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단원 김홍도 큰도장 찍힌 그림, 마침내 발굴

백삼/이한백 2016. 2. 5. 09:45

【서울=뉴시스】신동립 ‘잡기노트’ <567>

서예가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은 고서화 감식과 전각(篆刻)에서도 당대의 권위다. 위창이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와 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을 집대성한 것이 ‘근역인수(槿域印藪)’다. 이 책 내용 중 ‘김홍도 인장’편에는 근역인수에 수록된 인장들 모두를 압도하는 가로·세로 각 12㎝ 크기의 대형 인장이 실려 있다.

‘其人 姓金氏 名弘道 字士能 號丹邱 古加耶縣人也’(그 사람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홍도, 자는 사능, 호는 단구이며 옛 가야현 사람입니다)라고 새겨진 도장이다.

이 인장의 실물은 물론, 인장이 찍힌 작품도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일부 미술사학자는 김홍도(1745~1806?)의 본관인 김해의 옛 지명을 굳이 쓴 점에 주목했다. ‘김해 사람’이라고 표기해야 마땅한데 ‘옛 가야현 사람’이라고 했다. 김해보다는 가야라는 지명에 더 익숙했던 당시 중국이나 일본 등지로 보낸 작품에 단원이 일부러 사용한 인장일 개연성이 크다. 김홍도는 단원(檀園) 말고도 단구 등 5개의 호를 썼다.

간송미술관 연구위원과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원을 역임한 미술사가 고 오주석은 “압도하는 크기에 장중한 각법(刻法)을 갖춘 이 도서(인장)에는 성명과 자(字), 호(號), 본관까지 격식이 다 갖춰져 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글자 ‘야(也)’라는 어조사를 써서 ‘~입니다’라는 공손한 문체로 돼있다. 규모, 형식, 내용 어느 모로 보나 국왕에게 올리는 초대작(超大作)에 사용됐던 도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나, 이 도서에 찍힌 작품은 현재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 또한 도서 자체의 소재 역시 알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작품의 망실은 화가 김홍도의 비극이자 후손인 우리 모두의 비극이라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서울대박물관 진준현 학예연구관도 이 인장을 언급하면서 이 인장이 사용된 작품의 예는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가로 170·세로 130㎝ 화면 상단 중앙에 바로 이 인장을 찍은 그림이 거짓말처럼 남아있었다. 조선에서 청나라로 갔다가 19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1997년 9월 베이징 구완청(古玩城) 개막식 행사로 열린 베이징·상하이·톈진과 32개 성시(省市)의 고미술 전시회에 문제의 그림이 나왔다. 지린성 자료관(檔案館)이 출품했다. 마침 베이징대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됐다. 지난해 이 그림을 유형문화재로 지정해달라고 문화재청에 신청했다는 소장자는 “최소 30억원의 가치가 있는 국보급”이라고 귀띔했다.

화가 황원철 명예교수(국립창원대 미술학)의 판단도 같다. 경남도립미술관장과 경상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낸 황 교수는 “김홍도다운, 참으로 절묘한 묘사력”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좌측 하단의 노 젓는 사공이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은 점으로 봐 비가 내리는 강가의 풍경을 운치있게 표현하고자 했는데, 멀리 있는 좌우측 봉우리가 보일 듯 말 듯 안개가 휘감고 있는 부분”을 주목했다.

“중앙에는 기암괴석과 소나무, 늘어진 수양버들, 그리고 2층 누각이 안정감 있게 자리잡고 있는데 ‘소상야우’라는 제목으로 (중국 후난성) 소상강의 풍경을 그린 겸재 정선이나 김홍도의 화풍을 계승한 긍재 김득신 그리고 16세기에 그린 작가미상의 그림에서도 2층 누각이 항상 존재하며 풍광들도 이 작품과 유사하다. 이런 점으로 비춰 볼 때 이 작품도 소상강의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문화부국장 rea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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