는 길로 갈라진다. 여기서 좌측 1번 국도 대전 쪽으로 들어서 직진하면 철로 위 고가차도를 지나 경부선 철로와 평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조금만 더 가면 우측으로 차단기가 있는 철로를 건너 양안리, 외오류로 가는 길이 있는데 여기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신도비와 묘소가 있다. 이도의 처음 이름은 이치(李齒)였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코자 남하하여 공주에 이르렀을 때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여 진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때 배를 만들어 도강(渡江)을 주도한 인물이 이치다. 견훤을 물리친 왕건은 이치의 공로를 높이 사 배의 노라는 뜻의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도(李棹)는 삼한개국익찬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開國翊贊功臣三重大匡太師)에 책록되고 전산후(全山侯)에 봉해졌으며, 말년에 군사요충지인 전의현에 운주산성(雲住山城)을 쌓고 이곳에서 살다 죽어 후손들이 전의(全義)를 본관으로 삼고 오늘의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공주 금강의 가난한 뱃사공으로 언제나 친절하게 손님을 모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배 삯을 받지 않고 건네주어 자비롭다는 소문이 나 있었고 특히 공주 부근의 거지들을 잘 보살펴주어 그들의 존경을 받아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루한 승복을 걸친 늙은 떠돌이 중이 와서는 급히 강을 건너자고 하였다. 뱃사공 이씨는 그 스님이 급한 볼일이 있나 싶어 급하게 노를 저어 강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중은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다시 강을 건너자고 하였다. 뱃사공은 사연을 물어보지도 않고 되돌아 강을 건너 주었다. 그러자 또 중은 강을 건너자고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종일 했지만 사공 이씨는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중이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 그러자 그 스님이 크게 감탄하고는 말하기를 "과연 소문대로 덕이 많은 분이구려. 보아하니 상중(喪中)인 것 같은데 묘 자리는 보아둔 것이 있소?"라고 물었다. 이씨는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 3년이 지났으나 아직 좋은 묘 자리를 찾지 못해 임시 방편으로 집 뒤에 모셔 두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노승은 자기가 자리를 하나 일러줄 터이니 꼭 그대로 시행하고 다짐하였다. 스님이 일러준 자리는 공주강 북쪽 산중턱에 있었는데 훗날 반드시 묘를 이장하자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니 아주 파지 못하도록 석회 1천 포를 써서 단단히 묻으라고 지시했다. 노승은 뱃사공 이씨의 덕을 시험하면서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하루종일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산을 살폈던 것이다.

뱃사공 이씨는 중이 잡아준 자리에다 아버지 시신을 이장하고 중이 시키는 대로 거지들의 도움을 받아 무덤을 단단히 했고 중이 써준 표석 하나도 같이 묻었다. 이 묘를 쓰고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부자가 되었고 공주 지방의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그 중 이치는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합하는 큰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십여 대가 지나서 조선조 광해군 때 명풍(名風)으로 이름 높은 박상희가 찾아와 묘 자리를 본 후 후손들에게 "이 자리는 산 뒤의 맥이 내려오다 끊겼기 때문에 일시 발복은 했을지 모르지만 곧 일족이 멸할 나쁜 자리니 즉시 이장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후손들은 풍수의 달인이라고 알려진 박상희의 말이 그럴 듯 하여 그의 말대로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하기 위하여 묘를 팠다. 그러나 단단한 석회로 묻어놓아 파기가 힘들었다. 겨우 한 층을 걷어내자 그 속에 글씨를 새긴 돌이 나왔다. "남래요사 박상희 단지일절지사 미만대영화지지(南來妖師 朴相熙 單知一節之死 未萬代榮華之地)" 즉 남쪽에서 요상한 지관 박상희가 와서 단지 용맥 일절이 죽은 것만 알고 만대영화지지라는 것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박상희와 후손들은 깜짝 놀랐고 선조의 용의주도한 글귀에 감탄하면서 그대로 다시 묻었다. 이 묘는 지금도 금강변인 공주시 시목동 공주대교 북단에 "전의이씨시조선산(全義李氏始祖先山)"이라는 비석과 함께 있으며 전국의 풍수 애호가들이 답사지로 빼놓지 않는 곳이다.

뱃사공 이씨가 이도(李棹)의 몇 대 선조인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므로 전의 이씨들은 이도를 1세조로 하여 지금까지 1천 년의 문중 역사를 자랑한다. 전의 이씨는 고려조뿐만 아니라 조선조에서도 정승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7명, 공신 6명, 문과 급제자 178명을 배출한 명문가다. 특히 이도의 11대손 이정간(李貞幹)은 효성이 지극한 사람인데 사헌부 요직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 중 노모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의 나이 80세에 노모는 100세였는데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며 노모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재롱을 부렸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세종은 그를 정2품으로 올리고 친필로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의 글귀를 하사하였다. 이 글씨가 세종대왕의 친필로 유일하게 전해 내려오는 것이며 전의 이씨 문중은 이를 대대로 가훈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도(李棹) 묘는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다.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보은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을 분맥하여 죽산 칠현산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리게 된다. 칠현산(516.2m)을 출발한 금북정맥 대간룡은 안성 서운산(547.4m)과 천안 성거산(579.1m), 태조산(421m), 경암산(319.1m)으로 이어져 경부고속도로 천안삼거리 휴게소 아래 고개를 건너 고려산을 만든다. 다시 전의면 덕고개 철로와 1번 국도를 넘어 국사봉(402.7m)을 만들고 차령을 넘어 봉수산(364.4m)로 이어져 행룡을 계속한다. 이도 묘의 주룡은 덕고개를 넘어 여러 산들을 기봉하면서 남쪽으로 오다가 한 용맥을 분맥하여 방향을 북쪽으로 회전하면서 자신이 행룡해 온 금북정맥 대간룡을 바라보고 가다가 들판을 만나 행룡을 멈추고 혈을 결지하였다.

군부대가 있는 주산에서 북쪽을 향하여 내려오는 주룡(主龍)의 행룡(行龍)과정은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질서 정연하게 기복(起伏)을 하면서 용의 균형을 유지하고 생기를 보호하기 위해 개장천심(開帳穿心)을 하는가 하면 과협(過峽)마다 아름다운 영송사(迎送砂)와 공협사(拱峽砂)가 있어 바람이나 물의 침범으로부터 주룡의 생기를 보호해주고 있다. 북향으로 혈을 결지하기 때문에 남쪽인 뒤가 높지 않도록 하여 햇볕을 차단하지 않는다. 주룡을 보호하기 위해서 양옆 가깝게 청룡 백호가 호종(護從)하는데 마치 귀인이 행차할 때 그를 경호하고 보필하기 위해서 근접 수행하는 경호원과 같다. 물 또한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용맥을 감싸면서 따라오는데 혈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조밀하여 주룡의 생기가 조금도 흩어지지 않는다. 용진처(龍盡處)에 이르러 커다랗고 둥근 입수도두(入首倒頭)를 만들어 정제하고 순화시킨 깨끗한 생기를 정축(停蓄)해 놓았다. 여기서 뻗은 선익(蟬翼)은 혈을 좌우에서 지탱해주고 혈에 응취된 생기가 옆으로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혈에 응취된 생기가 앞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순전(脣氈)이 두툼하면서 견고하게 있으며, 혈장(穴場) 아래 하수사(下水砂)는 우에서 좌로 휘어 감아주었다. 주산에서 내려온 주룡이 호랑이 등과 비슷하다면 입수도두, 선익, 순전이 있는 혈장은 커다란 호랑이 머리와 같아 전체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바라보고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이와 같은 형국(形局)을 복호형(伏虎形)이라고 한다. 이때 호랑이 앞다리에 해당되는 것은 혈을 바짝 감싸주고 있는 청룡 백호다.

복호형(伏虎形) 명당에는 호랑이 먹이에 해당되는 산이나 바위가 있어야 발복이 제대로 되는데 혈 앞 우측 철로 변에 개가 잠들어 있는 듯한 바위가 있다. 일제가 경부선 철로 부설 공사를 하면서 이 바위를 깨뜨리려하자 전의 이씨 문중이 일어나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여 이 부분을 곡선으로 하였다고 한다. 혈 앞 안산은 면구안(眠狗案)으로 혈을 향하여 있으며 명당은 평탄 원만하고 광활하다. 외명당인 들판의 물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 건해파(乾亥破)가 되는데 묘의 좌향(坐向)을 정좌계향(丁坐癸向)으로 하여 팔십 팔향법으로 최길지향(最吉之向)이라는 정양향(正養向)으로 하였다. 그러나 용혈 바로 좌측에서 나오는 물이 혈 앞 내명당에 모여 파구되는 방위는 계축(癸丑)이므로 병좌임향(丙坐壬向)을 하면 자왕향(自旺向)이 되어 더 빠른 발복이 되었을 것 같았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완벽한 것은 없는 법이다. 이곳에도 흉함은 있다. 우측 인방(寅方)에 흉석(凶石)이 있는데 정좌(丁坐)에 인방(寅方)은 겁살방(劫煞方)에 해당된다. 겁살은 지극히 흉한 살로서 살상 등 흉한 일을 당할 수 있다. 만약 내파(內破)를 기준으로 병좌임향을 놓았다면 겁살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이 보기 드문 명혈이기는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공주에 있는 전의이씨 시조 선산을 가려면 다시 철로 변으로 나와 건널목을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전의에서 공주 가는 691번 도로로 계속 직진하면 금강을 건너기 전 공주 시외버스터미널이 나온다. 좌회전하여 금강을 따라가면 구 공주대교 아래를 지나 바로 좌측 산 위에 있다. 이 묘를 잡아준 스님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 진양각(眞陽閣) 위로 가파른 산행을 해야하지만 묘지에 올라서면 금강과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시가가 아름답게 보인다. 공주시 봉황동에 있는 산이 이곳의 안산인데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아들어 오는 모습이다. 주산은 귀인(貴人) 탐랑성(貪狼星)인 목성(木星)으로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귀인이 앉아있는 것과 같다하여 이곳을 귀인단좌형(貴人端坐形)이라고 한다. 사람의 인체에 비유한 정혈법(定穴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곳은 사람의 명치끝에 해당되는 당심혈(當心穴)로 보고 있다. 당심혈은 이른바 인시하관(寅時下棺)에 묘시발복(卯時發福)한다는 속발지지(速發之地)가 많다.

이곳의 용맥은 들판을 지나 왔기 때문에 지도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도 묘를 만든 금북정맥의 국사봉(402.7m)에서 남으로 갈라져 나온 산맥이 사기소고개를 넘어 음지말에서 또 다른 국사봉(348.5m)을 만든다. 여기서 연기군 의당면 덕학리 불당고개를 넘어 행룡한 다음 의당면 가산리 천태산(391.1m)을 만들고 유계리로 내려와 691번 도로 종고개를 넘고 여기서부터는 낮은 야산과 들판으로 행룡한다. 장기면 송문리 성재골과 월대를 지나 하봉리 별신당과 동편말 그리고 하산을 지나 36번 도로 지랭이고개를 넘어 한 맥은 장군산(354.3m)으로 보내고 낮게 깔린 용맥은 정명학교와 장기농공단지 월송을 지나 금강에 이르러 우뚝 산을 들어올리는데 이곳의 주산이다. 목성체인 주산 중출맥(中出脈)으로 내려온 용은 크게 낙맥(落脈)한 후 갑자기 주저앉듯 약50m정도를 옆으로 행룡하여 혈을 결지하였다. 그리고 행룡을 멈추지 않고 혈 아래에 내려가 잘록한 고개를 지나 다시 봉우리를 만들고 행룡을 멈추니 용 등에 혈을 맺은 기룡혈(騎龍穴)이다.

기룡혈은 괴혈(怪穴)로서 얼핏보기에는 행룡 과정에 있는 과룡처 같은데 용이 잠시 머뭇거리듯 주저앉아 혈을 결지 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번개 불이 번쩍할 사이 예상치 못한 곳에 혈을 결지한다하여 섬룡입수혈(閃龍入首穴)이라고도 한다. 기룡혈을 맺고 앞으로 나간 용맥은 반드시 끝에 가서는 좌측이나 우측으로 돌아 끝맺음을 하거나 봉우리를 치켜세운 다음 끝을 맺어야 한다. 여기서는 금강을 만나 용머리를 하늘로 높이 쳐들고 멈추었으니 용이 여의주를 머금는 듯한 형상이다. 이를 비룡함주혈(飛龍含珠穴)이라고도 한다. 기룡혈은 역량이 매우 커서 장상공후(將相公侯)가 연출하며 백자천손(百子千孫)하는 대혈을 결지한다. 그러나 기룡혈은 입수도두, 선익, 순전, 혈심이 뚜렷하지 않아 자칫 잘못하면 과룡처를 잘못 오인할 수 있으므로 귀신이 아니면 구별하기 어렵다고 하는 곳이다. 물도 입수도두에서 분수(分水)하나 순전 아래에서는 분명한 합수(合水)가 안되어 양파(兩破)가 되므로 파구처를 분간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곳은 입수룡이 곡입수(曲入首)로 분명하게 보이고, 입수도두 역시 단단하게 뭉친 것을 구별할 수 있으며, 하수사가 우선(右旋)으로 감아주어 혈이라는 것을 다른 기룡혈에 비해 쉽게 알 수 있다.

안산은 금강 건너 산인데 금남정맥의 계룡산에서 온 것으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양 산맥이 마주보고 이 혈을 끌어안고 있는 형상이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금강은 수백리를 돌아 이 혈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흘러간다. 기룡혈은 내명당이 없으므로 내파구(內破口)를 측정할 수 없어 외파구(外破口)를 보아야 하는데 금강 물이 서쪽 금강교 아래를 지나는 지점이 최종견처(最終見處)가 된다. 그곳에는 강 가운데에 해와 달같이 생긴 섬이 있어 유속을 조절하는 수구사(水口砂)다. 파결패철 8층인 천반봉침으로 측정한 방위가 신술(辛戌)이고 금강은 좌수도우(左水到右)하므로 갑좌경향(甲坐庚向)을 하여 팔십 팔향법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한다는 자왕향(自旺向)을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도 약점은 있으니 내명당이 없다는 것이고, 금강이 이곳을 완전하게 감싸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금강은 전체적으로 옛 공주시가를 감싸주면서 흘렀다. 이곳의 혈명(穴名)은 위에서 말한 여러 명칭으로 불릴 수 있다. 만약 나에게 혈명을 붙여보라고 하면 봉황귀소형(鳳凰歸巢形)이라고 하고 싶다. 왜냐하면 봉황동에 있는 안산이 마치 날개를 펴고 이곳으로 날아오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때 봉황 집은 주산을 나무로 보고 나무 중턱에 있는 이 혈이고 알은 혈 앞에 있는 동그란 산이다. 만약 봉황이 날개를 펼친 듯한 산을 주산으로 하여 혈을 결지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이 될텐데 공주시가 전체적으로 봉황 품안에 들어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