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식단

일본 두부 원조는 한국 마산이다."

백삼/이한백 2013. 11. 19. 16:57

   
 
 

"일본 두부 원조는 한국 마산이다."

일본의 전통 있는 두부로 고치시(高知市)의 당인(唐人)두부를 꼽는다. 

이 당인두부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포로로 납치된, 경주에서 성장한 박호인이 고지시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일부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어 바로 잡고자 한다.

박호인(朴好仁)은 경주 성장이 아니며 진주성 싸움에서 포로로 잡힌 것도 아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두부 만드는 법을 중국으로부터 배웠고 예전에도 두부는 일본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일부 학자들도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일본의 두부는 조선에서 전래 = 일본 시코쿠(四國) 고치시(高知市)현립도서관에 소장된 카이잔슈(皆山集) 전 10권 중 9권에 보면 "두부에 관해서 어떤 책에 전해져 오기를, 옛날 이 나라에는 두부가 없었다. 1592~ 1595년에 초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가 조선의 포로들을 끌고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 중에 박호인(朴好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자손도 역시 이 나라에 살았는데, 이곳의 영주 야마노치 카즈토요(山內一豊)공이 고치성을 쌓을 때, 박씨를 지금의 토진마치(唐人町)에 두고 부렸다. 

토사군 카가미가와(鏡川)의 북쪽 땅에서 두부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즉 오늘날의 아키즈키(秋月) 모씨의 조상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두부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이곳의 두부에는 미치지 못한다. 두부 점포가 68호 이상 증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기록으로 볼 때 일본의 두부는 1592∼95년 사이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도 조선보다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두부의 일본 전래 경위와 함께 여기에서 풀린다.

필자는 2002년 일본 오사카(大阪) 외식업자들의 초청에 의해 강의를 하러 간 김에 두부를 알아보기 위해 두부의 일본 전래 자료를 비교적 자세히 조사하여 책을 낸 교토(京都) 근교에 있는 시가(滋賀)현립대학 인간문화학부 정대성(鄭大聲) 교수를 만났다. 필자를 만난 정 교수도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한일 식생활문화에 대해 잘못 이해하며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조차도 연구하려는 학계의 움직임이 별로 없다.

일본은 외국인이 살고 있는 지역을 토진마치(唐人町)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문헌에 唐人町을 당나라 사람으로 직역하여 이 음식은 당나라에서 일본에 전래되어 온 음식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 부분은 박호인의 두부 전래 과정과 고치시에 두부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알게 된다.

   
 
 
△일본에 두부마을이 형성되는 과정
 =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전쟁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15만8700명의 군사가 조선으로 동원된 이 전쟁에 토사에서도 초소카베 모토치카가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진해시 웅천동인 웅천(熊川城)에 상륙했다.

1593년 6월 일단 화의가 성립되어 일시 휴전이 이루어져 진주(이 대목에서 박호인이 진주에서 포로가 된 것으로 잘못 알려짐)까지 입성한 초소카베는 6월 29일 토사로 돌아오지만 1597년 다시 출병하여 다음해인 3월 18일 귀국하는데, 이때 초소카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조선의 장인(匠人)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게 된다.

박호인도 이때 포로가 아닌 초소카베의 회유에 의해 일본에 인삼재배법을 알려준 초소카베의 주치의 경동(經東)을 비롯해 30명중 일원으로 당시 우라도(浦戶)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나가하마(長濱)에 도착한다. 박호인은 고치성 토진마치에 두부조합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아들 박원혁(朴元赫)을 낳는다. 박원혁은 12세에 토사에 와서 무사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시동이 되는데, 시동이 되려면 일본인이 아니면 안되었다.

그래서 조선에서 5번부대의 무사 초소카베와 박호인간에 회유시 담판을 할 때 증인으로 입회를 섰던 규슈(九州)의 무사 아키즈키 타네나가(秋月種長)의 양자로 삼는 언약을 맺어, 박원혁은 아키즈키(秋月)의 가호와 종(種)자를 하나 나누어주어 아키즈키 초지로타네노부(秋月長次郞種信<하타 타네노부:奏種信>)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박원혁은 성장하여 일본에 머물며 두부조합의 운영을 맡았고 초자에몬(長左衛門)이라고 불렸고, 지금도 고치시 케라(介良) 마을의 대 지주로 우마스케가 초자에몬의 7대 손이다. 이들은 지금도 두부집을 이어 받고 있다.

박호인은 진해현감(진해현:현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의 손자였으며 아키즈키(秋月)가의 초자에몬 즉 박원혁은 진해 현감의 증손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고치시의 단단한 두부는 아키즈키(秋月)가에서 계승되어 오고 있으며 그 가문의 내력은 아키즈키 족보에 잘 기록되어 있었다. 

한편 박호인은 일본에 건너 간 지 20년만에 조선으로 귀국했으나 박원혁의 묘는 고치시 히츠장(筆山) 야마노우치 일가의 묘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갔든 회유에 의해 데려 갔든 각 분야의 장인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 우대를 하면서 그들의 솜씨를 뿌리내려 일본의 문화로 발전시켜 나갔다.

△조선의 두부 제조 기술, 일제 때 거의 사라져 = 그러나 일제 점령기간 동안 조선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콩이 일본으로 공출되었고 특히 태평양전쟁을 전후해서는 조선에서 생산되는 모든 콩이 일본으로 보내져 기름을 짜 군수용으로 사용되고 콩 기름을 짜고 남은 콩깻묵을 조선 백성들의 식량으로 배급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두부 만드는 다양한 기술은 사라지게 되고 오히려 일본에서는 두부 만드는 기술이 전래되어 한·일간에 두부 제조 기술의 격차를 벌려 놓게 되었다. 

/김영복(경남대학교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